195화
무심한 듯 편지를 꺼낸 형만은 눈으로 편지를 읽었다.
10초 내외의 짧은 시간 만에 내용을 다 확인한 형만은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떤 녀석이었냐?”
작은 한숨을 내쉰 형만이 그제야 용주와 눈을 맞췄다.
“그 자리에 나타난 녀석은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역병 의사 가면을 쓰고 있었다. 대충 키가 160 정도 되는 여자였지.”
“다른 건?”
“왜? 그 상황에서 녹음이라도 켜놨길 기대했던 거냐?”
“…쯧! 애송이 주제에.”
혀를 찬 형만이 미간을 좁혔다.
“그 자리에선 분명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선 분명 목격했지.”
“다른 곳이라고?”
“이걸 남기면서 녀석은 한 가지 물건을 더 남겨 놓았었다. 이형 워프 장치였지.”
“…….”
“네게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달란 목적에서 건넸던 모양인데… 어째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공간과 연결되었더군. 위아래의 경계가 무너져 있는 이상한 공간이었지. 거기서 녀석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녀석의 얼굴도 그때 볼 수 있었지.”
“그래?”
“나이는 대략 30대 중후반 정도. 왼쪽 눈 밑에 물방울 모양의 점이 하나 있었지.”
“…….”
형만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채 1초도 가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있나? 윤현이 나와 접점이 있는 인물인 것처럼, 어쩌면 녀석도 너와 특별한 악연이 있거나 한 인물은 아닐까 싶은데.”
“아니. 잘 모르겠군.”
“애송이. 혹시 네가 그렇게 부르던 여자 헌터가 있었다거나?”
“글쎄.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다만.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지?”
“녀석의 공간 속에서 한 남녀의 대화를 들었었다. 둘 다 얼굴과 목소리가 뒤틀려 있었지만, 그 단어만큼은 똑똑히 들리더군.”
“겨우 단어 하나로 설레발치지 말아라, 애송이.”
‘그럼 녀석은 왜….’
용주가 고개를 갸웃한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현관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
주변이 조용했기에 소리는 선명하디 선명했다.
‘설마 태스크 포스?’
온몸의 신경이 쭈뼛 선 용주는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애송이처럼 굴지 마라. TF는 아니니.”
형만을 힐끔 바라본 용주의 시야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수지.
용주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손에선 쇼핑백 하나가 뚝 떨어졌다.
“…….”
용주에게 다가온 수지는 다짜고짜 용주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용주의 몸 곳곳을 살피는 그녀의 눈빛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말해 주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다만.”
“응. 그런 것 같네.”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수지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야! 이용주!!!”
해일과 같은 거대한 외침이 달팽이관을 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서윤.
신경질적으로 거리를 좁힌 서윤은 다짜고짜 용주의 따귀를 날렸다.
“아차차…. 진짜로 저질러 버렸네.”
뒤따라온 예나가 이마를 짚었다.
승우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
“너! 잘도 잠수를 탔겠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우리한테 한마디 말도 안 하고! 그러고 그냥 곱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이 나쁜 자식아!!”
오른뺨에 손을 올린 용주가 서윤을 바라보았다.
“너 꼴이 대체 그게 뭐야.”
화가 난 듯 잔뜩 치켜올린 서윤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순간, 아까 형만이 했던 이야기가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 같았다.
이기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거 전혀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었다.
헌터는 혼자다.
어쩌면 헌터가 되고부터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 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게 당연했으니까.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불필요한 것이었으니까.
“미안…하다.”
조용히 눈을 깜빡인 용주가 고개를 숙였다.
용주의 뺨을 후려갈겼던 서윤은 움켜쥔 손으로 용주의 가슴을 한 번 더 툭 건드렸다.
“미안한 줄 알면 됐어. 다신 그러지 말라고.”
아랫입술을 깨문 서윤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디 네 입으로 설명 좀 해보라고.”
“맞아요. 저도 듣고 싶어요. 팬텀은 어떻게 된 거예요?”
