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뭐라고?!”
놀란 서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과 몇 센티미터 앞에 하얀 선이 보였다.
‘진짜냐?’
어느 정도 멀리까지 날아왔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모의전인데 난 지금 칼도 한 번 제대로 못 부딪혀 봤다고!”
서윤이 강하게 항의했다.
이렇게 단시간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던진 도전장이 아니었단 말이다.
“무효라고 하고 싶은 거?”
수지가 물었다.
“아니! 무효라고는 안 할 거야. 지금 그걸로 1 : 0. 2점을 먼저 먹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자고.”
경기장 안으로 돌아온 서윤이 수지에게 바짝 다가갔다.
무표정하게 있던 수지는 칼자루 밑단을 만지작거렸다.
몇 번의 변형을 거친 검신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난 약속대로 했어, 룰대로 했고. 제안받았던 스파링은 끝났어.”
“뭐라고?!”
퇴장하려는 수지의 손을 서윤이 붙잡았다.
“너 지금 도망가겠다는 거야?”
“도망?”
그런 서윤에게 돌아온 수지의 눈빛.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에 서윤이 순간 주춤거렸다.
“기회가 두 번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 지금처럼.”
“뭐?!”
“거기가 만약 낭떠러지였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
서윤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수지는 그대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젠장!’
손을 바르르 떨던 서윤은 가지고 있던 칼자루를 내동댕이쳤다.
“서윤 누나?!”
쓰고 있던 고글마저 내동댕이친 서윤은 전속력으로 출구를 향해 달렸다.
“언니?! 어디가?!”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누가 불러도 멈춰 서지 않았다.
분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진 것도.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혼자 있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제가 따라가 볼게요!”
“잠깐!”
금화가 주원을 붙잡았다.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나.”
“따라가지 말란 말이에요?”
“그렇네.”
“그렇지만 방금 서윤 누나 엄청 화난 것 같았는데요. 가서….”
“가서 뭐라고 하려고 그러나?”
“그야 괜찮냐고….”
“위로는 상처 입은 호랑이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네. 자네 착한 마음이 서윤 양에게 더 큰 상처를 만들지도 모른다네.”
“…알겠어요, 형. 그렇게 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주원이 출구를 바라보았다.
텅 빈 복도는 왠지 더 쓸쓸하게 보였다.
* * *
“하아~.”
밤하늘이 올려다보이는 테라스.
혼자 흔들의자에 기대고 있던 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분하고 억울하다기보다는 창피했다.
차라리 시작이나 하지 말 걸 이란 후회가 들었다.
‘엄청 한심하게 보였겠지?’
발을 구른 서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그냥 뛰쳐나왔으니, 이제 뭐라고 하지?’
흔들거리는 벤치와 멋진 밤하늘.
평소라면 멋지고 기분 좋아야 할 것들이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음?’
뚜벅뚜벅 다가온 발소리가 옆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린 서윤은 발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흔들의자에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용주였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리고 누구 허락 받고 거기 앉는 건데?!”
놀란 서윤이 오른쪽으로 물러났다.
“왜? 전세라도 냈나 보지?”
“전세…를 낸 건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매너잖아! 앉기 전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냐?”
무심하게 대답한 용주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봉지 안에는 삼각김밥과 생수.
캔커피와 달달한 초코 케이크, 마카롱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핸드폰도 꺼놓고, 저녁 먹으러도 안 오고. 이주원 그 녀석이 걱정 많이 하더라. 예나도 그렇고,”
“…그럼 이건 걔가 사서 보낸 거야? 나 참, 누가 이런 거 신경 써달라고….”
“다 내가 산 거다만?”
용주의 한마디에 서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려던 말을 순간 잊어버렸다.
“네가 샀다고?”
“왜? 불만인가 보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의외라서.”
서윤이 말끝을 흐렸다.
달달한 간식들.
저건 딱 봐도 자신을 의식해서 산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주려고 온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은 네가 아니었나 보지?”
“기다려? 아!”
흠칫 놀란 서윤이 핸드폰 전원을 켰다.
12시 2분.
핸드폰의 시간은 약속했던 자정을 넘겨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완전히 잊고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른 것도 몰랐고.
이래서야 계획했던 게 완전 다 엉망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계속 여기 있었던 거냐?”
“아…. 응. 왠지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었거든. 혼자 있고 싶기도 했고….”
말꼬리를 흐린 서윤이 용주의 눈치를 살폈다.
“한심했지?”
깍지를 낀 서윤이 자조적으로 물었다.
“나도 알아. 일방적으로 끌어들이고, 일방적으로 말이란 말은 다 퍼부은 주제에,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있지도 않은 룰을 들이밀면서 억지나 부리다가 뛰쳐나가기나 하고. 그런 녀석이 있었다면, 나도 분명 한마디 했을 거야.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냐고.”
여기 혼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되짚어 본 자신의 모습은 너무도 창피했고, 너무도 억지스러웠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억지를 부린 거라고 하면,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용주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억지?”
“변칙적인 기습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어놓고는 룰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억지를 부렸지. 넌 탈락을 인정하기라도 했지. 난 그렇지도 않았다만.”
서윤은 용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
꼭 자기를 위로해 주려고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 말이다.
“그래도 거기서 느낀 게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냐? 너도. 그리고 나도.”
“…그것도 그러네.”
짧은 대답을 마친 서윤은 또 한 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곁을 머물던 답답함이 이제야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과해야겠지?”
“그건 네가 정할 일이지.”
“…그것도 그러네.”
흔들의자를 멈춘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닐봉지에 들어 있던 캔 커피 하나를 한 번에 비워 버렸다.
