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파밧!
사원의 마지막 계단을 딛고 뛰어오른 용주는 업고 있던 세모를 내동댕이쳤다.
용주의 뺨을 스쳐 지나가는 마름모의 세 번째 칼날.
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진 용주는 그대로 마름모를 덮쳤다.
세련되고 정돈된 동작.
잘 훈련되고 다듬어진 기술.
말끔한 정장 위를 난도질하는 무자비한 공격에 그런 건 없었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이 아닌가.
그걸 구분하는 게 망설여질 정도로 말이다.
마름모의 가슴에 선명히 새겨진 성흔.
녀석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용주는 점멸을 사용해 자리를 옮겼다.
용주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나는 동그라미.
역으로 동그라미가 서 있던 곳에서 나타난 용주는 인스네어를 사용했다.
한 번 더 동력원을 잠식하는 초록 가스 지대.
아까 구입했던 30짜리 마나 포션 2개를 꺼낸 용주는 들이붓듯이 병을 비워 냈다.
상점에 생긴 30짜리 물약의 개당 가격은 65골드.
5짜리 물약에 비하면 가성비가 떨어졌지만, 깨작깨작 5짜리로 회복하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네 마리 다 모였군.’
마지막으로 도착한 네모를 끝으로 인스네어의 범위 안에 네 존재들이 모두 모였다.
사전 준비는 이걸로 끝.
이제부터가 본 무대였다.
‘일격에 전부 무력화시켜야 해.’
용주의 손을 타고 피어오르는 붉은 핏방울.
한 자리에 뒤엉킨 이들을 향해 돌진한 용주는 동그라미의 목을 붙잡았다.
작렬하는 아웃레이지 스내치.
갈가리 찢긴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빗발쳤고,
부서진 마루를 뚫고 붉은 피가 요동쳤다.
스킬에 직격당한 건 동그라미였지만, 피해는 녀석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세 녀석 역시도 연쇄 폭발의 범위 안.
이미 데미지를 입었던 세모와 마름모는 물론이거니와 네모까지도 폭발의 사정권 안에 있었다.
사원 전체를 흔드는 강렬한 폭발이었지만, 그렇다고 일격에 모든 적들이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다.
피 폭발을 뚫고 달려온 네모.
넝마가 된 모습으로도 무력화되지 않은 녀석은 용주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전기톱을 휘둘렀다.
과열 상태의 전기톱은 회전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살점을 베어 내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흩뿌려지는 붉은 피.
“구억…!”
단말마의 비명을 머금은 네모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용주가 입은 것과 동일한 모양, 동일한 깊이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걸로 넷 다 무력화.’
동그라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용주는 준비해 둔 마지막 스킬을 선보였다.
‘영혼 안개.’
용주를 중심으로 낮게 내리깔리는 하얀 안개.
마치 영혼이 흘러가는 듯 잔잔하게 퍼져 나가는 안개는 넝마가 된 사원을 뒤덮었다.
무력화된 네 존재에게선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영혼 안개와 동화된 아지랑이들은 흐름을 따라 용주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용주의 시선이 움직였다.
반투명하게 하늘거리는 영혼 안개가 보였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영혼 안개들과는 달랐다.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이 안개는 마치 한 쌍의 날개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건… 보좌관의….’
양쪽으로 쫙 펼쳐진 영혼 날개의 모습에서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왕의 보좌관.
뼈로 이루어진 그 녀석의 날개와 지금 뒤로 보이는 날개는 이루고 있는 물질이 다를 뿐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존재들에게서 흘러나온 아지랑이들의 종착지가 바로 그곳.
영혼이 만든 날개는 이질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왼손을 든 용주는 근처를 지나는 안개를 어루만졌다.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천사라도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양쪽 어깨에서 장검들을 뽑아낸 용주는 동력원으로 다가갔다.
▷ 룰렛이 활성화됩니다.
