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이건….’
정체불명의 물건과 마주한 용주의 머릿속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세 개의 손가락을 가졌던 세모의 손.
크기도 형태도 그 녀석의 것과 놀랍도록 유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원시적인 이미지의 토템.
인신 공양을 했다거나 하는 문명이라면 이러한 토템에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토템….’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미지에 용주는 이걸 부숴 보기로 했다.
▷ ‘토템’을 파괴했습니다.
▷ 동력원에 걸려 있던 ‘주술’이 해제되었습니다.
토템을 걷어찬 용주에게 나타난 메시지.
‘오케이.’
부서진 토템을 확인한 용주가 남은 잔해를 한 번 더 짓이겼다.
타닥이던 잔불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
이러려고 여기 왔던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론 잘 풀렸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걸로 주술은 해제.
아까 돌리지 못했던 동력원까지도 돌릴 수 있었다.
* * *
♩
마무리 지은 두 번째 동력원.
곧장 붙은 세 번째 동력원의 동력도 이제 90.
슬슬 마무리 단계였다.
세모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지만, 녀석 정도면 차라리 양호한 편이었다.
등장이 직관적이기도 했고, 친절하게도 동력원 바로 옆엔 표식을 그려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신이 녀석이었으면 동력원에 바로 딱 붙여서 표식을 둘러쳤을 것 같은데.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밟지만 않으면 표식은 발동하지 않는다.
그럼 답은 간단.
점멸을 사용할 수 있는 용주에겐 그건 활짝 열려 있는 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됐던 건 역시 마름모 녀석.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녀석의 원거리 공격은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지금 저 앞에 있었다.
‘세 발만 피하면 돼.’
녀석의 첫 번째 칼날은 왼쪽 어깨를 살짝 스쳐 가는 선에서 그쳤다.
저글링 하는 검은 이제 세 발.
날아오는 두 번째 칼날을 피해 용주는 자리를 이탈했다.
콰앙!
용주를 대신해 칼날에 맞은 동력원.
굉음을 내며 폭발한 동력원의 동력은 8%나 감소해 있었다.
‘이런.’
동력이 감소하는 건 경험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었다.
마름모의 칼날이 동력원에 닿는 건 무조건 막아야 했다.
‘움직임을 아예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녀석이 사라지기까지 앞으로 두 발.
쓰러뜨릴 순 없지만, 그런 방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남은 두 개의 동력원을 돌릴 때 신경 쓸 게 하나 줄어들 텐데 말이다.
‘밑져야 본전인데. 시도라도 해볼까?’
룬검을 뽑아 든 용주는 마름모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날아오는 세 번째 장검.
점멸을 활용해 검의 궤적을 뚫고 나간 용주는 마름모의 가슴 중앙에 검을 박아 넣었다.
‘절대 영도.’
빛을 발하는 룬 문자.
삽시간에 퍼져 나간 얼음은 꽃이 피어나듯 마름모를 잠식했다.
강렬한 한기가 주변을 잠식해 나갔고, 새하얀 서리가 주변 풀과 바위를 덮었다.
절대 영도의 위력이라면 용주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몸으로 직접 느껴 봤으니 말이다.
마름모의 움직임이 멎은 것을 확인한 용주는 검을 뽑아냈다.
룬검에 남은 소울은 0.
절대 영도 한 방에 모든 소울을 사용해 버렸다.
‘효과가 없진 않은 건가.’
절대 영도가 직격한 순간, 마름모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둔해졌다.
들고 있던 마지막 검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 버렸다.
마름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상태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클리어할 때까지 안 깨어나 주면 제일 고맙고 말이야.’
걸음을 옮긴 용주는 남은 동력원을 마무리 지었다.
8%나 까 먹혔었기에 시간은 좀 더 들었지만, 다행히 별다른 태클은 들어오지 않았다.
‘좋아. 다음은….’
마름모의 상태를 확인한 용주는 일부러 표식을 밟았다.
“키약!”
튀어나오는 세모의 분신.
물어뜯기를 사용한 용주는 녀석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방해되라고 심어놓은 이 표식들이 용주에겐 구급상자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그거 하나로도 충분한 이유였지만.
