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사람…. 헌터?”
관 속에 남성과 눈이 마주친 러스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사람.
살아 있었다.
“흐흐흐. 놀란 모양이네.”
그리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당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그의 미소였지만, 동시에 거기엔 깊은 만족감이 함께 녹아 있었다.
“왜?”
“그건 힘을 추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질문일까, 아니면 이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일까?”
“둘 다. 그리드. 보스 명령 어겼어.”
“어기다니~ 오해야.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 잠시 보류해 둔 것뿐이라고.”
스스로 닫힌 관을 그리드가 다시 짊어졌다.
“흥미?”
“그래. 이 녀석, 다른 놈들이랑 조금 달랐거든.”
“다르다니? 어디가?”
“방사능에 피폭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격도 없는 녀석이 문 너머를 보고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그런 게 느껴졌었어.”
톱 햇을 벗은 그리드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문이라면 카오스 게이트를 말하는 거?”
“그래. 그것도 보통 문이 아니야. A급 아니, 어쩌면 S급이었을지도 몰라. MP 미달자가 그런 곳에 들어 들어갔다면, 몸이 그대로 붕괴되었어야 정상일 거라고.”
가볍게 도약한 그리드가 허공에 쪼그리고 앉았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짙은 잔향이야. 실제로 내 ‘체티’ 안에서도 붕괴하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분명 엄청난 걸 경험했을 거라고. 어쩌면 보스가 찾으려던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그리드의 시선이 엔비에게로 향했다.
“내 통제하에 있으니, 그런 것처럼 쓸데없는 사고를 일으킬 일도 없지.”
“그 말 보스한테 하는 말이지?”
“그럴 리가.”
그리드가 다시 모자를 눌러 썼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야?”
그리드의 발밑을 유심히 살피던 러스트가 물었다.
공중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그의 발밑으로 아주 미세한 머리카락 같은 게 보였다.
“그래. 미세하고 강도 높은 실을 부린다. 별 볼일은 없지만, 재미는 있는 능력이지.”
똑바로 선 그리드가 그네를 타듯 앞뒤로 발을 굴렀다.
“그 사람 어떻게 할 거야?”
“이왕 손에 넣은 거 최대한 재밌게 가지고 놀아야지.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게 좀 있거든.”
확 뛰어내린 그리드가 러스트 앞에 착지했다.
“걱정 마. 충분히 즐긴 다음엔 보스한테 넘길 테니까. 흐흐. 흐흐흐.”
* * *
‘슬슬 시간이려나?’
하트 모양 밴치에 몸을 기대고 있던 용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생각만 벌써 5번은 한 것 같은데, 시계도 달빛도 없이 시간을 맞추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예은이한테라도 문자 한 통 해줬어야 했었나?’
뒤늦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대놓고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조용히 넘어갈 순 없을 것이다.
경찰이 충돌하고, 조사가 들어간다면, 자신의 정체도 어렵지 않게 드러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퀘스트와 시련이란 걸 통과하기 전까지만 조용히 숨죽이고 있고 싶었는데….
현장에서 도망간 그 판단이 어쩌면 최악의 악수였을 지도 몰랐다.
동생만은.
어떤 식으로든 이쪽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해야 할까?’
분리된 배터리와 핸드폰.
그리고 핸드폰 케이스가 따로따로 주머니 안에 굴러다니는 게 느껴졌다.
용주는 손에 잡힌 케이스를 꺼냈다.
이쪽도 마음이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하아~.”
한참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용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밑에 자욱하게 안개가 깔려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이미 멈춰 있었다.
* * *
▷ 5개 동력원에 동력을 공급하여 ‘어둠그늘 숲’에서 탈출하십시오.
게이트 내부로 진입하자 퀘스트 알림이 한 번 더 나타났다.
▶ 새로운 룰이 적용되었습니다.
▷ 어둠그늘 숲을 방황하는 존재들은 불멸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히면 잠시 무력화할 수 있지만, 제거할 순 없습니다.
▷ 어둠그늘 숲의 네 명의 존재들은 각자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존재들은 때때로 동력원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공격을 받은 동력원의 동력은 크게 감소합니다.
