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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81화 (181/357)

181화

* * *

달빛 하나 없는 하늘.

수많은 불빛들이 내려다보이는 창밖으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정돈된 분위기의 방 안에선 한 사내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이잉.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자동문 소리.

안경을 올려 쓴 사내는 축음기의 바늘을 들었다.

클래식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네.”

익숙한 목소리에 사내는 눈을 맞췄다.

자기 방인 양 편안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은데, 안?”

차분한 밤색 머리의 사내가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상당한 친분이 느껴지는 두 사람이었다.

“차는 뭘로 할래?”

“아아~ 됐어. 오늘 별로 마실 기분 아니거든.”

“그래?”

테이블로 걸음을 옮긴 사내가 이안과 마주 보고 앉았다.

“네가 먼저 연락한 걸 보니 내일은 해가 안 뜨려나 보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사내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최신 기종의 핸드폰은 기스 하나 없이 깨끗했다.

“원하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는데. 원해?”

“미안하지만, 정중하게 사양할게. 피곤하거든 거긴.”

“하핫, 그래? 그거 유감이네. 우리 준이랑 같이 게이트를 돌아다녔을 땐 심심찮게 가곤 했었는데.”

“우리 준이라. 그 호칭까지도 여전하네.”

이안의 호칭에 사내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준.

그게 이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의 이름이었다.

“네가 헌터 은퇴하고 길드로 간다고 했을 때는 이게 무슨 철 지난 만우절 장난인가 싶었었는데 말이야.”

“사람 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당장 5분 뒤 일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잖아.”

“그쪽 일은 잘 맞고?”

“잘 맞고 안 맞고 따질 게 뭐 있어. 책임 있는 자리에 있으니,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 거지.”

“길드의 최고 책임자다운 답변이네. 너답기도 하고.”

헌터 길드를 유지하는 두 가지 축.

그중 하나는 현장에서 두 발로 뛰는 헌터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일명 ‘서포터’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영과 나영과 같은 카운터 업무 인력부터 동제 같은 특별 조사관에 이르기까지.

헌터 길드에 속해 있지만 헌터는 아닌 이들이 바로 여기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준은 그 둘 모두를 아우르는 길드의 최고 책임자.

실질적으로 길드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들어주니 고맙네.”

깍지를 낀 이준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댔지?”

“그래.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들어봐야 아는 거지. 내가 하고 있는 건 추측일 뿐이니까.”

이안이 조용히 눈을 끔뻑였다.

“팬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래. 그렇겠지.”

“B급 헌터들과 A급 헌터들이 습격당한 사실은 알고 있지?”

“비통한 일이지.”

“그 전에 팀 H의 헌터들이 습격당했단 사실은?”

“물론, 인지하고 있지. 그 전에 박전돌 헌터와 그 일행들이 습격당했던 것까지도.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걸 역이용할 줄이야.”

“너답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이안의 한 마디에 이준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결과로 증명하지 못한 이상 판단에 대한 비난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나답지 않았다고 느꼈다면, 그것 역시도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겠지.”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

“팬텀 쪽에서 우리 네트워크를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준이라면 그걸 역으로 이용했을 거야.”

“나도 생각 못 한 나라. 그래. 어디, 나란 사람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해야 했는지.”

이준이 호기심을 표했다.

“이상 네트워크 감지와 추적이 1단계. 정보의 오염이 2단계. 함정 설치와 유인, 그리고 소탕이 3단계.”

“흐음~ 1단계야 그렇다 쳐도, 2단계와 3단계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간단해. 정보를 있는 그대로 흘리는 게 아니라 가짜 정보를 심는 거지. 가령 내가 큰 부상을 입어서 어떤 게이트에 고립 중이라든가….”

“그런 이야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대놓고 수상하잖아.”

“예시가 그렇단 거지. 그게 아니면 헌터 배치와 인력 표기를 다르게 한다든가. 아무튼 너라면 조금 더 어떤 수를 썼을 거라고.”

“어떤 수라…. 그래. 그럼 어디 나도 핑계 아닌 핑계를 대보도록 할까?”

이준이 안경테를 올렸다.