“잠깐만 여기 있어 봐. 금방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권유가 아닌 명령조의 이야기를 던진 서윤이 급하게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 * *
“역시 여기 있었네.”
용주의 방으로 들어온 서윤이 이야기했다.
방 안엔 수지가 혼자 있었다.
“역시?”
“그래. 역시. 여기 오면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온 서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깐 미안했다. 정작 승부에서 도망친 놈이 그런 말이나 해서. 내가 비겁했었다.”
“그 말 하려고 일부러 찾은 거야?”
“그래. 확실하게 풀어놔야 서로 마음이 편할 거 아니야.”
“음. 용감하네.”
“뭐?”
“용감하다고. 진짜 비겁한 사람은 사과할 줄도 모르거든.”
수지의 옅은 눈웃음에 서윤이 시선을 피했다.
이거, 전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지 않은가.
“안수지라고 했던가?”
“응. 맞아.”
“왜 내 도전을 받아준 거냐?”
“그러고 싶어 했으니까.”
“그럼 두 번째 도전도 받아줘도 됐던 거 아니냐?”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
“뭐야 그게. 완전 기분대로….”
“우리만 목숨이 2개라니. 첫 번째 경기에서 악쓴 사람한테 미안하잖아.”
“……!”
서윤의 머리가 순간 띵하고 울렸다.
이용주.
그 녀석이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던 20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다.
설마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고는….
‘바보 같아.’
스스로가 너무 작고, 이기적이게 느껴졌다.
거기서 두 번째 목숨을 받는다는 건 녀석의 노력과 사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행동.
자신이 전혀 보지 못했던 걸, 이 사람은 보고 있었다.
“…너한테 있어 이용주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야?”
마른침을 삼킨 서윤이 물었다.
“가족.”
“뭐?! 가족?”
서윤이 당황한 듯 물었다.
이용주, 안수지.
성이 다르니 진짜 가족은 아닐 테고.
그것 말고 가족이라 할 수 있는 건….
“응.”
“자, 잠깐! 잠깐잠깐! ‘응’이라고 하지 말아줄래? 전혀 이해 못 하겠거든?!”
“응?”
당황한 서윤의 손짓에 수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거야?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는데?!”
평범한 의료 헌터와 헌터 관계.
용주에게 들은 둘의 관계는 분명 그러했었다.
물론, 평범한 관계에서 오갈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어떻게든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었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사이?”
“그, 그러니까 가족이라는 건 그거잖아. 겨, 결혼! 부부!”
귀까지 빨개진 서윤이 외쳤다.
“결혼? 부부? 아~.”
수지의 머릿속에 순간 예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당황해하던 예은의 모습과 지금 서윤의 모습은 닮아 있었다.
“아니?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수지에게 서윤이 물었다.
“응. 그런 의미의 가족 아니야. 그래도 비슷하다고 생각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 잃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게 가족이니까.”
“…뭐야, 그런 거였어?”
서윤이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딱히 안도할 말은 아니긴 했지만, 안도도 때론 상대적이니 말이다.
“한마디로 특별한 사람이란 거네.”
“응. 그렇지.”
“나한테도 그래.”
굳은 얼굴의 서윤이 손을 꽉 쥐었다.
“기회가 두 번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그랬지?”
“응.”
“모의전에선 내가 졌지만, 모의전은 모의전일 뿐이야. 인생은 실전이라고. 안 질 거야. 너한테도, 팬텀한테도.”
서윤이 수지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꺼낸 꾸깃꾸깃한 종이를 손에 쥔 서윤은 그걸 앞으로 내밀었다.
“이따가 열어봐. 절대로 나 나가기 전까진 절대 열지 말고.”
시선을 피한 서윤이 도망치듯 방문을 나섰다.
서윤이 나선 것을 확인한 수지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쪽지를 열어본 수지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묻어 있었다.
* * *
“오래 기다렸지?!”
테라스로 돌아온 서윤이 흔들의자 앞에 섰다.
서윤의 손에는 아깐 없던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준비가 좀 필요하거든? 미안하지만, 잠깐만 더 기다려 줄래?”
비닐봉지를 뒤적거린 서윤이 안에 든 종이 박스를 뜯었다.
박스 안에는 폭죽놀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폭죽?”
언제 준비했는지보단, 왜 준비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딱히 폭죽을 터뜨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생뚱맞다.
그게 용주의 머릿속에 든 첫 생각이었다.
“아~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믿음직스러운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설명서를 읽는 그녀의 손과 눈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테라스로 나와 보랬던 거. 설마 이것 때문이었냐?”
흔들의자에서 일어난 용주가 서윤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니! 그러니까 넌 가만히 있으래도?!”
“병원 쪽에서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 않다만? 허락은 받은 거냐?”
“아니! 안 받았는데?”
“…….”
너무도 당당한 서윤의 대답에 용주는 한숨을 삼켰다.
하긴, 이 시간에 병원에서 폭죽을 쏜다고 하면 절대 허락해 줄 리가 없겠지.
“그러냐.”
서윤이 읽고 있던 설명서를 낚아챈 용주는 그녀가 설치하려던 폭죽을 도로 집어넣었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서 이거 쏘면, 분명 크게 한 소리 들을 거다. 벌금 물을지도 몰라.”
“상관없어! 그런 거!”
“그래. 넌 상관 안 하겠지.”
비닐봉지를 뒤적거린 용주는 또 다른 폭죽을 꺼냈다.
스파클라.
서윤이 쏘려던 연발 폭죽에 비하면 한참 작고 간소한 종류의 폭죽이었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는 게 어떻겠냐?”
용주의 제안에 서윤은 불만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 제안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반응을 반쯤 무시한 용주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불꽃은 빛과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