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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80화 (180/357)

180화

뚜벅….

생각을 정리하던 용주의 귀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발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길 끝에 도착한 여인의 모습은 흐릿해지며 사라졌고, 그다음 블록이 시작되는 위치에 다시금 나타났다.

“설마 여기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용주가 있는 구역에 나타난 여인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이겠지?”

들어본 적 있는 여인의 목소리.

조금은 창백해 보이는 얼굴색을 가진 여인은 브라운 톤의 타이넥 블라우스에 검정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다.

“러스트….”

그녀를 마주한 용주는 단번에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억양과 목소리가 그녀가 누구인지 말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번에 알아보네. 우리 초면 아닌가?”

“충분히 구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얼굴이 너인 건 아니니까.”

“그것도 그렇네.”

러스트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용주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많아 봐야 30대 중후반 정도.

더 젊을 수도, 더 많을 수도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액면가론 그 이상을 책정하긴 어려웠다.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인상은 부드러운 편이었다.

악당.

혹은 살인자의 인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왼쪽 눈 밑엔 흔히 매력점이라고도 부르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동그랗다기보다는 약간 물방울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무슨 일로?”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여긴 어디지?”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온 거야? 어떻게?”

“…….”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어딘지도 모르는 차원에 러스트가 있다는 건 여긴 그녀와 관계있는 차원이라는 뜻.

이곳으로 온 원인은 역시 그것이었다.

“네가 의도적으로 장치에 뭔가를 해둔 거냐? 날 여기로 데려오기 위해?”

지금 상황에선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 외에 전후 사정에서 추론할 만한 정답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기로? 내가 왜?”

“…….”

오히려 뻔뻔한 러스트의 대답.

뒷짐을 진 러스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지?”

“…….”

“네가 보기에 여긴 어딘 거 같아?”

스으윽 하고 사라진 러스트의 모습이 용주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걸음을 옮긴 러스트는 방문을 열었다.

용주가 봤던 짧은 풍경은 다시금 되풀이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이 흩어져 있는 장소.”

“역시 그렇지?”

끝나 버린 풍경을 뒤로한 러스트가 방문을 닫았다.

“그럼 이 기억이 누구 거일 것 같아?”

“그거야 이 차원의 주인 것이겠지.”

“주인…. 정말 그런 걸까?”

“…….”

“기억들은 온전하지 못해. 시간도, 이름도, 얼굴도, 상황도. 엉망진창 뒤죽박죽…. 몇 번이나 봐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러스트의 무표정한 시선이 용주를 향했다.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야. 그냥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어. 여기 온 거. 네가 처음이거든.”

오른쪽으로 살짝 몸을 튼 러스트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녀가 그린 선을 따라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했고, 비틀림은 이윽고 균열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 열어 줄게. 부탁했던 거 잊어버리지 말고.”

균열이 열리자 엄청난 힘이 용주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기라도 한 듯 느껴지는 엄청난 중력.

“그럼 안녕.”

태연하게 손을 흔들어주는 그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용주는 차원 너머로 튕겨 나갔다.

* * *

포탈 밖으로 튕겨 나온 용주는 그대로 땅을 뒹굴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꽤 처참하게 굴렀는데, 다행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도시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아무래도 꽤나 높이가 있는 곳으로 내던져진 모양이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안내도 앞에 섰다.

와룡산 상리봉 전망대.

안내도에는 현재 위치를 포함해 대략적인 등산로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여긴 용주가 처음 목적지로 삼았던 곳이었다.

‘러스트….’

용주의 머릿속에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팬텀이지만, 그녀는 윤현이나 프라이드와는 전혀 달랐다.

적대감을 표하기는커녕, 차분하고 잔잔했다.

물론, 그 모습까지도 가짜일 가능성이야 있었다.

가장 위험한 맹수는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녀석이 아니라, 이빨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니까.

‘같은 팬텀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란 건가?’

그녀가 건넨 편지를 꺼낸 용주는 한 번 더 봉투를 살펴보았다.

형만에게 전해달라는 편지 봉투.

아까 봤던 짤막한 장면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녀석이랑 이야기를 해보긴 해야겠어.’

꼭 이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스트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어 내진 못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다시 한번 전해드립니다. 몇 시간 전….”

적막한 실내를 채우는 뉴스 소리.

차와 커피를 내온 나영이 조용히 화면을 지켜보았다.

“전문가로서 가장 유력한 추측을 해보자면, 통제를 벗어난 헌터들이 벌인 범죄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통제를 벗어났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시청자들에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벗어날 방향이야 많죠. 가령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감정 분쟁에 힘을 동원하는 걸 들 수 있을 겁니다. 칼을 쥔 사람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쥔 사람은 총을 쏘는 법입니다. 헌터는 그보다 훨씬 위험하죠.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전문가님 대책은 있을까요?”

“두 사람 다 강력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헌터 자격 박탈. 그리고 피해 배상과 징역까지 살게 해야 합니다! 또한 길드 차원에서 책임을 물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정적 속으로 사라졌다.

“전문가는 개뿔!”

리모콘을 내려놓은 서윤이 강하게 테이블을 내려쳤다.

출렁인 음료 중 일부는 바깥으로 흘러 버렸다.

