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미안. 나중에 설명할게.”
시선을 피한 수지가 이형 워프 장치를 사용했다.
용주는 그녀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빛바랜 그녀의 눈동자.
그걸 마주하고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사라졌잖아? 혹시 방금 그게 이형 워프 장치인가 뭔가 하는 그거야?”
서윤이 물었다.
초소형 카오스 게이트를 연상시키던 균열은 수지를 삼키며 사라져 버렸다.
“그래.”
“A급 헌터들은 좋겠네. 택시고 비행기고 다 구닥다리겠어.”
신문물을 직접 목격한 서윤이 짝다리를 짚었다.
저런 걸 자기들끼리만 사용하고 있었다니,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
“근데, 왜 저렇게 갑자기 가버린 거예요? 슈퍼 히어로처럼.”
주원이 물었다.
“그야 뭐, 어디서 팬텀이 보고 있을 수도 있단 생각에서 아니었겠냐? 저 녀석, 들어갈 때도 도둑고양이처럼 몰래몰래 들어갔었잖아. 나올 땐 그렇게 하긴 힘드니까 그랬겠지.”
서윤이 시크하게 옆머리를 휘날렸다.
“음…. 그렇지만 그게 더 눈에 띌 거 같은데.”
게이트의 붕괴가 시작됐었기에, 그 안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는 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러면 없던 관심조차 생길 것 같은데 말이다.
“뭐 들은 거 없는지?”
투구를 옆구리에 낀 금화가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가. 그럼 일단은 길드로 돌아가는 거로 하세. 여기 더 있어 봐야 나아질 것도 없어 보이니. 뭔가 있다면, 거기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금화의 제안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나쁜 예감이 들었다.
아주.
아주 나쁜 예감이.
* * *
“딱히 말씀드릴 만한 정보는 없습니다.”
임무를 수주했던 길드.
용주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단호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말해줄 정보가 없는 게 아니라, 찾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카운터를 곁눈질한 서윤이 불만을 표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남직원의 태도는 형식적인 선만 지켰을 뿐 일말의 적극성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나, 다 들릴 것 같은데요.”
“들으라고 해! 뭐 없는 소리 한 것도 아니잖아?”
팔짱을 낀 서윤이 당당히 이야기했다.
“이렇게 된 거 그쪽으로 가보는 건 어때?”
서윤의 시선이 용주를 향했다.
“그쪽?”
“왜, 그때 너한테 임무 알려줬던 지부있잖아? 내가 엄청 성실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나 보다라고 했던 곳.”
“그래. 그럼 일단은 그래 볼까?”
가영과 나영.
용주의 머릿속에 두 쌍둥이 자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 두 사람이라면, 여기보단 자기 일처럼 움직여 주겠지.
* * *
“어서 오십시오.”
카운터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나영이 고개를 숙였다.
열정적으로 핸드폰 게임을 즐기던 가영은 급하게 차림새를 정리했다.
“와아~ 이게 누구예요? 뭔가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그쵸?”
용주를 발견한 가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용주 씨가 이렇게 다른 헌터들이랑 우르르 오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요.”
‘용주 씨?’
친근함이 느껴지는 가영의 웃음에 서윤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카운터가 여자라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설마 이렇게 친근감을 표할 줄은 몰랐다.
훨씬 사무적인 관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음? 음?”
카운터를 올려다보던 예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음…. 응?”
그리고 그건 주원도 마찬가지였다.
“쌍둥이 자매가 보는 카운터라. 이건 또 특별하구려.”
금화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예나와 주원의 얼굴엔 같은 게 적혀 있었다.
표정만 보면 이쪽이 더 쌍둥이 같기도 했다.
“우와~ 그러는 헌터 아저씨야말로 엄청 특별한 것 같은데요? 그거 진짜 갑옷이에요? 사극에 나오는 막 그런 거? 만져 봐도 돼요?”
카운터에 바짝 붙은 가영이 호기심을 표했다.
“하하. 물론이네.”
금화의 허가에 가영은 카운터를 뛰쳐나왔다.
‘완전 여우. 그것도 구미호네. 저 정도면.’
서윤이 노골적으로 가영을 째려보았다.
금화의 투구를 직접 써보고 있는 가영에게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로 꼬리를 잘 치는 걸 보면 이미 선수.
질 나쁜 여우가 용주에게 꼬리 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서윤의 시선이 나영에게로 향했다.
똑같은 얼굴.
다른 인상을 주는 나영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사무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임무 수주? 정산? 아니면 찾으시거나 맡기실 물건이 있으십니까?”
꼿꼿한 자세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나영이 물었다.
“수주도 정산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요 며칠 사이에 혹시 길드에서 내려온 특별한 지침 같은 게 있나?”
“지침이라.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럼 혹시 의료 헌터의 긴급 소집에 관한 거라든가 하는 건?”
“저희 쪽까지 직접 내려온 지시는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면 자료가 남아 있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래. 부탁하지.”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나영이 엔터키를 타닥 하고 눌렀다.
“화면을 봐주시겠습니까?”
화면을 띄운 나영이 시간순으로 창들을 재정렬했다.