“첫째 이상 네트워크의 추적이라면 이미 시도해 봤어. 역추적은 물론이고, 어떤 접근이 비정상적인 접근이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어. 접근 기록 자체가 없었거든.”

“…….”

“둘째. 정보의 오염이라면 이미 그렇게 해뒀었어. 팀 H 곁에 배치했던 A급 헌터들. 이형 소나. 너의 활동에 대한 부분. 네트워크엔 그런 이야기는 일절 없었거든.”

이준이 어깨를 들썩였다.

“말했다시피 결과로 증명하지 못한 이상 핑계일 뿐이야. 다른 게이트가 습격당할 것까지 고려하지 못한 건 내 불찰이기도 했고. 하지만 말이야, 안. 그럼 뭐가 정답이었을까? 모든 헌터들을 철수시키고, 모든 임무를 중단시켰으면, 과연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 사건을 막았다 한들 과연 우리가 지키려는 평화가 유지됐을까?”

“…….”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야. 단지, 내가 항상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뭔지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니까.”

이준이 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었다.

* * *

“울고 싶으면, 그냥 그러지 그랬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쉰 형만이 이야기했다.

그의 앞에 놓인 계단에는 수지가 앉아 있었다.

“괜찮아. 후회 안 해.”

“아까 들었던 소리들은 다 잊어버려라. 네 잘못이 아니니.”

“응….”

수지의 힘없는 목소리에 형만이 입술을 씰룩였다.

“이용주 그 애송이도 신경 쓰이겠지.”

“…응. 그러네.”

“별일 없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명줄 하나는 바퀴벌레만큼 질긴 놈이니.”

“그랬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돌린 수지가 형만을 바라보았다.

“혹시 다른 실종자에 대한 이야기는 안 들어왔어?”

“그래. 유감스럽게도.”

형만의 대답에 수지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사망. 부상.

습격엔 그 외에 하나의 상태가 더 있었다.

실종.

딱 한 명.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한태영.

수지가 가족이라 말하는 또 한 사람이었다.

“말해 줬어야 했을까?”

D급 헌터에 불과한 한태영이 왜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가.

설명하자면 길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의 진각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D급 헌터였던 태영이 가장 최근에 갱신받은 등급은 B.

태영에게 연락을 받아 알았던 사실이었다.

용주에겐 말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용주라면 분명 금방 올라올 거라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깜짝 놀란 용주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용주와 둘이 있을 때 말할 기회가 있었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당시엔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말해 줄 의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잖냐? 당시의 너라면 분명 아무런 생각도 못 했을 거다.”

“그것도 그러네.”

수지가 얼굴을 묻었다.

“한태영, 그 애송이도 괜찮을 거다. 이용주 애송이랑 마찬가지로 명줄 하나는 긴 녀석이니.”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형만의 이야기에 수지가 고개를 들었다.

“팬텀이 데려간 걸까? 아니면 카오스 게이트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걸까?”

“게이트는 내가 직접 닫았다. 거기 애송이는 없었어.”

“그럼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단 거네. 왜? 왜 데려갔을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헌터 중에. 해당 게이트에 함께 있던 녀석이 있었다. 녀석의 의식이 돌아오면 뭐라도 알 수 있을 거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형만이 생수 한 병을 수지 옆에 내려놓았다.

말없이 뚜껑을 딴 수지는 꿀꺽꿀꺽 물을 들이켰다.

딱히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형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버티려면, 뭐라도 입에 넣어라.

형만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태스크 포스’…. 움직이고 있다고 했지?”

억지로라도 생수를 들이켠 수지가 물었다.

태스크 포스.

일명 TF라고도 불리는 그건 국가에서 운영하는 또 다른 조직의 명칭이었다.

태스크 포스의 주요 활동은 범죄와 관련된 헌터의 수사와 제압.

길드 내부에 있는 특별 조사팀과는 역할이 분리되어 있는 조직이었다.

길드 외부에 이런 조직을 둔 건 헌터들의 ‘제 식구 껴안기’와 같은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

그들이 움직이고 있단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

“뭐 때문에?”

“전부 다겠지. 이용주. 윤현. 팬텀. 밖에서 보기엔 전부 똑같은 헌터들일 테니까.”

“범죄자….”

최근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더 이상 길드 내부에서 숨길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살인, 살인미수, 테러.