룰렛의 마지막 기회.
정신을 집중한 용주는 자그마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룰렛을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가동률.
용주는 계속해서 룰렛을 이어 갔다.
“캬악!”
그러는 사이 무력화 상태에서 회복된 세모가 위협적으로 일어났다.
무방비 상태의 용주를 보며 세모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어째선지 거리가 생각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인스네어에 장시간 노출된 세모의 속도는 평소의 절반 이하.
그마저도 얼마 못한 세모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맹독.
그리고 영혼 안개가 주는 지속 피해.
방금 회복했던 세모는 다시 무력화 상태에 빠져 버렸다.
마름모와 동그라미도 마찬가지였다.
순서대로 무력화에서 벗어났던 녀석들 또한 제대로 된 공격을 해보지도 못한 채 다시 무력화되었다.
▷ 룰렛을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가동률은 쭉쭉 올라갔다.
현재 가동률은 82%
불과 4분 남짓한 시간 만에 벌써 100%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맞추면….’
위이잉!
마지막 룰렛에 집중하고 있던 용주의 귀에 날 선 전기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녀석이 내는 소리가 상당히 거슬렸다.
아무리 집중해도 룰렛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소음이었다.
‘젠장.’
과열 상태에서 회복된 속도가 용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전기톱을 미리 저 멀리 던져둘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충분히 기회가 있었었는데 말이다.
‘빨리 다시 쓰러지라고.’
용주의 기대와 달리 네모의 기척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다른 세 녀석들이 다시 무력화된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무력화되고도 남을 시간이었건만.
네모는 꾸역꾸역 계속 거리를 좁혀 왔다.
아무래도 그 떡대 같던 체구가 장식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m 안쪽으로 좁혀진 거리.
톡!톡!독!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룰렛에 집중하고 있던 용주는 태엽을 밀어 넣었다.
▷ 룰렛을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 현재 가동률 : 100%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화하는 빛기둥.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던 전기톱 소리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 5개 동력원에 모두 동력을 공급하였습니다.
▶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대항력이 4 상승했습니다.
▶ 어둠 그늘 숲의 충만한 동력으로 최대 MP가 30 상승했습니다.
▶ 출구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400 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재생, 할퀴기, 물어뜯기, 사후 강직,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맹독, 무호흡, 인스네어, 영혼 안개, 폭발성 담즙, 스팀팩, 고통의 낙인.
▷ ‘4색 큐브’를 획득했습니다.
- 어둠그늘 숲의 네 존재를 부릴 수 있습니다.
- 한 번에 하나만 소환이 가능합니다.
- 큐브의 동력이 떨어지면 아이템은 소멸합니다.
- 동력 : 100.
▷ ‘동력 석영’을 획득했습니다.
- 어둠그늘 숲의 동력의 결정체입니다.
- 사용 시 일시적으로 유지되는 60의 동력을 획득합니다.
- 동력은 MP를 대신해 우선적으로 소모됩니다.
▷ ‘다섯 잎의 롱기누스’를 획득했습니다.
- 어둠그늘 숲의 동력에 벼려진 일격 필살의 장창입니다.
- 투척 시 일대에 강렬한 빛의 폭발을 만들어 냅니다.
▷ ‘섬마음 등대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후우….”
클리어 메시지를 확인한 용주가 그제야 태엽을 놓았다.
용주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와 가스 사이에 있던 네 명의 존재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 마지막 일격은 피해 갔네.’
예상보다 끈질겼던 네모의 저항.
마지막 일격에 최소한 머리만은 피하자란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룰렛이 좋은 타이밍에 나와 줬다.
‘총력전이었어.’
레벨이 오른 스킬들만 봐도 가지고 있는 스킬 대부분이었다.
사용은 했지만 스킬 레벨은 오르지 않은 아웃레이지 스네치.
사족 보행과 2단 점프처럼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 스킬들까지 포함하면 그 가짓수는 더 많아지고 말이다.
