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카각!!”
지면을 부수며 거리를 좁혀 오는 또 한 명의 용주.
맹렬한 기세로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은 기괴하고 위협적이었다.
‘빨라!’
지면을 부수며 움직이는 녀석의 움직임에 용주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불규칙하게 좌우로 움직이는 녀석의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녀석이 지나가고 한발 늦게 지면이 부서지는 듯한 착시까지 보일 정도였다.
‘큭…!’
맞부딪치는 손톱과 룬검.
힘에 찍어 눌린 용주는 칼날을 살짝 비틀었다.
일격에 산산이 조각나는 대지.
공격을 흘려보낸 용주는 곧장 점멸로 뒤를 잡았다.
녀석이 자신과 같은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면, 어지간한 상처로는 끝을 낼 수가 없었다.
전투 속행의 효과.
머리를 제외한 급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더라도 즉사하지 않는다.
머리를 제외한 절단된 신체 부위를 빠르게 수복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노릴 1순위는 머리!’
뒷덜미를 베어 내는 깊은 상처.
흉쇄유돌근을 뚫고 들어간 칼날에 용주는 더욱 힘을 실었다.
상처를 따라 피가 솟구쳤고, 이대로 끝을 내나 싶었다.
하지만.
“카…가각!”
전투는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순간, 허공을 크게 가르는 룬검.
눈앞에서 사라졌던 놈의 모습은 다시 그 자리에서 나타났다.
용주의 눈동자에 비치는 또 다른 자신의 눈동자.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동자는 부패한 입을 크게 벌렸다.
역으로 용주의 목을 물어뜯는 또 다른 용주.
놈의 머리채를 붙잡은 용주는 있는 힘껏 녀석을 패대기쳤다.
“하아… 하아….”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검붉은 핏줄기.
상처 부위를 짚은 용주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후 강직으로 막은 게 이 정도인가?’
녀석의 이빨에 뜯기기 바로 직전.
아슬아슬하게 사후 강직을 발동할 수 있었다.
보통의 공격이었다면, 거기서 대부분의 피해를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은 끔찍했다.
찢긴 상처 면을 타고 따뜻한 액체가 줄줄 흘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편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처 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끔찍하니 말이다.
“…….”
호흡을 삼킨 용주가 가볍게 왼손을 펼쳤다.
용주에게서부터 퍼져 나가는 하얀 안개.
땅거미 지는 영혼 안개는 일대를 잠식해 나갔다.
‘영혼 안개.’
일렁거리며 펼쳐지는 안개의 날개.
영혼 안개에 범위에 잠식당한 또 한 명의 용주에게선 붉은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붉은 아지랑이를 두른 괴물의 모습을 한 용주.
하얀 안개를 두른 사신의 모습을 한 용주.
서로 다른 형태를 갖춘 두 사람의 살기가 맹렬하게 부딪쳤다.
‘어디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해보자고.’
‘동력 석영’을 꺼내든 용주는 석영을 깨부쉈다.
MP 바를 코팅하는 하늘색의 빛.
두 수치를 대신해서 사용할 수 있는 60의 동력을 얻은 용주의 몸에 하늘색의 띠가 둘렸다.
마치, 토성처럼.
스팀팩을 사용한 용주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두 발과 네발.
같은 듯 다른 얼굴을 한 두 사람의 공방.
순간적으로 높이 뛰어오른 또 다른 용주는 허공을 차며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이어지는 날카로운 강하.
두 번의 할퀴기를 중첩해서 쌓아 올린 용주는 총알처럼 날아오는 놈의 공격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촤아악!!
서로를 찢는 붉은 손톱.
왼쪽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용주는 부패한 놈의 입 안에 손톱을 욱여넣었다.
입술에서부터 귀까지 이어지는 깊은 상처.
용주의 손톱에서 피어오른 붉은 불길은 녀석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부패한 입속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성흔.
고통의 낙인이 새겨진 또 하나의 용주는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끔찍한 상처를 공유하며 엉겨 붙는 두 사람의 전투.
녀석의 가슴을 꿰뚫으며 퍼 올린 용주는 그대로 검 끝을 지면에 박아넣었다.
선명한 빛을 발하는 룬문자.
마나를 주입해 소울을 채운 용주의 절대 영도는 그대로 녀석에게 직격했다.
중심부부터 꽃피우는 얼음.
놈의 왼손을 짓밟은 용주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손톱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두 눈과 머리.
“카각!”
오른손을 힘껏 들어 올린 또 다른 용주는 지면을 때려 부쉈다.
콰과과광!!!
그 순간, 요동치는 피의 폭발.
지면에 작렬한 아웃레이지 스내치에 휘말린 용주는 지면과 함께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칫…!”
오뚝이처럼 폴짝 일어선 녀석은 곧장 용주에게로 달려들었다.
작렬하는 아웃레이지 스내치.
타이밍에 맞춰 용주는 점멸을 사용했지만, 그런 용주를 기다리는 건 같은 구도 같은 각도에서 떨어지는 녀석의 공격이었다.
‘내 움직임을 읽었다고?!’
같은 거리, 같은 방향으로 따라온 점멸.
왼손을 급히 든 용주는 놈의 공격을 맞받았지만, 힘 자체의 우위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카각!!”
막아서는 손과 함께 용주를 찍어누르는 힘!
부서지는 지면을 타고 엄청난 양의 피가 용솟음쳤다.
용주의 손목을 붙잡은 녀석은 반대편으로 용주를 패대기쳤다.
용수철처럼 튀는 용주의 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용주의 룬검이 용주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압도적인 속도로 용주의 목을 붙잡은 녀석은 용주를 다시 한번 처박았다.
이윽고 시작된 죽음의 질주.
