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피아노 줄?!’
칼자루를 향한 용주의 시선에 가늘고 기다란 실 같은 게 보였다.
실의 끝은 승우의 왼손과 이어져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그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한 방 먹었다.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란 룰은 없었다.
오히려 장비의 특성을 잘 살린 일격이었다고 평가하는 게 더 맞는 판단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진 예상 못 했나 보죠, 좀비 헌터?’
용주에게 불의의 일격을 날린 승우가 두 사람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 모의전엔 맹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시스템상의 치명상이 정해져 있다는 것.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스템이 그렇게 판단하도록 만들면 게임 오버였다.
그리고 승우는 이 시스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실수에서 배우는 법이죠. 당신이라면 분명 이걸 기회로 더 성장할 겁니다.’
승우가 판단하기에 용주의 상처는 치명상이었다.
물론, 시스템적으로 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용주라면 그걸 치명상이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복력이나 정신력 같은 걸 떠나 시스템상의 장치가 작동했을 것이다.
전력으로선 이제 아웃이라고 봐야 맞겠지.
“팬텀과의 전투에서도 그러고 있을 건가요, 이주원 헌터?”
승우의 검이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주원은 검을 거꾸로 잡고 있었다.
“모의전에 역날검. 과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걸요.”
“아니요. 전 최대한 실전처럼 하고 있는 거예요, 형!”
승우의 공격을 받아낸 주원이 역공에 들어갔다.
짧고 간결한 스텝을 밟으며 오른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주원.
‘확실히 이용주 헌터와는 색이 다르군요.’
검의 형태를 변화시켜 공격을 막아선 승우는 주원과의 공방을 이어 갔다.
주원 역시도 등급 대비 상당한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MP 부분에서 상당히 취약하기에 티르의 손으로 높은 등급을 판정받지 못했을 뿐이지 그의 기량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원의 가장 큰 장점은 탄탄한 기본기라고 할 수 있었다.
용주 역시도 기본기가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용주와 주원의 기본기는 결이 달랐다.
비유하자면 용주의 기본기는 사파적인 느낌이 강했다.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단련하고,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거라기보다는, 위기를 경험하며 직접 터득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용주의 동작은 좋게 말하면, 실전 압축형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조잡하거나 처절해 보였다.
반면, 주원은 기초부터 하나하나 쌓아 올라갔다는 느낌이 강했다.
동작은 절제되어 있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스킬 없이 오로지 검술과 체술만 활용하는 모의전이기에 그 차이가 더 명확하게 보였다.
‘그럼 이렇게 나가 보면 어떨까요?’
바짝 낮춘 자세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승우의 올려 차기.
오른발을 든 승우는 그대로 주원을 찍어눌렀다.
그리고.
“그게 전부냐?”
자신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다.
성대를 긁는 기괴하게 불쾌한 목소리에 주원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로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그게 실전이라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
승우의 도발에 주원이 이를 악물었다.
물러선 반동을 이용해 뛰어오른 주원은 그대로 승우를 내리찍었다.
‘격동하는 감정은 강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큰 독이 되기도 하죠. 뭐… 저도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지만요.’
주원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낸 승우는 그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밀었다.
주원의 이번 일격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 있었다.
직선적이었고, 빈틈이 많았다.
“체크메이트.”
승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걸로 주원까지 무력화하면 남은 건 금화 하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조금 전까지는.
‘이거 놀랐는걸요.’
공격을 포기한 채 물러난 승우가 자신의 양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엔 기다랗고 날카로운 얼룩들이 생겨 있었다.
왼쪽 건 상대적으로 짧고 얇았고, 오른쪽 건 그것보단 두꺼웠다.
“용주 형? 금화 형?”
놀란 주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게 보였다.
그대로 공격을 이어갔다면, 양쪽에서 치고 들어온 두 자루의 검에 가슴까지 찢겼을 것이다.
“이용주 헌터….”
승우가 흥미로운 듯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던 승우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했던 사람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스템이 작동하면, 움직일 때마다 몸이 저릿저릿 울리게 되어 있었다.
피가 안 통하면 그 부위가 저리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보통 그 상태라면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움직인다 해도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괴로움을 표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용주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얼굴로, 너무나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치가 작동되지 않았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왜? 뭐 문제라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씨익 웃어 보인 승우는 교전을 이어 갔다.
좀비 헌터.
그 이명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 시간 다 됐어요!”
핸드폰 알람을 확인한 예나가 외쳤다.
네 사람의 진행한 모의전은 20분을 꽉 채워 진행되었다.
세 사람은 물론이고, 승우까지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을 타고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주원은 대자로 뻗어 있었다.
종료 직전 들어간 승우의 일격이 치명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우와악! 이게 뭐예요! 찌릿찌릿! 온몸이 저린데요?!”
몸을 일으키려던 주원이 옆으로 뒹굴었다.
고통이라 하기엔 미묘하고,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아닌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까 아가씨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옷이 알려줄 거라고.”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승우가 고글을 올렸다.
“옷이? 그럼 이게….”
“네. 그게 장치입니다. 보통이라면 그 상태로 움직이기 쉽지 않죠. 보통이라면… 말입니다.”
용주와 시선을 맞춘 승우가 앞머리를 정리했다.
“용주 오빠!”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예나는 곧장 용주에게 다가갔다.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낸 용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 혹시 뭐 불편하거나 찌릿거리거나 하는 거 없어?”
생수를 건넨 예나가 물었다.
모의전 내내 의문이었던 부분이었다.