주원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윤현의 공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팬텀이 나타났었다.”
“또 다른 팬텀? 설마, 프라이드 그 자식?”
서윤의 물음에 용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녀석이었다. 러스트라고 본인을 소개한 녀석이지. 녀석이 윤현을 데려갔다. 대화나 분위기를 보니 윤현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모양이더군.”
“그 테러가 조직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더군.”
“어찌 됐든 윤현이 계속 널 노리고 있단 것만큼은 사실이란 이야기네. 윤현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단 거고.”
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이건 카오스 게이트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헌터만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무차별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냥 두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태스크 포스가 움직이고 있다고 그러더군.”
“태스크 포스라고?!”
깜짝 놀랐던 서윤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긴 그런 사건이었으니, 그쪽에서도 움직일 만하겠지.
“그럼 차라리 잘된 거 아니야? 그쪽에 협력을 구하면….”
“태스크 포스. 위험해.”
수지가 끼어들었다.
“위험하다니?”
“태스크 포스. 잡으려 할 거야. 예전이랑 달라. 공안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을 할 거면 뭐 제대로 좀 이어 말해 봐.”
“말 그대로. 개나 돼지나 똑같이 족쳐서 유죄로 만들 거라는 이야기지.”
“뭐?!”
용주의 대답에 서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억지로 억지로 끼워 맞추면 이해가 되긴 했는데, 정말 그게 맞는 건가 싶었다.
“‘눈’이란 자가 움직이고 있을 거라더군.”
“눈? 그게 뭔데?”
“헌터의 기운을 탐지하는 데 특화된 인물이라더군.”
용주의 설명에 승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한마디 부연 설명 해드리자면 ‘눈’은 사람을 지칭하는 동시에 자리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는군.”
“응? 그게 무슨 차이인데?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거 아니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예나가 물었다.
“눈이 특정 개인만을 의미하는 거라면 그 사람이 사라지면 눈도 함께 소멸하겠지만, 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리가 공석이 되면 또 다른 사람을 자리에 세우면 그만인 거죠. 물론, 충분한 역량이 되는 사람을 찾는 게 관건이겠지만요.”
승우의 대답에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들으니 확실히 둘의 차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태스크 포스의 눈이 움직이고 있다고? 그거 정말이야?”
수지가 다시 한번 물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었다.
“그렇다더군.”
“그렇다는 건… 새 눈을 구했단 말이네.”
“새 눈이라고?”
용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태스크 포스의 눈. 공석이라고 알고 있었거든. 꽤 오랫동안.”
“원래 있던 눈이란 사람은요?”
주원이 물었다.
그렇게 중요한 자리면 보통은 후임이 정해지기 전까진 공석으로 두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고나, 자연재해 같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실종됐다고. 그렇게 들었었어.”
“죽었을 거란 이야기도 있었지.”
형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긴 형만은 거실 한편에 기대어져 있던 자신의 대검을 챙겼다.
“형만 아저씨?”
“볼 일이 좀 있다. 늦을 테니 문만 잘 닫고 가라.”
“중요한 일인 거야?”
“그래.”
“카오스 게이트?”
게이트를 언급하는 수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아니, 만나야 할 사람이 좀 있다.”
“그거 가지고?”
“시기가 시기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냐?”
“음…. 그것도 그렇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형만은 하나밖에 없는 팔을 수지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알겠다는 그의 눈빛에 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건 전기건 마음대로 써도 되니, 갈 때 치우고만 가라. 특히 저 지저분한 건 확실히 정리하고.”
형만이 대놓고 용주를 콕 집어 말했다.
“잠깐! 잠깐만! 손님만 놔두고 집주인이 막 집을 비워도 되는 거야?”
두 사람의 대화에 서윤이 끼어들었다.
“안 될 이유는?”
“그건….”
“위층에만 올라가지 마라. 개인적인 공간이니.”
형만이 서윤을 지나쳤다.
‘만난다고?’
용주는 단번에 그가 나가려는 이유가 뭔지 깨달았다.
일이 생긴 이유는 필히 그 편지 때문.