“본부에서 오갔던 기록들입니다. 3일 사이에 여섯 건. A급과 B급 의료 헌터들의 긴급 콜업이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3일에 여섯 건이라고?”
용주가 각 기록들을 차분히 분석했다.
여섯 건의 기록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여섯 개의 기록은 각각 다른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자세히 알 수는 없는 거냐?”
“현시점에서 제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죄송합니다.”
“…….”
나영의 사과에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수지의 그 표정.
분명 이것들과 연관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B급과 A급 의료 헌터들의 긴급지원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닐 텐데.’
좀 더 자세히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핸드폰을 만졌다.
최근 통화 목록에 적힌 수지의 이름이 보였다.
전화번호부로 들어간 용주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에 적힌 이름은 박형만.
통화음은 갔지만, 연락이 되진 않았다.
‘칫…!’
녀석이라면 뭔가 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지 않은가.
‘그 녀석 외에 사건에 대해 알만한 사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명함 하나를 꺼냈다.
특별 조사관인 동제의 명함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면, 녀석의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 걸어보기로 한 용주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받았습니다. 헌터 본부 소속 특별 조사관 차동제입니다.”
전화는 통화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이어졌다.
“이용주다. 팬텀 사건. 그리고 비밀의 방 사건에서 만났던.”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용주 헌터님.”
“요 며칠 사이에 의료 헌터들의 긴급 콜업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거기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나?”
용주의 물음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용주 헌터님께서도 사건과 관계없다 할 수 없으니,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한참을 망설이던 동제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불길함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제가 적어드리는 주소로 가보십시오. 직접 보시는 게 말로 설명 드리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겁니다.”
* *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국립서울현충원의 주소이자, 동제가 용주에게 알려준 주소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당장 비가 쏟아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현충원?”
“많이 들어는 봤는데,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네.”
앞장선 용주는 현충문으로 다가갔다.
현충문 안쪽으로 현충탑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의장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정렬해 있었다.
“뭐야, 이게….”
예나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현충문 안쪽 잔디밭에 검은 천이 덮인 관들이 놓여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핏 봐도 관은 10개 남짓.
관들을 덮은 천엔 헌터를 상징하는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합동 영결식 같구려. 이건….”
금화가 들고 있던 투구를 눌러 썼다.
관마다 유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관을 붙잡고 무너져 버린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
마른 침을 삼킨 용주는 현충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열에서 벗어난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사내의 오른손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애송이들.”
귀에 익은 목소리.
용주는 사내와 눈을 맞췄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형만이었다.
“팬텀이… 움직인 거냐?”
용주가 물었다.
이게 머릿속에 떠오른 첫 생각이었다.
“A급 헌터 셋. B급 헌터 10명이 사망했다. 목숨은 간신히 부지했지만, 헌터로서 사망한 사람 역시 적지 않아.”
“그 말은….”
“힘을 잃은 헌터는 더 이상 헌터라고 할 수 없지.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녀석들은 헌터들에게서 힘을 빼앗아 갔다.”
“…….”
용주의 머릿속에 윤현과 프라이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완전히 허를 찔렸단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이 다시 공격해 온다면, 화살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고, 길드 역시 그런 판단을 내렸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단 3일 만에 이렇게 많이 희생된 거냐?”
“기존 팬텀의 움직임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게이트가 습격당했지.”
“A급 헌터도 사망자 중에 있다고 했는데. A급인 너희조차 팬텀을 당해낼 수 없던 거냐?”
용주의 물음에 형만이 오른 어깨를 짚었다.
“A급 헌터라고 모든 힘 위에 군림하진 않는다, 애송이.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
“생존자 중 누군가 그러더군. 적들은 우리 쪽의 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놈들의 기습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유가족들 중엔 어린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고, 백발의 어르신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용주는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의 죽음.
그건 자신에게 트라우마와도 같은 일이었다.
아마 그 녀석에게도 그렇겠지.
“안수지…. 그 녀석은 어디 있지?”
용주가 물었다.
녀석이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킨 형만은 한 곳을 곁눈질했다.
관에 손을 올린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에게 달려든 유족 중 하나가 그녀의 멱살을 쥐는 게 보였다.
울분을 토하던 유족은 주변 다른 유족들의 제지로 간신히 떨어졌다.
“내 아들 살려내! 우리 가족 살려내라고!”
“…….”
“네가 죽였어! 네가 거기 없어서 죽은 거라고! 살인자! 직무 유기자!”
풀썩 쓰러진 유족이 바닥을 치는 게 보였다.
우중충하던 하늘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안수지….’
이를 악문 용주는 형만을 지나쳤다.
양복 차림의 다른 헌터들 사이를 지나간 용주는 수지 앞에 섰다.
죽은 눈동자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 자국이 그녀의 얼굴에 묻어 있었다.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용주는 걸음을 옮겼다.
힘으로 용주에게 저항한 수지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됐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용주가 강압적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용주 형?”
인파를 헤치고 나온 용주에게 달려온 주원이 순간 멈칫했다.
왠지 말을 걸면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따라오지 마. 둘이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현충탑을 등진 용주가 현충문을 빠져나갔다.
울려 퍼지기 시작한 진혼곡은 빗소리를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