센서가 고장 난 게 아닌 이상에야 작동했어야 정상인 것 같은데 말이다.
심판으로서 판단을 유보한 것은 용주의 태연함 때문이었다.
분명 용주가 탈락 조건을 채운 것 같았는데,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기엔 무리가 있었다.
“글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빠, 그거 나 한번 줘볼래?”
끝까지 확신이 없던 예나는 용주의 트레이닝복 상의를 받아 갔다.
“이…. 예나야, 마침 잘 왔어, 나 계속 몸이 저릿저릿 거는데, 이거 언제까지 이래?”
예나에게 손을 뻗은 주원이 SOS 신호를 보냈다.
간신히 상체만 일으킨 주원은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계속 그럴걸?”
“안 돼~ 살려줘. 이대로면 오늘 저녁도 못 먹을 거라고. 그럼 나 진짜로 죽어.”
“그러니까 말했잖아. 아무것도 안 하면 이라고.”
주원의 집업을 내린 예나는 양쪽 소매를 차례대로 잡아당겼다.
집업을 벗은 주원은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저릿거리던 그 불쾌한 감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 팔 아까처럼 이렇게 해볼래?”
“응? 이렇게?”
“응. 잠깐만 그렇게 있어 봐.”
양팔을 벌린 주원에게 예나는 다시 트레이닝복을 입혔다.
“응? 예나야 지금 뭐 하는…… 읏!”
의문을 표하는 주원을 덮친 찌릿거림.
주원의 반응을 확인한 예나는 다시 지퍼를 내렸다.
용주의 트레이닝복엔 문제가 없었다.
“오빠… 그 상태로 계속 움직인 거야?”
예나가 용주에게 물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지 않은가.
“뭐… 그러지 말란 룰도 없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누구에 비하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속인 건 한 사람뿐이고, 특별한 테크닉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야.”
반쯤 마신 생수의 뚜껑을 닫은 용주는 승우에게 그걸 던졌다.
정확하게 생수를 캐치한 승우는 남은 반을 비우고 있었다.
“그 상태로 움직이다니? 용주 형 혹시 이 저릿저릿한 상태였던 거야?”
집업을 벗은 주원이 물었다.
“아마 꽤 초반부터 그랬었을 거야. 정말이지,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뭐, 그것까지도 용주 군답지 않은가? 좀비 헌터. 괜히 그런 이명이 붙은 게 아니란 건 잘 알지 않은가?”
대검을 집어넣은 금화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용주는 특별한 테크닉이 아니었다고 했지만.
그 정도로 완벽하게 아군까지 속일 수 있다면, 그건 충분히 특별한 테크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라운드는 무승부로 끝! 그럼 바로 2라운드로 넘어갈게요.”
네 사람이 경기장 밖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예나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경기장에 먼저 들어간 이는 수지였다.
“잘 보고 있어.”
일부러 용주의 옆을 스쳐 지나간 서윤은 수지의 맞은편에 섰다.
“미리 말해두는데, 의료 헌터건 뭐건 절대 안 봐줄 거야. 전력으로 쓰러뜨릴 거라고.”
투지를 불태운 서윤이 이야기했다.
“그래. 좋을 대로 해.”
“…….”
돌아온 대답에 서윤의 눈빛이 더 활활 타올랐다.
저 평온한 얼굴.
평온한 목소리 어디에서도 긴장감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았다.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그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어.’
의료 헌터의 전투 능력은 통상적인 헌터들 보다 아래란 게 보편적인 상식.
해봤자 승우보다도 떨어질 거란 게 서윤의 추측이었다.
“룰은 똑같아요. 대신 제한 시간은 10분만 할게요.”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예나는 시작 신호를 보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손안에서 능숙하게 칼자루를 돌려 보인 서윤이 선공을 잡았다.
수지는 딱히 전투 동작이라 할 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상관할 서윤이 아니었다.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도 녀석의 잘못.
승부에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면 그냥 한 방에 끝내 버리겠어!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라고!’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서윤이 검을 내질렀다.
칼끝이 노리는 건 수지의 가슴 정중앙.
아까 승우가 주원을 KO시켰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칼날.
공격이 성공에 가까워지는 그 짧은 시간이 서윤에게 영겁처럼 느껴졌다.
‘젠장…. 저 녀석 뭐 하는 거야?’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모의전이고, 그렇게 되지 않는단 걸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칼날이 녀석에게 가까워질수록 그 불안감이 점점 커져 갔다.
앞에서 본 것도 있고,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란 확신도 있었는데….
막상 다가온 현실은 생각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망설였네.”
그런 서윤의 귓가를 스치는 수지의 목소리.
“!”
놀란 서윤의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난 수지는 자신의 어깨를 짚고 수직으로 몸을 세우고 있었다.
“이해해.”
서윤의 어깨를 딛고 뒤로 넘어간 수지가 그대로 왼손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위아래가 뒤바뀐 서윤의 시야.
힘과 반동엔 내던져진 서윤은 지면을 구르며 간신히 멈춰 섰다.
‘방금 그건….’
땅을 구른 서윤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완전히 놓친 그 움직임.
B급 헌터인 승우보다도 더 빠르고 예리했다.
‘망설였다고? 그래, 망설였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야.’
아랫입술을 깨문 서윤이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 2라운드 승자는 수지 언니예요!”
서윤의 귓가에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뭐라고? 어째서…!”
서윤은 즉각적으로 항의했다.
그리고 거기에 돌아온 예나의 한마디.
“그야. 언니가 지금 경기장 밖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