그렇다면 만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러스트.
그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려는 것이었다.
“잠깐.”
용주가 형만을 불러 세웠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주어를 생략한 용주가 물었다.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당황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글쎄. 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만.”
“그런 되도 않는 거짓말을. 나도 같이….”
“뭐가 어떻게 되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네가 할 일은 거기까지였고, 이건 내가 할 일이다.”
두 사람의 눈빛이 강렬하게 부딪쳤다.
형만이 정말로 러스트를 만나려고 하는 거라면, 이건 엄청난 기회였다.
인질도 없고, 시련도 끝낸 지금이라면 녀석과 충분히 붙어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지금 행동은 팬텀과 상관없는 독단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
나올 사람은 높은 확률로 그녀 혼자.
역으로 일대 다의 상황을 만드는 것 역시 가능했다.
만약 그녀를 생포할 수 있다면, 복잡하게 얽혀 가는 지금 상황들에 단번에 활로가 뚫릴 게 분명했다.
“내가 그걸로 납득할 거라 생각하나 보지?”
“따라 나와라, 애송이. 괜히 일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형만은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우비에 달린 후드를 눌러쓴 용주는 그를 뒤따랐다.
“금화 형, 저희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두 사람, 아무리 봐도 한판 붙을 거 같은 분위기인데요.”
“일단은 그냥 놔두세나. 제삼자가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네.”
“네? 그렇지만….”
“이용주 헌터는 뭔가 아는 눈치더군요. 둘이 풀게 두는 게 저도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빠져주는 게 지금은 저 두 사람을 도와주는 걸 겁니다.”
승우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수지는 조용히 쇼핑백을 주웠다.
쇼핑백 안쪽엔 태그도 떼지 않은 옷이 들어 있었다.
“뭐야? 그거 안 건네줬었어?”
한발 늦게 수지의 손을 확인한 서윤이 물었다.
“응. 안은 아니고 못이었지만. 아닌가. 안이 맞나?”
“뭐라는 거야.”
“놀랐었거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아 보여서.”
“그건… 그렇네.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것 같긴 해.”
서윤이 공감을 표했다.
저 쇼핑백이 자기 손에 있었어도 분명 떨어뜨렸을 것이다.
아니면 무기로 사용했거나.
“그래서 저 녀석 상태는 어땠어? 어디 큰 문제 있는 건 아니었고?”
“응. 내가 딱히 더 손 쓸 부분은 없었어.”
“그래? 다행이네. 진짜 뭔 일 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세포 활성도가 전보다 더 올라간 느낌이었어.”
“세포 활성도? 그게 뭔데?”
“음…. 세포가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라고나 할까.”
“이용주 저 녀석, 남들보다 회복이 빠른 거랑 관계있는 거야?”
“응. 그럴 거야.”
“그럼 회복력이 더 올라갔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네?”
“응.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수지가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잘못 느낀 걸 거야.”
“뭐야, 맥 빠지게.”
“미안.”
두 손으로 쇼핑백을 잡은 수지는 용주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었어.’
용주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어둡고, 무서운 기운이 스쳐 갔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헌터의 기운이라기보단, 언노운이 풍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 * *
정원으로 나온 용주와 형만은 잘 정돈된 마당을 걸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용주의 한마디에 멈춰선 형만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는데. 녀석이 단독 행동을 벌인 거면, 윤현이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뭘 모르나 본데, 애송이. 네 경솔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저쪽은 인질을 쥐고 있다.”
“인질이라고…?”
“한태영. 누군지는 기억하고 있겠지?”
예상치도 못한 한마디에 용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인질이라고? 한태영 그 녀석이? 그렇지만 이번에 습격받은 게이트는…!”
“널 놀라게 해주고 싶다면서 비밀로 하고 있었나 보더군.”
“비밀로 하다니, 대체 뭘….”
“그 정도 눈치도 없는 거냐? 진 각성이다. 한태영 그 녀석, B급 헌터로 승급했었다.”
“…….”
오른손을 움켜쥔 용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