용주가 이걸 작동시킨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까아악!”
날아오르는 까마귀들.
초인종에 반응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오고 있는 세모의 모습은 이제 안 오면 섭섭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신이 아무리 여기저기 있어도 녀석의 본체는 하나였다.
녀석을 이쪽으로 불러들인다는 건 다른 쪽 동력원에서 녀석이 멀어진다는 이야기.
마름모를 무력화시켜 놓은 시점에 세모의 동선을 이쪽으로 불러들이면 남은 일들을 진행하는 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상처를 회복한 용주는 세모의 분신을 놓아 주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분신은 표식 경계면에서 위협을 하고 있을 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슬슬 움직이….’
용주가 세모의 동선을 피해 움직이려던 그때.
꿈틀!
용주의 눈에 낯선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마름모의 모습.
부자연스럽지만 분명하게 움직인 마름모는 들고 있던 칼을 던졌다.
‘벌써 움직인다고…?’
아직 몸이 맘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녀석의 공격은 자신에게서 상당히 많이 벗어난 곳을 향했다.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녀석의 중심에서부터.
가장 안쪽에서부터 얼렸었다.
그 정도 데미지와 작용으로 번 시간이 고작 이 정도뿐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일시적.
무력화 시간은 용주의 예상을 넘어선 정도로 짧았다.
‘이래서야 단가가 전혀 안 맞잖아.’
마지막 장도를 사용한 마름모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불만을 뒤로한 용주는 조용히 움직였다.
직접적으로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선택으로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케이.’
동력원 수색을 계속하던 용주의 눈에 네 번째 동력원이 들어왔다.
네 번째 동력원은 고여서 썩은 연못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 중에 자리한 동력원을 바라보았다.
끈적하고 축축한….
녹색의 점액이 동력원을 잠식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지저분한 건 아닐 것 같은데.’
불길함 속에 용주가 태엽을 잡았다.
▷ 역병에 오염됐습니다.
▷ 불규칙적으로 심한 구역감이 밀려옵니다.
▷ 불규칙적으로 기침을 유발합니다.
▷ 기침을 한 자리에 일정 시간 유지되는 ‘역병균체’가 소환됩니다.
- 소환된 역병균체는 마지막으로 본 침입자의 위치를 가리킵니다.
▷ 오염된 동력원의 동력이 100%가 되면 역병은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난리구만, 아주….’
이를 악문 용주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순간 심한 구역감이 밀려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는 걸 의식적으로 강제로 삼킨 용주는 입안에 고인 것들을 뱉어냈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즉각적일 줄이야.
‘참는 것도 꽤 고역인데.’
태엽을 잡은 용주는 그대로 태엽을 감았다.
좋든 싫든 돌려야만 하는 동력원이었다.
이 역한 충동을 조금이라도 적게 느끼기 위해서라도 빨리 이걸 돌려야 했다.
“콜록!”
태엽을 감던 용주의 입에서 순간 기침이 나왔다.
구역감과 달리 전조도 없었고, 참거나 대비할 찰나도 없었다.
낯선 시선과 그림자에 용주는 고개를 들었다.
쇠톱을 든 동그라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그라미?’
순간 놀란 용주였지만, 이건 그 녀석이 아니었다.
녀석과 달리 이 녀석은 전신이 짙은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쇠톱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콜록거리지도 않았다.
‘이게 역병균체란 건가?’
역병균체를 무시한 용주는 계속 태엽을 감았다.
녀석이 어떤 행동을 취했다면 용주라도 이러진 못했겠지만, 이 녀석 딱히 위협을 가해 오거나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역병균체는 말 그대로 그냥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콜록! 콜록!”
20%
첫 번째 태엽이 막 감길 무렵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용주가 한 기침은 아니었다.
기침의 주인은 동그라미.
연못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그대로 물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까마귀로 녀석의 동선을 파악한 용주는 한발 먼저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동력원으로 돌아온 동그라미는 역병균체를 관찰했다.
같은 자리에서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역병균체는 용주가 도망간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한 동그라미는 나무를 관통하며 나타났다.
휘익!
패기롭게 휘두른 줄톱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콜록!”