▷ ‘의식의 갈고리’에 걸릴 경우 남은 HP와 무관하게 퀘스트는 실패하게 됩니다.
이윽고 나타난 세부 설명들.
주먹을 움켜쥔 용주는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최대한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마음속에서 그런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서두를 때가 아니었다.
퀘스트 게이트의 시간은 현실 시간과 무관.
여기서 아무리 서두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그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침착해. 급할수록 돌아가라잖아.’
마음을 다잡은 용주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앞을 보는 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
마치, 검회색 빛이 있단 느낌이랄까?
‘여기가 어둠그늘 숲.’
처음 게이트와 이어진 장소는 무릎까지 오는 잡초들이 무성한 평원이었다.
중간중간 바위와 나무들이 있었고, 저 멀리 다 기울어져 가는 폐건물이 한두 개 보였다.
‘동력원이란 건 어디 있는 거지?’
동력원의 위치와 생김새는 아직 미지수였다.
적어도 당장 이거다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존재’라고 지칭된 이들 역시도 아직까진 보이지 않았다.
‘저건….’
주변을 살피던 용주는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자세를 낮춘 용주가 도착한 곳은 인근에 있는 작은 언덕 아래.
작은 바위 하나가 지키고 있는 언덕엔 갈고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저게 그 갈고리란 건가?’
기역 자로 꺾인 나무 지지대에 고정되어 있는 핏빛 갈고리.
틀림없이 저게 룰에 적혀 있던 의식의 갈고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걸리면 남은 HP와 관계없이 게임 오버.
무조건 주의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해볼까?’
주변의 인기척을 살피던 용주가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단칼에 휘두른 용주의 일격.
대래랭!
지지대와 분리된 갈고리는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모래 위에 떨어졌는데, 무슨 소리가….’
생각보다 큰 소리에 용주는 재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인근 바위 뒤로 몸을 숨긴 용주.
위잉! 윙윙윙!
상황을 살피던 용주의 귀에 거칠고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전기톱 소리?’
자연스럽게 그런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점점 다가오는 소리.
코앞까지 다가온 소리에 용주는 바위틈 사이를 바라보았다.
갈고리가 있던 언덕 아래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언덕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2m가 넘는 건장한 남성.
전기톱을 들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박스를 쓰고 있는 것처럼 정사각형을 하고 있었다.
‘혹시 저게 그 존재라는 놈인가?’
언덕 위를 오른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서라고 할 만한 건….’
입장을 바꿔 생각하던 용주는 순간 아뿔싸 싶었다.
자세를 낮춘 사내가 땅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발자국.
흙으로 된 지면엔 자신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위잉!!
톱날을 치켜든 사내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용주의 불길한 예감이 유감스럽게도 적중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있었다.
쓰러뜨릴 순 없었지만 잠시 동안 무력화시킬 수는 있었다.
물론, 그렇게 선택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었다.
저런 녀석이 여기 넷.
소란이 일어나면 다른 녀석들까지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주변을 살피던 용주는 숨을 죽인 채 걸음을 옮겼다.
순간적으로 뒤바뀌는 풍경.
점멸을 활용해 나무 뒤로 몸을 숨긴 용주는 자신이 있던 바위를 관찰했다.
위이이잉!
전기톱을 작동시킨 사내가 기습적으로 바위를 덮치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의 공격은 당연 불발.
키익!
바위를 긁어낸 전기톱은 쇳소리를 내며 작동을 멈춰 버렸다.
‘방금 그건….’
사내의 움직임에서 용주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기톱이 작동되는 순간 사내는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었다.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움직였고, 속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저게 저 녀석의 고유 능력이란 건가?’
헛손질을 한 사내가 다시 한번 흔적을 조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의 눈코입이 있어야 할 앞쪽은 뒤쪽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을 쫓던 사내는 주변을 서성거리다 떠나갔다.
아무래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였지?’
나무 그늘에서 빠져나온 용주는 다시금 바위 쪽으로 다가갔다.
