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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68화 (168/357)

168화

* * *

조, 환, 울.

그리고 와인 기사와 짧은 작별을 끝낸 용주는 포탈을 빠져나왔다.

나오기 전 용주는 역할을 다한 위령의 잔을 와인 기사에게 건넸다.

그의 부탁이었고, 용주가 들어준 결과였다.

위령의 잔을 화톳불 앞에 내려놓은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언제 챙겼는지 모를 작은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냈고, 흙 덮인 씨앗에선 순식간에 싹이 자라났다.

마지막으로 봤던 네 사람의 모습은 절망적이라기보단, 희망적이었다.

“…….”

멈췄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스크린의 화면이 움직이는 게 등 뒤로 느껴졌고, 정적이 흐르던 귓가에 소리가 채워졌다.

“음?”

저 앞에 수지가 고개를 갸웃하는 게 보였다.

당연하겠지.

자신보다 뒤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앞에 뿅 하고 나타났을 테니까.

“왜?”

수지에게 다가간 용주가 태연하게 물었다.

선수를 친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

뻔뻔함이 지금 용주가 고른 무기였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였고, 원래 자리로 돌아갈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뒤에 있었던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본 수지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보란 듯이 왼손을 앞으로 뻗어 보인 용주는 가볍게 손을 움켜쥐었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용주의 모습.

수지와의 거리를 크게 좁힌 용주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용주가 하려는 말은 명확해 보였다.

“음, 그렇구나.”

용주의 점멸에도 수지는 크게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헌터 시험에서 비슷한 걸 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왜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간 건데?”

“…….”

수지의 물음에 용주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까진 어찌어찌 즉흥적으로 풀어나갔는데, 적당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신발 끈….”

짧은 시간 동안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찾던 용주가 중얼거렸다.

“신발 끈?”

의문을 표한 수지는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신발 끈은 풀어져 늘어져 있지 않았다.

다만, 조금 더 걸으면 풀어질 것처럼 매듭이 느슨해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용주도 이게 말인가 싶었다.

세상 어떤 사람이 느슨해진 신발 끈을 보고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이것 말고는 없었다.

“음~.”

용주의 황당한 변명에도 수지는 크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가까이 있던 의자에 앉아, 양쪽 신발의 매듭을 모두 풀고 있었다.

왼발의 매듭을 묶은 수지가 오른발을 쭉 뻗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용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왜?”

수상쩍은 수지의 눈빛에 용주가 물었다.

되도 않는 이야기에 태클을 걸지 않은 건 감사하다만….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불안했다.

“해줘.”

“…뭐?”

수지의 한마디에 용주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묶어달라고. 신발 끈.”

“…….”

수지가 오른발을 까딱였다.

흘러내린 신발 끈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왜.”

용주가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원래 그런 녀석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황당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도 아니고.

왜 굳이 한쪽을 묶고 나서 다른 한쪽을 내미느냔 말이냐.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 누구 매듭이 더 오래가는지도 궁금해졌고.”

“…….”

목덜미를 긁적인 용주는 어쩔 수 없단 듯 자세를 낮추었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걸로 지금 상황을 넘어갈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됐지?”

매듭을 묶은 용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매듭은 예쁘게 잘 묶여 있었다.

남은 전시관을 순서대로 살피던 두 사람 잠시 멈춰 섰다.

2층의 마지막 전시관의 바닥은 아래가 보이는 특수 유리로 되어 있었다.

“이름표네.”

유리 아래엔 누군가들의 이름표가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 똑같은 색에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이름들.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대. 저 공란의 이름표가 그걸 기린 건가 봐.”

안내판을 읽은 수지가 한 이름표를 가리켰다.

‘이름 없는 자.’

순간 머릿속에 게이트에서 봤던 녀석들이 스쳤다.

시대도. 세계도 달랐지만, 어쩐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바쳤던 그 마음도.

모든 걸 바치고도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아련함도.

죽음 이후에도 안식을 얻지 못한 그 비통함도.

‘칫…!’

용주가 의식적으로 생각을 잘라 냈다.

쓸데없는 곳에서 쓸데없이 감정적이게 된 느낌이었다.

거기서 보고 들었던 것들 때문인 모양이다.

“슬프네. 얼마의 세월이 지났어도 가족들은 잊지 않았을 텐데. 가족들은 쭉 기다리고 있었을 거 아니야. 가족만이 기억하는 그 이름을.”

쪼그리고 앉은 수지가 바닥에 손을 올렸다.

‘가족만이 기억하는 이름….’

수지의 한마디가 송곳처럼 용주의 가슴에 박혔다.

이름 없는 자.

가족만이 기억하는 이름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먼저 올라간다.”

시선을 돌린 용주는 그대로 3층 갑판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라도 좀 맞고 싶었다.

갑판으로 올라온 용주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뻥 뚫린 바다의 전경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만큼 아름다웠다.

“기분이라도 풀어주려고 한 건데, 역효과였나 보네.”

바닷바람에 섞인 목소리에 용주가 고개를 돌렸다.

곧장 뒤따라온 수지가 나란히 서 있었다.

“혹시 내가 뭐 말실수라도 한 건가?”

“…….”

수지의 물음에 용주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느꼈다.

실수이기도 했고, 실례이기도 했다.

수지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기 감정대로 움직이기만 했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표정을 숨긴다고 해서, 모든 게 감춰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실수한 건 오히려 내 쪽이지. 미안하다.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음…. 그렇구나.”