이름만 들어도 하나같이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건들이지 않은가.

“‘눈’은 공석이지 않아?”

수지가 물었다.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다만 또 모르지. 그사이에 새로운 눈이 나왔을지도. 지금의 태스크 포스는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니.”

형만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잡히면 어떻게 돼?”

“법대로 처벌할 거다. 명목상으로는.”

“명목상이란 건?”

“즉결 심판. 저항하는 범죄자들을 처리할 권한이 그들에겐 있다. 어떻게 나올진 알 수 없는 일이지.”

“…….”

이를 앙다문 수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찾아야 해. 우리가 먼저.”

“무슨 수로?”

“그건….”

수지라고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용주에게 준 이형 워프 장치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건 이쪽에서 그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저기 있다!!”

두 사람의 귀에 날 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은 형만도 알고 있는 얼굴들.

선봉에 선 이는 서윤이었다.

“너희는?”

“하아, 하아…. 이용주…. 찾고 있어. 도와줘.”

거친 숨을 내쉰 서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형만이 있는 줄은 몰랐었지만, A급 헌터가 둘이란 건.

그것도 용주와 접점이 있는 헌터가 둘이란 건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 * *

“데려왔어.”

차원을 찢고 나온 러스트가 윤현을 내려놓았다.

그림자에 포박당한 윤현의 입은 완전히 틀어 막혀 있었다.

“음~ 역시 러스트야. 믿음직스럽다니까.”

종종걸음으로 반긴 엔비가 러스트를 꼭 끌어안았다.

“사고. 도심 한복판에서 난리 피우고 있었어. 보스 명령 없이.”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여기저기서 시끄럽더라고.”

포옹을 끝낸 엔비가 윤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반사적으로 뒤로 밀린 윤현의 허벅지를 밟은 엔비는 웃는 얼굴로 그를 무릎 꿇렸다.

“잘난 복수귀 씨? 할 말은?”

윤현의 턱을 들어 올린 엔비가 물었다.

“팬텀, 엔비, 다 필요 없어. 복수만을 원해.”

그에 돌아온 러스트의 목소리.

황당하단 듯 콧방귀를 뀐 엔비는 그의 입을 막고 있던 그림자를 뜯어냈다.

“어머 그랬어? 이거 정말 상처인데.”

“…….”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윤현.”

“복수…….”

“음?”

“제게 남은 건 이제 복수뿐입니다. 이 끓어오르는 화염이. 이 끓어오르는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습니다. 복수를 이루라고.”

윤현의 몸 여기저기서 화염이 흘러넘쳤다.

“기회를 살리지 못한 건 너야, 윤현. 누가 보면 계속 널 감금시켜 놓은 줄 알겠어.”

엔비가 구두 굽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방해만 받지 않았더라면…!”

“음~ 그래?”

엔비가 러스트를 바라보았다.

“폭주하고 있었어. 상대는 침착. 이겼을 확률 20% 미만.”

“뭐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윤현이 즉각 반박했다.

“윽…!”

그런 그에게 돌아온 끔찍한 고통.

“쉿! 너한테 안 물어봤어.”

윤현의 가슴을 강타한 엔비가 조용히 하란 수신호를 보냈다.

“흐흐흐흐.”

세 사람의 대화가 한창이던 그때.

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세 사람의 귀에 들렸다.

고개를 든 러스트는 소리가 난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롱코트에 회색의 장발 머리.

머리엔 톱 햇을 얹고 등엔 커다란 관을 짊어진 사내가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드?”

익숙한 얼굴을 확인한 러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드가 저런 식으로 있는 거 처음 봤다.

기역 자로 꺾었던 다리를 푼 그리드는 자연스럽게 착지했다.

한 손으로 붙잡은 톱 햇은 그의 눈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

엔비가 윤현을 짓밟던 발을 뗐다.

그리드의 눈가에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은 어딘가 음산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물론. 호기심과 탐구력을 자극하는 새 장난감을 손에 넣었으니까.”

“장난감?”

러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너한텐 안 보여줬던가? 흐흐흐.”

그리드가 메고 있던 관을 내려놓았다.

끼이익 하고 열리는 관뚜껑.

관 속에는….

사람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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