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용주는 룰렛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전혀 없진 않았지만,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동력원을 가동할 수 있었다.
한 번의 실패로 버려야 하는 시간은 24시간.
리턴값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아무 문제 없는 상태로도 부담스러운 리스크를 지금 이….
역병에 걸린 상태로 감당하긴 더더욱 힘들고 말이다.
동력원으로 돌아온 용주는 태엽을 잡았다.
그런데.
‘뭐야….’
용주의 표정이 순간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 현재 가동률 : 0%
20% 언저리까지 돌려놓았던 가동률이 0이 되어 있었다.
녀석들이 동력원에 손을 댔을 때 평균적으로 5~10% 정도의 동력이 날아갔었다.
그런데 지금 날아간 건 그에 2배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
‘설마… 아니겠지.’
용주의 머릿속에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역병에 오염된 이 동력원.
어쩌면 건들 때마다 모든 동력을 잃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설마 그 정도까지 불합리하겠냐 싶었지만서도 가능성이 또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 역병의 오염 정도가 증가했습니다.
▷ 증상의 정도가 올라가며 빈도수가 상승합니다.
감염되고 시간이 지나서인지.
동력원에 또다시 접촉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러운 연못물에 흠뻑 젖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견제받을 때마다 최소 20%가 날아간다라….’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조금 전 넣었던 ‘태엽 룰렛’을 바라보았다.
리스크와 리턴은 동일했지만,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이 조금 전과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
만약 리스크가 큰 만큼 리턴값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가령 그 한 번으로 감소치를 훨씬 초과하는 가동률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분의 기회가 한 번만 있어도 고민이 덜했을 텐데.’
룰렛을 꺼낸 용주는 동력원을 살펴보았다.
딱 한 군데.
이게 들어갈 만한 장소가 있었다.
기회는 딱 한 번.
룰렛이 돌아간 순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룰렛을 꽂아 넣었다.
▶ 태엽 룰렛을 사용했습니다.
▷ 룰렛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여섯 번째 태엽이 생기자 동력원에 한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동력원 위로 나타난 동그란 시계가 바로 그것.
옅은 하늘색을 띤 시계의 외곽엔 60개의 점이 찍혀 있었고, 하나뿐인 침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태엽을 잡고 있는 용주는 룰렛에 정신을 집중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톡!
시계 방향으로 움직인 침.
침이 한 획 움직이자 오래된 괘종시계에서 날법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 획에서 머무른 시간은 대략 2초 남짓.
잠깐이라도 망설이면 바로 놓칠만한 시간이었다.
용주는 소리에 집중했다.
방금 그게 기준이 되는 소리였다.
0에서 1로 움직인 침은 곧장 2로 움직였다.
독!
그 순간 들려오는 두 번째 소리.
‘이런 미친….’
비슷한 듯 다른 소리를 확실하게 인지한 용주의 머릿속에 순간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장난이 심해도 이건 선을 세게 넘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보기가 2개 나온 시점이었다.
비교 대상이라 해봤자 첫 번째 소리밖에 없었다.
적어도 비교할 수 있는 보기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장난도 정도껏 하라고!’
속으로 외친 용주가 신경질적으로 태엽을 멈췄다.
둘 중 하나는 꽝.
첫 번째 선택지는 이미 지나갔으니 무조건 이걸 붙잡아야 했다.
이걸 놓치면 어차피 룰렛은 실패였다.
“…….”
경직된 얼굴로 결과를 기다리는 용주.
▷ 룰렛을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 가동률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현재 가동률 : 30%)
▷ 룰렛을 이어서 사용하시겠습니까?
▷ 이어서 사용할 경우 횟수 소모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결과를 확인한 용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50%의 도박은 다행히 성공이었다.
‘그나마 첫 번째가 아니었던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이건….’
뺨을 후려 맞고 이가 무사한 걸 감사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불과 몇 초 만에 증가한 가동률은 30%.
한 땀 한 땀 쌓아 올리던 속도에 비하면 가히 엄청난 진척도였다.
‘한 번 더 할 거냐고?’
용주의 대답은 당연 YES.
소리도, 방식도, 결과도 이미 확인했으니 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
마지막 룰렛이 멈추자 동력원이 활성화되었다.
가동률이 100%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시간이 워낙 짧아서인지 녀석들의 방해도 들어오지 않았다.
▷ 역병이 제거되었습니다.
▷ ‘역병균체’를 획득했습니다.
- 자신의 모습을 본뜬 역병균체 한 구를 소환합니다.
- 역병균체는 1의 HP를 가지며, 움직이지 않고, 공격 능력이 없습니다.
- 역병균체를 파괴한 대상은 역병균체에 오염됩니다.
- 오염은 일정 시간 대상에게 심한 구역감을 유발합니다.
네 번째 동력원이 돌아가자 용주를 괴롭히던 역병도 같이 사라졌다.
룰렛을 회수한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력원에서 시작된 푸른색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뭐지?’
같은 결과에서 파생된 다른 결과에 용주의 시선이 움직였다.
하늘을 수놓고 있는 기둥은 이거 하나만이 아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빛기둥은 총 다섯 개.
푸른색의 기둥이 네 개였고, 나머지 하나는 붉은색이었다.
‘이 위치…. 설마.’
푸른 기둥이 올라온 네 개의 위치를 보며 한 가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정답지라 할 수 있는 게 눈앞에 있으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좋았다.
네 개의 푸른 기둥은 지금까지 발견한 동력원이 있던 장소들.
붉은색의 기둥이 솟아 있는 저 장소가 마지막 다섯 번째 동력원이 있는 장소일 것이다.
다섯 번째 동력원이 있는 장소는 다른 네 개의 동력원이 있는 위치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곳.