마지막 전투에선 말 그대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영혼 안개…. 확실히 많이 잡아먹는 값은 하는 모양이네.’
활짝 펼쳐졌던 날개의 일렁거림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사라져가는 영혼 안개.
용주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통증은 없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상처는 모두 아물어 있었다.
영혼 안개의 HP를 회복 효과.
생명력을 빨아들일 대상이 하나가 아니었던 만큼 그 효과는 탁월했다.
‘MP 30. 이건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되겠어.’
이번 클리어 보상에선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MP +30.
스킬이 늘어나는 속도와 스킬의 요구값에 비해 MP가 늘어나는 속도는 상당히 더뎠었다.
이번 퀘스트에서만 해도 MP 물약을 몇 개를 마셨는지….
충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걸로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됐습니다.
▷ 섬마음 등대가 다시 빛을 발하도록 하십시오.
▷ 다음 중 하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 퀘스트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 등대지기의 사망
- 등대의 파괴
- 3일이 지나도 등대가 꺼져 있는 경우.
평소와 같은 포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출구는 아까 막혀 있던 그곳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용주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 전에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 ‘계승자의 첫 번째 시련’
▷ 계승자의 첫 번째 시련을 진행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추가로 충족해야 합니다.
1. 퀘스트 게이트 클리어 (1/1)
2. 카오스 게이트 내 적 저치 (30/30)
3. ‘물어뜯기’ 누적 사용횟수 (20/20)
4. HP 누적 피해 (100/100)
시련 탭을 연 용주는 조건들을 확인했다.
클리어되지 않았던 첫 번째 조건.
퀘스트 게이트에 대한 조건까지도 이제 충족되어 있었다.
▶ ‘계승자의 첫 번째 시련’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 계승자의 첫 번째 시련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시련 탭을 확인하자 하나의 안내 문구가 추가로 나타났다.
‘따로 이동하지 않고 여기서 바로 진행할 수 있는 건가?’
상점 탭을 연 용주는 5짜리 마나포션을 20개 정도 구입했다.
그 자리에서 소모한 마나를 모두 회복하는 용주.
마지막 빈 병을 던진 용주는 입술을 닦아 냈다.
‘어디 해보자고.’
시련을 승인하자 포탈 옆에 또 다른 포탈이 나타났다.
칠흑빛을 발하는 다크 포탈.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용주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위험한 적.
녀석이 적어 놓았던 그 말을 이제 직접 확인할 때였다.
* * *
새까만 어둠 속을 가른 용주는 또 다른 차원에 도착했다.
‘여긴….’
용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처음 도착한 장소일 텐데,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는 풍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오스 게이트?’
얼어붙은 이곳의 풍경은 팬텀에게 습격을 받았던 그곳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게이트 내 곳곳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생김새만 비슷한 게 아니었다.
윤현의 불길이 남긴 그을음.
워커가 만든 크레이터.
프라이드가 남긴 벽과 천장의 상처.
고대의 재앙이 날뛰며 부순 대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붉은 피.
여긴….
분명 그곳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서윤이 당했던 벽에 손을 올린 용주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게이트는 닫혔다고 그랬었는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
바로 그때.
낮고 뒤틀린 사내의 목소리가 용주의 귓가를 스쳤다.
소리에 반응한 용주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런 용주의 눈에 보이는 한 가지 풍경.
게이트의 일부가 파편처럼 깨지고 있었다.
단순히 벽 하나가 부서지는 그런 게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쪼개져 흩날리는 듯한 모습.
무너져 내린 차원 너머론 붉은색을 띠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
고개를 든 용주는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일렁거리는 두 차원의 경계면에서 시작해 곧게 뻗은 계단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왕좌에 앉아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두 눈에 오래된 상처가 있는 중년의 사내.
자신을 계승자로 만들고.
자신에게 점자를 남겼던.
바로 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