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하늘 높이 날아오른 보좌관은 짙은 안개로 사방을 덮었다.
밤이 된 듯 어두워진 시야.
피부를 스치는 감각과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용주는 왼쪽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칼날과 갈비뼈가 부딪치며 갈리는 소리 끝에 보좌관의 모습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보좌관의 약점은 가슴 중앙에 있는 푸른 핵.’
머리 부위에도 빛이 있긴 했지만 가슴 부위에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작았다.
노릴 거면 저곳이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상대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지 하는 부분이었다.
황금률이나, 융합된 칠흑 투구를 활용하면 어느 정도 공중전도 따라갈 수 있었다.
‘메모리 다이얼’이란 아이템의 힘을 빌어 ‘하늘의 사슬’이나 ‘별의 비수’ 혹은, ‘황도의 거울’ 같은 아이템을 다시 한번 사용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볼까?’
고심 끝에 용주는 한 가지 아이템을 손에 쥐었다.
용주의 손에 들린 건 ‘융합된 칠흑 투구’도 ‘메모리 다이얼’도 아닌 ‘양극성 저주 주머니’.
자신의 크기.
혹은 적의 크기를 다른 한쪽과 동일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
그 순간.
용주의 간담이 순간 서늘해졌다.
시야 끝에 푸른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크기와 높이로 미루어 짐작건대 저건 보좌관의 입에서 반짝이는 빛.
한 점에서 시작된 빛은 부채꼴의 형태로 퍼져 나가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위험하잖아.’
땅속으로 몸을 숨겼던 용주가 굴 밖으로 뛰어올랐다
주변을 잠식하던 안개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빛이 반짝였던 곳엔 역시 왕의 보좌관이 있었다.
부채꼴 형태로 얼어붙은 대지는 마치 바다가 통째로 얼어붙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쓸 줄 알았던 거냐.’
왕의 룬검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둘의 합작품인 모양이었다.
검을 고쳐잡은 용주는 보좌관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펼쳐지는 인스네어.
갑작스러운 초록 가스에 당황한 보좌관은 급하게 날아올랐다.
보좌관의 눈에 인스네어를 뚫고 나오는 용주의 모습이 보였다.
기껏 만든 연막을 뚫고 나오는 어리석은 방식의 돌격.
무모하게만 보이는 용주의 돌진에 보좌관이 화답했다.
‘그렇게 나와주면 나야 고맙지.’
보좌관의 대응을 용주는 크게 두 가지로 예상했다.
하나는 원거리에서 이점을 이어 가는 것.
다른 하나는 지금처럼 돌진해 오는 것.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용주는 지금 상황을 골랐을 것이다.
‘그럼….’
충분히 거리가 좁혀지기를 기다리던 용주가 양극성 저주 주머니를 사용했다.
대상이 된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난 천칭은 좌우 무게를 맞춰갔다.
천칭에 담긴 건 방금 주머니에서 흩뿌려진 가루들.
교차하며 지나간 두 사람은 180도 방향을 꺾어 다시 마주했다.
흔들거리던 천칭은 천천히 멈춰 서고 있었다.
“!”
이상을 감지한 이름 없는 왕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풍당당하던 보좌관의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모습이 변한 건 아니었다.
변한 건 보좌관의 크기.
시야 끝에 걸리던 날개는 양팔간격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고, 크고 거대했던 보좌관의 두개골은 말의 두상마냥 작아져 있었다.
“한 방 먹었군.”
이름 없는 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보좌관은 급격하게 고도를 잃고 있었다.
수평을 이루지도 못해서 좌우로 비틀거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자신의 무게조차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타닥!
한 장면에 담긴 세 사람의 위치는 각기 달랐다.
이름 없는 왕은 보좌관의 등을 차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보좌관은 돌풍 앞에 종이비행기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오른발에 힘을 주어 뛰어오른 용주는 살짝 비튼 칼날을 갈빗대 사이로 찔러넣었다.
갈비뼈로부터 핵 사이의 거리는 본래 용주의 칼날이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거리였다.
하지만 놈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사정이 변했다.
지금의 핵은.
칼날에 닿았다.
▶ 왕의 보좌관을 쓰러뜨렸습니다.
▷ ‘보좌관의 맹세’ 효과가 소멸했습니다.
▷ ‘이름 없는 왕’의 무적이 사라집니다.
키이잉~!! 콰앙!
강렬한 빛을 내뿜던 보좌관의 핵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과 함께 모든 걸 집어삼킨 보좌관의 영혼 안개는 분진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보이는 용주의 모습은.
반쯤 해골화가 진행된 기괴한 모습이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진 왕의 보좌관은 한 줌 빛을 남기며 사라졌다.
“양극성 저주 주머니. 그래. 거길 들렀다면, 충분히 가지고 있을 법도 하지.”
푸른 안광을 번뜩인 이름 없는 왕이 검을 겨눴다.
용주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뼈마디가 다 보이는 이게 자신의 손이란 게 상당한 이질감이 들었다.
HP의 최대치는 대략 40%가 날아가 있었다.
최대 HP가 날아간 만큼 남은 체력도 자연스럽게 줄어 있었다.
딱히 엄청난 통증을 느끼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현재 HP와 최대 HP.
둘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래도 하난 처리했어.’