자리엔 팀 H의 네 사람.

그리고 승우에 더해 가영과 나영이 있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무 말이나 막 하고…! 뚫린 입이면 다인 줄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현장에 용주 씨는 없었다고 그랬죠?”

가영이 물었다.

“그래. 그 녀석 경찰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자리를 뜬 다음이라고 그랬어.”

“거기 있던 게 용주 씨였던 건 확실한 거겠죠?”

“아까 시민 인터뷰 봤잖아. 여기저기 피가 묻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고.”

“이용주 헌터님께서 임무를 수행하신 게이트도 그 근방이니 가능성은 클 겁니다.”

서윤의 말에 나영이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그럼 다른 한쪽은 누구였을까요?”

“윤현이야. 분명 그 자식이라고.”

가영의 물음에 서윤이 즉답했다.

현장에서 목격되었다는 검은 불꽃.

틀림없이 그건 그 녀석이 한 거였다.

“상상하긴 싫네만,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구려.”

무겁게 깍지를 끼고 있던 금화가 입을 열었다.

현장에서 사라진 건 용주만이 아니었다.

윤현 역시 행방이 묘연.

그럴 거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최악의 경우 용주가 납치되었거나.

아니면….

“금화 형!!”

서윤 대신 이번엔 주원이 반발했다.

“현장에 대량의 혈흔이 남아 있었다. 그걸 불안하게 생각하시는 거겠죠?”

예나의 곁을 지키던 승우가 물었다.

금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주 오빠 많이 다친 건 아니겠지?”

예나가 버티를 꼭 끌어안았다.

현장을 봤을 때 곱게는 끝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뭐야? 다들 왜 그런 표정 짓는 건데?”

입술을 깨문 서윤이 불만을 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용주 그 녀석이라고. 별일 없을 거야. 피 조금 흘렸다고 쓰러졌으면, 이미 옛날에 염라대왕 만났을 거라고!”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미안하네. 괜히 이상한 말 꺼내서.”

한숨을 삼킨 금화가 사과를 표했다.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원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삼켰다.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다 막막했다.

“어떡하긴 일단 그 자식부터 찾아야지.”

“찾은 다음은요? A급 헌터들도 당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뭐?! 이대로 겁쟁이처럼 숨어나 있자고?!”

서윤이 주원을 노려보았다.

“됐어! 겁쟁이 쉼터에 숨을 거면 너희들끼리 숨어. 나 혼자서라도 찾을 테니까.”

“언니!”

자리를 박차려는 서윤을 예나가 급하게 붙잡았다.

“그 녀석 분명 혼자 끌어안으려고 할 거야. 필요할 땐 찾더니, 위험해지니까 버리자고? 난 그렇게 못 해. 아니! 안 해!”

서윤이 거칠게 예나의 손을 뿌리쳤다.

“그렇겐 말 안 했어요!”

언성을 높인 주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윤만큼이나 격양된 주원의 목소리였다.

“그런 의도도 아니었고요. 전 단지… 걱정이 됐을 뿐이라고요. 제가 도움이라고 한 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

고통스러운 주원의 표정에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도움이건 방해건 그런 거 내 알 바 아니야. 그 녀석도 멋대로 굴고 있으니, 나도 내 멋대로 굴 거라고.”

주원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저 녀석치곤 굉장히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그런 걸 떠나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 녀석이 그래 줬던 것처럼.

자신도 무심한 듯이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럼 어디서부터 찾을 생각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금화가 물었다.

따로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함께 하겠다는 의사가 명확한 금화였다.

“그건….”

대답을 망설인 서윤의 눈에 가영과 나영이 보였다.

“아, 그래! 그 녀석, 이번처럼 수주받은 임무가 있을지 몰라. 그걸 추적해 보면…!”

“현재 팀 H 혹은 이용주 헌터님 개인의 이름으로 수주된 다른 임무는 없습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나영이 기계처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 그래? 그럼… 핸드폰 위치 추적이라든가?”

“그걸로는 전원이 꺼진 마지막 위치 정도만 특정할 수 있을 걸세. 다시 핸드폰을 켠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쉽진 않을 걸세. 우리에겐 그럴 권한이 없기도 하고.”

“음….”

금화의 대답에 서윤이 턱을 괴었다.

서윤이라고 뾰족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형 워프 장치. 혹시 그런 게 더 있진 않을까?”

조용히 생각에 잠겼던 예나가 승우를 바라보았다.

“이형 워프 장치?”

“응. 그것도 그렇고 이형 소나도 그렇고, 길드엔 우리가 모르는 장치들이 있단 걸 알았잖아. 혹시 그런 특이한 게 더 있을까 하고. 사람을 찾는 장치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서윤이 긍정을 표했다.

확실히 그럴듯한 추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길드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만, B급 헌터인 저로선 가지고 있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셨던 두 가지 장치 모두. 제겐 낯선 물건입니다.”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 승우가 유감을 표했다.

B급 헌터는 B급 헌터.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A급 헌터와 같을 수는 없었다.

“집사도 모르면, 누구한테….”

“A급 헌터라면 알고 있잖아.”

서윤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 얼굴을 보고도 전화를 하는 게 편치만은 않았지만, 역시 그 녀석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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