수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난간을 짚은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도 마음도 복잡했다.

만약 누군가에게 잠깐이라도 의지해도 된다면….

기대고 싶었다.

“가족이라고 했지. 헌터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간을 등지고 선 용주는 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가족이지.”

“나도 여전히 네가 생각하는 가족에 들어가 있는 거냐?”

“응.”

“만약에…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넌 어떻게 할 거냐?”

“찾아야지. 카오스 게이트 너머 어디에 있더라도.”

수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만약에. 내가 죽었다는 걸 알았으면?”

“네 동생한테부터 갈 것 같아. 그리고 날 원망하겠지.”

이번 물음에선 수지가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가정 자체가 쉽게 생각할 만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 만약 나란 사람을 너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누군가 의도적으로, 혹은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내가 없던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용주의 물음에 수지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 감는 그 순간까지 기억하고 또 기억해줘야지. 내가 기억해주지 않으면, 정말 없던 사람이 되어 버릴 테니까. 그리고….”

망설임 끝에 대답한 수지가 시선을 돌렸다.

“네 동생한텐 꼭 말해줄 거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이. 네 오빠였었다고.”

“…….”

수지의 마지막 한마디에 용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분하고 평온한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냐.”

감정을 숨긴 용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갈까?”

“응.”

두 개의 이형 워프 장치를 꺼낸 수지가 용주에게 손을 보였다.

용주는 그중 하나만을 집었다.

이형 워프 장치를 움켜쥔 수지는 용주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결정은 이제 없었다.

“뭐 하는 거냐?”

“내 건 여기 있어. 방금 꺼낸 건 전부 네 거.”

수지가 또 하나의 이형 워프 장치를 보였다.

“이렇게 막 줘도 괜찮은 거냐?”

용주가 물었다.

A급 헌터가 사용하는 특별한 물건이었다.

돌아가는 데 필요한 개수는 하나.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그거 기억나?”

“그거?”

“응. 네가 여자 탈의실에 나타났던 거.”

“…….”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었다.

“거긴 내 마나가 들어 있어. 그때 있었던 일이 우연이 아니었다면, 그걸로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을 거야.”

왼발을 먼저 움직인 수지가 오른발을 똑같이 끌어 왔다.

비슷한 듯 다르게 생긴 매듭은 다시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만약 위험해지면, 망설이지 말고 사용해. 난 믿어. 그게 분명 우릴 이어줄 거라고.”

“…….”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더 강하니까.”

“…….”

“모든 사람이 널 잊어도, 모든 사람이 널 미워해도 난 지금 이대로일 거야. 가족이니까.”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수지의 머리.

그녀를 바라보던 용주의 동공이 크고 또렷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모습에서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머니의 입으로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라면 분명.

저렇게 말씀하셨었겠지.

‘이 녀석에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수지는 그 말을 해준 사람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이상한 말이었다.

수지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말은 그녀의 중심에 자리 잡은 말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신념을 물려준 사람을 잊어버렸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하나만… 딱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용주가 물었다.

“응.”

“만약 네가 가족이라 불렀던 이가 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면 넌 어떻게 할 것 같냐?”

“…….”

수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이.

아주 깊이 생각에 잠긴 눈을 하고 있을 뿐

“슬플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

수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용주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깊고 깊은 슬픔을.

“…그러냐.”

용주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만약이라는 가정도 아니었고.

그녀에게 그건 과거였고, 현실이었다.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건가.’

자신은 가족을 잃어버렸다.

수지는 가족을 잊어버렸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두 사람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그 신념을 부정했었다.

수지는 그 신념을 관철해 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는 자신의 안티테제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달랐지만, 동시에 닮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녀석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기대고 싶어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 * *

“오빠, 들어갈게?”

목소리를 낸 예나가 문을 열었다.

용주가 안에 있다는 건 오기 전에 통화를 해서 알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예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는 용주가 아닌 수지였다.

용주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반주도 없이 말이다.

노랫소리에서 시선을 뗀 예나는 반대편 구석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을 곳에 자리 잡은 용주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검인 것 같은데, 그런 물건도 가지고 있던 거야?”

예나가 물었다.

익숙해지려는 듯 휘두르는 용주의 검은 지금껏 용주가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물건이었다.

“뭐, 그렇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검을 휘두른 용주가 룬검을 집어넣었다.

소울을 활용한 스킬까지는 아직 사용해보지 못했지만, 그립감이나 무게감 같은 건 대충 어떤 느낌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지?”

예나와 시선을 살피던 용주가 물었다.

수지의 콧노래는 용주가 검을 넣음과 동시에 멈춰 있었다.

“아…. 조금 궁금하긴 했는데, 괜찮아.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

예나가 손을 저었다.

“적적하잖아. 템포 맞추기에도 좋고, 유지하기에도 좋고.”

그와 동시에 들려온 수지의 목소리.

수지와 눈이 마주친 예나는 조금 놀란 듯 주춤거렸다.

수지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용주도 예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웬 노래냐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었다.

이게 그때 들려줬던 대답.

목덜미를 긁적인 용주는 체념한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까 전화로 하려던 말은?”

이마를 닦은 용주가 물었다.

“아! 그게 있잖아, 집사가 모의전을 해보자고 하더라고.”

검지를 세워 보인 예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예나의 얼굴은 제법 당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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