일단 대충 ‘네모’라고 명명하기로 한 사내의 움직임에서 이질감이 느껴졌었다.
발자국을 좇았다면 그가 마지막에 방황해야 했던 건 여기보다 조금 더 앞쪽이었다.
점멸을 사용하기 전까진 발자국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이 이상 단서를 좇지 못했다.
마치 여기서 발자국이 뚝 끊어진 것처럼 반응했었다.
‘……?’
발자국을 살피던 용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천히 걸어갔던 길에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용주는 남아 있는 발자국을 확인했다.
여기까진 분명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저 앞쪽엔 발자국이 남아있지 않았다.
‘왜 이런 차이가….’
두 행동의 차이.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면, 뛰고 걸었던 차이 정도가 있긴 했다.
‘음?’
생각에 잠긴 용주에게 또 다른 이상 현상이 감지되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발자국들.
조금 전까지 남아 있었던 자신의 발자국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이건 또….’
자세를 낮춘 용주는 흙바닥을 짚었다.
모처럼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싶었는데, 누락된 룰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확인해 볼까?’
A와 B라는 가상의 두 지점을 설정한 용주가 A 지점까지 달렸다.
이어서 B 지점까지는 걸어가는 용주.
B 지점에 도착한 용주는 두 지점을 살펴보았다.
A 지점까진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B 지점까진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용주는 A 지점까지 남은 발자국을 좀 더 관찰했다.
발자국은 찍힌 순서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
가설을 확인한 용주는 네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걸으면 왜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가.
왜 있던 발자국이 사라지는가.
그걸 설명할 방법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그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이 세계의 룰인 모양이었다.
‘일단은 저쪽으로 가볼까?’
용주가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네모가 사라진 방향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이었다.
‘음?’
그런 용주의 눈에 보인 또 다른 특이점.
‘다시 생겨났잖아?’
분명 부러뜨렸던 갈고리가 다시 생겨나 있었다.
아무래도 거기 적혀 있지 않은 룰을 하나 더 발견한 모양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용주는 목표했던 집 앞까지 도착했다.
건물에 문은 없었다.
문이 있던 흔적은 있지만 양쪽에 있는 출입구는 뻥 뚫려 있었다.
창문은 하나.
나무로 짠 관 같은 게 두 개나 세워져 있었다.
원룸만 한 크기임에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모습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고 말이다.
‘저게 뭐지?’
하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 용주의 눈에 걸린 건 중앙에 있는 푸른 장치.
다섯 개의 태엽이 일렬로 달린 장치는 커다란 오르골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이게….’
직감적으로 이게 ‘동력원’이라고 생각한 용주가 장치에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마루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 현재 가동률 : 0%
눈앞에 나타난 한 줄의 텍스트.
장치의 네 면을 모두 살핀 용주는 가장 왼쪽에 있던 태엽을 붙잡았다.
동력이란 걸 어디서 어떻게 공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는 전무.
지금은 일단 감이 시키는 대로 해보는 수밖에.
뚜둑! 두두둑!
태엽이 돌아갈 때마다 상당히 뻑뻑한 소리가 났다.
태엽을 돌릴 때 들어가는 힘은 용주가 생각했던 것 이상.
생긴 것만 태엽이지 맞지 않는 구멍에 강제로 쑤셔 넣은, 녹이 잔뜩 슨 고철을 돌리는 느낌이었다.
▷ 현재 가동률 : 1%
태엽이 감기자 가동률에 변화가 생겼다.
감이 시켰던 이게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 현재 가동률 : 20%
덜컥!
느리지만 꾸준하게 가동률을 높여가던 용주가 잡고 있던 태엽을 놓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진 묵직한 감각은 더 이상 감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나에 20%. 그래서 5개였던 건가?’
끝까지 감긴 첫 번째 태업은 천천히 돌아갔다.
♬
동력원에선 공백이 명확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주는 곧장 두 번째 태엽을 붙잡았다.
바로 그때.
“콜록! 콜록…!”
낯선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메아리친, 고통에 찬 소리.
놀란 용주는 잡고 있던 태엽을 놓았다.
뭔가가 근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