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상처를 짚은 용주는 그녀가 남긴 편지에 다가갔다.
스스로를 러스트라고 밝힌 그자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녀석들의 목적이 뭔지.
녀석들이 윤현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아까 그 회색 세상과 사람들은 뭐였는지.
형만에게 이건 왜 전해 달라고 하고, 이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형만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형만을 찾는 그녀에게서는 윤현과 같은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밀의 방이라고 했지, 분명….’
녀석들은 그곳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다.
명칭까지 그대로 사용하는 걸로 봐서 길드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알아낸 거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세를 낮춘 용주는 그녀가 남긴 두 가지 물건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 편지 봉투 위에 올려져 있는 물건은 놀랍게도 이형 워프 장치였다.
‘선물이라고?’
무슨 의도인진 알 것 같았다.
이걸 써서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달라는 이야기겠지.
팬텀이 이형 워프 장치를 사용할지도 모른단 추측은 어쨌든 정확한 추론이었던 모양이었다.
‘전해 주는 게 맞는 건가?’
과연 그게 맞는 생각인가 의문이 들었다.
팬텀은 어디까지나 적.
끝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열어 볼까?’
편지 봉투의 입구를 잡았던 용주가 힘을 풀었다.
이것 역시도 좋은 생각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 특별한 장치 같은 게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민간인까지 그렇게 쉽게 인질로 잡는 녀석을 자극해서 좋을 건 없겠지.
‘그건 그거고….’
용주의 머릿속에 러스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의 말투나 분위기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안수지.
그 녀석이랑 묘하게 닮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에에엥!!
생각에 잠긴 용주의 귀에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경찰이든 소방관이든 도착할 시간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잡히면 분명 그냥은 못 벗어나겠지.’
딱히 잘못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하지만 사건의 목격자이자 관계자인 이상 필연적으로 시간을 빼앗길 게 분명했다.
한시가 아까운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건 사양이었다.
퀘스트.
아니, 시련이란 걸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서 그 뒤에 있는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프라이드와 러스트.
팬텀을 상대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할 수 있을까?’
이형 워프 장치를 사용해 본 적이야 있었다.
하지만 발동의 주체가 되었던 건 언제나 수지였었다.
발동을 위해선 일정량 마나의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 조건을 채울 수 있을지.
이제 관건은 거기에 있었다.
‘어디 해보자고.’
편지를 인벤토리로 옮긴 용주가 이형 워프 장치만을 손에 쥐었다.
당장 이걸로 형만에게 갈 생각은 없었다.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퀘스트 게이트.
이걸 활용하면 열차나 버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마나를 집중한다….’
장치를 움켜쥔 용주가 정신을 집중했다.
수지가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움켜쥐는 것만으로 마나를 부여했었지만, 자신은 그 정도로 능숙하게 다룰 수가 없었다.
‘녀석이 했던 것처럼….’
수지가 했던 걸 떠올린 용주는 워프 장치를 움켜쥐었다.
“!”
순간 MP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제법 많은 양의 MP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손을 편 용주는 장치를 확인했다.
이형 워프 장치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결은 다르지만 내 MP로도 열 수 있나 보네.’
티르의 손으로 측정되는 헌터로서의 MP.
그 수치는 아직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의문이 있기도 했었다.
수지가 그렇게 배려해 줬던 것도, 자신의 MP로는 장치의 요구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거란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였을 테니까.
하지만 보다시피 결과는 성공적.
헌터로서의 MP가 아닌, 계승자로서 얻은 이 이질적인 MP 또한 힘으로서 제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움직이자.’
코앞까지 다가온 사이렌 소리에 용주는 워프 장치를 사용했다.
일렁거리며 벌어진 차원의 틈.
엉망이 된 거리를 등진 용주는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
포탈 안으로 뛰어든 용주는 무언가 다름을 직감했다.
추락하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심지어 거꾸로 뒤집힌 채.
‘이건 또….’
순간 자기장의 땅에서 떨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워프 장치를 타며 이랬던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떨어지면서 보이는 풍경들에서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난잡하게 배치된 계단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정방향으로 놓인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기에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계단 사이사이로 불규칙적으로 배치된 문들이 보였다.
방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도 있었지만, 허공에 문만 배치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뒤집힌 몸을 바로 세운 용주는 허공을 디뎠다.
가장 가까운 계단을 향해 사용한 점멸.
계단과 계단 사이를 잇는 일자 길에 착지한 용주는 주변을 살폈다.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도 모를 미궁은 마치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때만큼이나 당황스러운데….’
용주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목적지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거긴 목적지 근처이기라도 했었다.
아는 얼굴도 있었고.
그런데 여긴….
아무리 봐도 자신이 있던 차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퀘스트는 아니고… 시련도 조건 미달이니 아닐 거야.’
고개를 갸우뚱한 용주가 생각을 정리했다.
아닌 곁가지들을 쳐내도 답이 보이진 않았다.
분명 수지가 했던 대로 했고, 결과물도 동일한 것 같았는데 말이다.
‘탈출구는 있는 건가?’
근처에 있던 문으로 다가간 용주는 손잡이를 돌렸다.
문 반대편은 뻥 뚫려 있었다.
‘방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곳은 조금 다르려나?’
계단을 오르던 용주가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뒤집힌 계단이 보였다.