고개를 푹 숙였던 동그라미가 옆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역병균체가 또 다른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귀찮게 굴어주잖아.’
점멸로 위치를 옮긴 용주가 기침을 했다.
기침의 주기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까는 분명 이 정도로 주기가 짧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기침을 하고 말았다.
검을 뽑아 든 용주는 역병균체를 베어 냈다.
하지만.
베어지지 않았다.
검은 홀로그램을 벤 듯 역병균체를 관통해 버렸다.
‘이런 식으론 없앨 수 없단 건가.’
연못 반대편으로 동선을 짠 용주는 시야의 사각에서 방향을 돌렸다.
“후우~.”
최대한 호흡을 내뱉은 용주는 무호흡 스킬을 사용했다.
단순히 숨을 참는 정도가 아니라 정지해 버린 호흡.
뭔가 끓어오르는 듯한 반사 작용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다행히 그게 기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끊어져 버린 단서.
동그라미는 마지막 역병균체가 가리키는 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포위망이 너무 좁은데.’
마지막에 했던 기침 때문에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수색 범위가 많이 좁혀져 있었다.
그나마 각을 넓힌 게 이 정도였다.
“우읍…!”
동향을 살피던 용주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차오른 구역감이 입까지 오른 게 느껴졌다.
방심했다.
기침이 나오지 않는다고 구역감까지 올라오지 않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근거 없는 확대 해석을 해버리고 말았다.
“콜록!”
용주의 소리에 동그라미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정확한 방향을 잡고 다가오는 동그라미.
주변을 곁눈질하던 용주의 눈에 썩은 연못이 보였다.
냄새가 진동하고 정체 모를 부유물들이 떠다니는 연못은 보는 것만으로 거부감이 드는 비주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 대결은 가성비가 너무 떨어져.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수밖에.’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검 대신 발광 크리스털을 쥔 용주는 놈이 좀 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휘익!
허공을 가른 줄톱.
줄톱은 아슬아슬하게 용주를 비껴갔다.
“콜록!”
동그라미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린 용주는 놈의 면전에서 스위치를 올렸다.
“……!”
고개를 돌리는 동그라미.
지체 없이 움직인 용주는 연못에 발을 담갔다.
소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쓴 건 물의 일렁거림 정도.
시각과 청각을 되찾은 동그라미는 용주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 풍경 속에 사라진 건 용주뿐이었다.
후욱!
분노를 표하며 허공에 쇠톱을 휘두른 동그라미.
신경질적으로 동력원을 내려친 동그라미는 자리를 떴다.
‘이 정도면 갔겠지.’
뭍으로 올라온 용주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이 워낙 탁했기에 시야를 확보하기는커녕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 타이밍을 잡은 건 순전히 감.
전에 마주했던 녀석이 동력원 주변에 머물렀던 시간을 나름의 근거로 삼긴 했지만, 근거라고 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다행히 간 모양이네.’
근처에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력원의 상태로 보아하니 깽판을 한 번 치고 가긴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심한 구역감을 삼킨 용주가 왼손을 바라보았다.
물속에 잠겨 있을 때 무언가가 손에 걸렸었다.
용주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불순물 범벅인 태엽.
동력원에 있는 것과 거의 유사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이 정도 무게감이 있는 물건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상식과 괴리감이 있었지만, 용주는 깊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따져봐야 자신만 손해이니 말이다.
▷ 태엽 룰렛
- 동력원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대 3회)
- 룰렛이 활성화됩니다.
- 룰렛은 시계 방향으로 자동으로 돌아갑니다.
- 룰렛은 총 60번의 소리를 내며 60개의 소리 중 단 하나만 다른 음색을 가집니다.
- 음색이 다른 한 부분에서 룰렛을 멈추는 데 성공하면 가동률이 크게 상승합니다.
- 잘못된 부분에서 멈추거나, 룰렛이 원점으로 돌아오면, 가동률이 크게 떨어지며, ‘동력 정지’ 상태가 됩니다.
- 동력 정지 상태의 동력원은 24시간이 경과해야만 다시 동력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룰렛이라….’
용주의 시선이 동력원을 향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새로운 선택지를 마주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