퀘스트 게이트의 정중앙이었다.
* * *
붉은 기둥의 진원지에 도착한 용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지막 동력원은 지상에서 조금 떨어진 사원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원이라 해도 말이 그런 거지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다.
있는 건 나무로 된 마루와 담장.
그리고 2층 높이의 계단 정도.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난 계단은 나무로 된 것도 있었고, 돌로 된 것도 있었다.
사원 주변엔 돌로 된 조각상들이 여럿 있었다.
몸은 사람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제각각 네 개의 도형을 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그 녀석들처럼.
‘갈고리도 부담될 정도로 많은데.’
눈에 띄는 특징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의식의 갈고리가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밀집해 있었다.
다섯 개 중 하나 꼴로는 까마귀가 앉아 있었는데, 주변 요소들과 합쳐지니 상당히 불길한 느낌을 풍겼다.
‘위치상으로 보면 썩 좋진 않은데.’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해 있단 것은 용주에게 상당히 불리한 요소였다.
역시 신경 쓰이는 건 마름모의 존재.
네 개 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는 이곳의 구조는 저격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놈들의 동선이 전부 겹치는 위치일지도 몰라.’
지금까지의 경우로 보면 동력원마다 평균적으로 두 마리의 존재가 붙었다.
녀석들도 녀석들 나름의 영역과 활동 범위가 있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여긴 맵의 정중앙.
네 녀석이 모두 달려든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위치였다.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계단을 오른 용주는 아까 회수했던 룰렛을 쥐었다.
속전속결.
이대로 한 번 더 놈들이 반응하기 전에 끝낼 생각이었다.
▷ 룰렛을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첫 번째 룰렛을 맞춘 용주는 이어서 계속 룰렛을 돌렸다.
첫 번째 소리가 60개 중 거의 마지막에 나온 바람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잡아먹혀 버렸다.
톡!톡!톡!톡!
균일한 간격으로 이동하는 룰렛.
위이잉!!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용주의 귀에 찢어지는 기계음이 섞여들었다.
“까아악!”
날아오르는 까마귀들.
‘벌써?’
날아오른 까마귀들을 곁눈질한 용주의 표정이 구겨졌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반응이 너무 빨랐다.
‘아니야. 집중해. 룰렛은 이미 돌아가고 있다고.’
다급함을 애써 잠재운 용주가 룰렛에 집중했다.
부아앙!!
천천히 간만 보던 전기톱 소리는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맹렬하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마치 레이싱카에서나 날 법한 그런 소리였다.
‘빨리… 빨리….’
다급하게 진행되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40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기다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는지가 아니라 이쯤 되면 알고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은 상황이었다.
‘젠장.’
애써 잠재운 다급함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숲을 가로지른 네모가 사원 계단을 질주해 오고 있었다.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도 계단을 오르는 녀석은 거의 불도저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마무리를….’
그렇게 생각한 용주는 일단 인스네어를 사용했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없는 현시점에서 적의 시야라도 어떻게 해볼 심산에서였다.
인스네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차적인 혼선.
네모의 직접적인 공격은 사후 강직으로 받아낼 생각이었다.
피해가 없진 않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위잉~ 윙윙윙!!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한 소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용주는 소리를 기다렸지만 50이 넘어가는 시점에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녀석이 인스네어의 범위 안쪽으로 들어오자 소리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녀석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사후 강직을 사용한 용주는 충격에 대비했다.
그 순간.
쾅!!
동력원이 강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간 태엽 룰렛은 사원의 구석까지 날아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안 그래도 안 좋았던 용주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네모는 아니었다.
왜냐면 녀석은….
위잉~!!
뒤를 돌아본 용주의 시선에 네모의 모습이 들어왔다.
곧장 밀고 들어온 네모는 용주를 들이받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의 연속.
멀쩡한 전기톱을 놔두고 어깨로 친 용주를 향해 네모는 엄청난 속도로 방향을 틀었다.
말도 안 되는 관성 드리프트를 선보인 네모는 그 속도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 속도면 날아갈 법도 하건만.
놈의 다리는 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이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지?’
충격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데미지 자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의문이었다.
분명 무슨 노림수가 있으니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쉬익~!
바로 그때.
네모에게 끌려가던 용주에게 장검이 날아들었다.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용주의 시선.
장검이 날아든 방향에는 석상들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석상들 사이에 섞여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이 거기 있었다.
마름모.
남은 두 자루의 칼을 꺼내 든 녀석은 까마귀를 피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 그 폭발…. 혹시.’
놈이 가진 장검이 두 자루라는 부분에서 가능성이 더해졌다.
비슷했던 상황보다 훨씬 큰 피드백이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
용주가 한 가지 의문에 답을 찾는 사이, 또 한 번의 관성이 용주를 덮쳤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야 속 풍경.
‘이 녀석 설마…?’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친 용주가 왼손을 움켜쥐었다.
이 녀석이 뭘 노리고 있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점멸을 활용한 용주는 네모의 힘에서 벗어났다.
지면을 밟은 용주는 네모를 노려보았다.
그 속도 그대로 원하는 목적지까지 도착한 네모는 고개를 저었다.
과열된 전기톱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정지해 버렸다.
‘역시 그런 거였나.’
날아온 칼날을 잡아챈 용주는 마름모에게 칼날을 돌려주었다.
네모가 멈춰 선 곳은 의식의 갈고리 아래.
그 속도.
그 높이로 그대로 끌려갔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저기 꿰뚫렸을 것이다.
사후 강직의 효과로 저항했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억지스럽게 파고들 줄은 몰랐는데….’
검을 뽑아 든 용주가 경계 태세를 취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는 상황이 더 악화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