거꾸로 뒤집힌 통로엔 거꾸로 뒤집힌 방이 있었다.
‘저기 설 수는 있는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력에 의해 물체는 모두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저 위에서부터 떨어지기도 했으니, 물음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그래도 한번 시험해 볼까?’
황금보검을 꺼낸 용주는 작은 구슬 하나를 만들었다.
용주의 손을 떠난 구슬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뒤집힌 계단 아래를 지나는 황금 구슬.
움직임이 멎은 황금공은 계단에 올라가 있었다.
‘안 떨어지잖아?’
거꾸로 매달린 공은 상식을 부정하고 있었다.
용주라고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크게 의문을 품지도, 따지지도 않은 용주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남들이 보기에 ‘저걸 저렇게 그냥 받아들인다고?!’라고 말할 정도의 납득력이었다.
황금보검을 집어넣은 용주는 반대편으로 도약했다.
허공을 가르던 중력이 순간 역전되는 게 느껴졌고, 머리가 땅에 닿는 게 느껴졌다.
‘높이가 좀 더 있었다면, 곱겐 안 끝났겠는데, 이거.’
상체를 일으킨 용주가 고개를 까딱였다.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힌 충격이 적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위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보고 느끼기엔 저쪽이 거꾸로 뒤집혀 있는 것 같았다.
문으로 다가간 용주는 마찬가지로 손잡이를 돌렸다.
소리 없이 열리는 방문.
‘뭐지?’
안쪽을 확인한 용주는 또 한 번 낯선 괴리감을 느꼈다.
꽃무늬 벽지가 보였다.
깔끔한 분위기의 실내는 마치 70년대 풍경을 빼다 박은 것 같았다.
당시로 치면 제법 잘 사는 부잣집의 풍경 말이다.
“[email protected]#$ 잘 있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방 안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조 없이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용주가 눈을 찡그렸다.
용주가 이런 반응을 보인 포인트는 크게 3가지였다.
하나는 저자가 말 그대로 귀신처럼 나타났다는 것.
둘째는 누군가를 지칭하는 단어를 담을 때 엄청난 노이즈가 일었다는 것.
셋째는 저 앞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이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
모자이크라고 하기엔 상당히 거친 방식으로 처리된 얼굴은 색도 모양도 배치도 엉망으로 찢어져 있었다.
‘여자애인 건 알겠는데….’
체격 등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많아 봤자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나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온 여자아이는 인형을 꼭 껴안았는데, 인형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괴기스럽게 찢겨 있었다.
“[email protected]#$ 들어왔으면 손부터 씻어야지?”
“네! [email protected]#$ 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올게. 알았지?”
노이즈가 섞이는 건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흐름이나 상황상 어머니로 추측되는 목소리 역시도 대상을 지칭하는 부분이 노이즈에 삼켜져 버렸다.
용주에게 뛰어오던 소녀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방 안에 있던 다른 풍경들 역시 전부 지워져 갔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기억… 인가?’
텅 빈 공간을 살핀 용주가 방문을 닫았다.
지금은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구의?’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무언가를 유추할 만한 건 아까 봤던 방의 모습.
그건 현재랑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다른 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방문을 닫은 용주는 근처에 있는 다른 방들을 살펴보았다.
“[email protected]#$라고?! 절대 허락 못 한다!!”
“그렇지만….”
“정말 [email protected]#$가 되고 싶거든! 이 [email protected]#$ 시체를 밟고 가라! 관에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허락 못 한다! 절대!!”
두 번째 방에선 훨씬 미래의 일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어느새 여인이 되어 있었다.
여기선 이름이 아닌 부분에도 노이즈가 섞여 있었다.
여인이 되려고 하는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결국 들을 수 없었다.
“[email protected]#$ 그거 맛있어 보인다! 내 거랑 하나 바꿔 먹을래?”
“응. 그래.”
“어! 나도 나도! 나도 그거 먹어보고 싶어!”
“그럼 바꿔 먹자. 나도 먹어 보고 싶은 거 있으니까.”
세 번째 방에선 학교의 모습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여학생 중 누가 방금 본 여인이었는지는 불확실했다.
다른 친구들이 도시락을 탐내는 인물이 그녀일 거란 추측이 있었지만, 이름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이름표는 형태를 추측할 수 없을 만큼 번져 있었다.
“다친 곳은 좀 어때?”
“흥! 애송이처럼 굴지 마라. 겨우 이 정도로.”
마지막으로 열어 본 네 번째 방.
무너지기 직전의 아주 허름한 외형을 가진 방이었다.
얼굴이 지워진 두 사람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배경이 지워져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도 이게 전부였다.
짤막한 딱 한 도막의 대화를 나눈 환영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시간도 공간도 뒤죽박죽….’
네 번째 방까지 확인한 용주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문도 방도 더 있었지만, 일단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여인.
기억은 분명 그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봤던 환영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보는 훼손되어 있었다.
아마 다른 방들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송이….’
기억을 더듬던 용주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맴돌았다.
사람에게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엔 딱 한 명.
그런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해석이겠지.’
목소리 자체에 훼손이 있었다.
그게 원본 그대로의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누군가를 특정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건 말투나 억양 정도.
형만이 구사하는 것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심증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퍼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