용주의 몸과 머리를 지면에 갈기 시작한 녀석은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지면과 그 속에 진하게 묻어나는 피.
순식간에 줄어드는 HP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용주는 놈을 바라보았다.
고통의 낙인의 효과는 아직 유효했다.
아웃레이지 스내치의 데미지에서 놈 역시도 자유롭지 못했다.
놈의 몸 여기저기가 터져 나갔고, 깨진 녀석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부패한 녀석의 이빨이 보였고, 뺨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아주.
아주 천천히.
‘이건….’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감각.
극에 달한 통증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이 뛰던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눈앞에 흐릿해지고, 물속에 잠긴 듯 귀가 어두워졌으며,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의….’
비슷.
아니, 어쩌면 동일할지도 모르는 감각을 딱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이건….
죽음이었다.
‘아니….’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그때 봤던 파노라마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고, 볼 생각도 없었다.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다고. 난…!’
흐릿하게 번져 가던 용주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기적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살길을 만드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
“네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전부 삼켜서라도, 살아남아 보이겠어!”
남은 마나를 모두 끌어모은 용주는 물어뜯기를 사용했다.
부패하는 피부.
중첩이 더해갈수록 부패는 심해졌고, 핏방울이 방울방울 피어올랐다.
참기 힘든 심한 갈증이 밀려왔다.
가슴에서 시작된 건지.
머리에서 시작된 건지도 모를 강렬한 충동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게 느껴졌다.
‘삼켜지지 마.’
이미 한 번 자신을 삼켰던 폭풍우.
망망대해 위에 몰아치는 산더미 같은 해일과 발목을 잡는 소용돌이.
지금의 자신은 그 앞에 위태롭게 떠 있는 돛단배와 같았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고.
당장이라도 삼켜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삼켜질 수 없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이 상태를….
이 힘을 컨트롤해 내야만 했다.
“카…각…!”
용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리.
다시 원래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용주는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서로 다른 생김새를 가졌던 두 사람의 손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각?”
갑작스러운 변화에 고개를 갸웃하는 또 한 명의 용주.
순간적으로 두 다리를 바짝 끌어당긴 용주는 있는 힘껏 녀석의 명치를 쳐올렸다.
용주의 두 다리 역시 팔과 마찬가지로 녀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충격에 날아가는 또 한 명의 용주.
지면에 착지한 녀석이 부자연스럽게 비틀거렸다.
지면을 적시는 선명한 핏자국.
핏줄기가 시작된 곳은 놈의 왼손.
아니, 정확히는 왼손이 있었던 자리였다.
“각….”
사라져 버린 왼손을 향했던 시선이 용주에게로 향했다.
눈동자에 비치는 붉은 아지랑이.
형태를 잃어 가는 사신의 날개 아래로 한 마리 짐승의 모습이 보였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씹고 있는 용주.
용주가 씹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팔이었다.
“카가가각…!”
용주의 입에서 또 한 번 기괴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태롭긴 했지만, 용주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한 소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날뛰기 시작하는 두 마리의 괴수.
두 발로 걷는 존재가 사라진 이곳에 더 이상 사람처럼 움직이는 존재는 없었다.
두 괴수가 부딪칠 때마다 공간이 울렸고, 피가 흩뿌려졌다.
한쪽의 상처가 생기면 다른 한쪽의 상처가 아물었고.
반대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꼭 물어뜯거나, 적의 살점을 씹고 뜯는 행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적에게 가하는 모든 피해가 곧 흡혈로 이어졌다.
전투의 판도는 비등했지만, 용주가 아주 약간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핵심이 되는 건 바로 왼팔의 부재.
상대적으로 다소 움직임이 밀리는 용주였지만,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 비교 열세를 극복하고 있었다.
‘버텨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끓다 못해 혈관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자신의 몸이지만 컨트롤하는 게 쉽지 않았다.
힘과 속도.
기타 모든 기능이 압도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스팀팩을 사용했을 때와도 전혀 다른 속도와 감각이었다.
의식은 날아갈 것 같았고, 온몸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 표현이 지금보다 더 잘 어울릴 때가 있을까 싶었다.
‘버텨 내.’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는 목소리.
네 다리로 땅을 디딘 용주는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카악… 카각!!”
세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녀석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저 녀석… 뭐 하려는 거지?’
이빨이 닿을 거리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위협을 할 시기는 더더욱 아니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녀석의 행동.
“……!”
거기 집중하고 있던 용주의 동공이 순간 크게 반응했다.
놈의 입 앞으로 붉은 핏방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의 구체가 되어가는 핏방울.
온몸의 신경이 경고하고 있었다.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달려들까?’
지금 이 순간이 이 시련의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분기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택지는 여럿 있었다.
달려들 수도 있었고, 피할 채비를 할 수도 있었다.
어느 선택지를 고르든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었고,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 했다.
‘아니야.’
두 팔에 힘을 준 용주는 더욱 견고하게 땅을 디뎠다.
‘녀석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달려들지도 피하지도 않는 제3의 선택지.
할 수 있을까? 가 아니었다.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놈과 자신의 힘은 같은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했던 것처럼….’
전신을 타고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불길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흐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했던 것처럼….’
이형 워프 장치에 마나를 실었던 그때의 감각.
많은 것이 달랐지만, 이것과 그건 분명 같은 원리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 방울을 시작으로 방울방울 모여들기 시작하는 핏방울.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 해.’
울퉁불퉁 원형을 갖추지 못하는 집합체에 용주는 더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구의 형태.
온전한 구의 형태를 만들어 낸 용주의 두 팔이 조금 뒤로 밀려났다.
같은 크기.
같은 형태를 가진 두 개의 구체.
붉게 응어리진 두 개의 구체는 서로를 향해 포문을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