이름 없는 왕에게서도 이제 빛이 보였다.
빛이 머무는 곳은 가슴, 머리 그리고 목.
인간의 급소라 생각되는 딱 그 지점들이었다.
‘남은 건 하나.’
지면을 찬 용주가 속도를 높였다.
룬검에 적힌 룬 문자들에 하나씩 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까드드득!
그와 동시에 다섯 방향으로 퍼져 나가는 얼음의 파도.
굽이치며 몰려오는 파도를 피해 도약한 용주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설녀 녀석이 사용했던 것에 비하면 약과야.’
이름 없는 왕 주위에 한기가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영혼이 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은 다가오지 말라 경고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해 휘두르는 칼날.
점멸을 활용한 용주는 이름 없는 왕의 뒤를 잡았다.
한기 안쪽으로 들어오자 엄청난 추위가 느껴졌다.
하얀 입김이 나왔고,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날 너무 쉽게 본 모양이구나.”
칼날을 타고 튀는 서리 파편.
물 흐르듯이 기습에 대처한 이름 없는 왕은 용주의 기습을 완벽하게 맞받아쳤다.
‘아니, 쉽게 본 적 없어.’
이 공격에 적이 대응한다는 것 역시 용주는 가정하고 있었다.
‘할퀴기.’
왼손을 휘두르는 용주.
이 각도, 이 구도에서 이 공격이 적중할 확률을 용주는 70%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건 상당히 실망스럽구나.”
갑옷에 부딪힌 용주의 손을 타고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젠장.’
자신의 손을 본 용주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붉은 손톱이 생겼어야 할 손끝엔 하얀 서리만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할퀴기는 피를 이용해 손톱을 만드는 스킬.
지금 이 손엔 흘러내릴 피가 없었다.
촤악!!
역으로 생긴 틈을 비집은 왕의 룬검이 용주를 베어 냈다.
붉은 피가 흩뿌려졌고, 상처 면을 타고 끔찍한 한기가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은 한기에 이를 악문 용주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남아 있는 HP는 이제 50도 되지 않았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할퀴기가 먹통이란 건 다른 몇몇 스킬들 역시도 제약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맹독, 사후 강직.
대표적으론 그런 것들이 있겠지.
‘이렇게 되면….’
제약이 생긴 원인은 ‘보좌관의 영혼 안개’였다.
그리고 그 근간이 되던 보좌관은 이제 없었다.
다시 말해 영혼 안개가 다시 축적되는 일은 없다는 소리였다.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와인 기사에게 받은 비법 와인을 바라보았다.
총 HP가 줄어들어서 그렇지 실제로 잃어버린 HP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잃어버린 최대치만큼 HP가 돌아온다면 지금보다 전투를 훨씬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벌 수 있을까?’
문제는 이름 없는 왕이 그걸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
두 사람의 칼날이 부딪치며 또 한 번 서리 파편이 빗발쳤다.
남아 있는 소울들을 긁어모은 용주는 대량의 해주석을 구입했다.
이 많은 해주석을 이름 없는 왕에게 모두 건네는 건 불가능했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곧장 이상을 감지할 테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해주석의 타깃은 바로 자기 자신.
이리저리 생성된 붉은 연기에서 잊힌 자들이 무더기로 나타나고 있었다.
‘좋아.’
잊힌 자들을 제거하지 않은 용주는 오히려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찰나의 순간 생긴 시야의 공백.
그 기회를 잡아보기로 한 용주는 비법 와인을 꺼내 들었다.
‘지금이라면….’
용주가 와인을 마시려던 그때.
용주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는 잊힌 자들.
살을 찢는 강렬한 한기 속에 용주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와인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병에서 단 한 방울의 와인도 혀끝에 떨어지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와인병이 눈앞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큭!”
와인병에 얼굴을 찢긴 용주가 고개를 돌렸다.
땅에 떨어진 고체가 된 와인은 증발하며 사라져 버렸다.
‘왕의 보좌관은 분명 처리했을 텐데….’
짙은 한기를 흩뿌린 그건 분명 그 녀석이었다.
순간 나타났던 보좌관의 모습은 역할을 다하고 또 사라져 버렸다.
용주의 시야에 이름 없는 왕이 보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두 손으로 움켜쥔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안 좋은데….’
방금 그게 환영이든, 화신이든.
기타 다른 무엇이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와인을 잃어버렸단 것.
이는 이 퀘스트 하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최대 HP를 잃어버린 건 앞으로 있을 모든 퀘스트와 헌터 일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은 이미 건너선 안 될 강을 건넌 상태였다.
이 모습으로 현실로 돌아간다면….
이 모습을 동생에게 보여줘야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니야. 일단 녀석을 쓰러뜨리는 것만 생각하자.’
고개를 저은 용주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텐링’을 착용했다.
‘양극성 저주 주머니’의 효과에 대해 이름 없는 왕은 알고 있었다.
아마 이 링의 효과 역시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기습으로서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퇴색되겠지만, 적의 턴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턴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전투를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테니까.
날카롭게 파고든 용주는 왼쪽 어깨 위로 검을 최대한 당겼다.
참격의 위력을 최대한 끌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반대로 오른쪽이 무방비로 비는 양날의 검이었다.
“……!”
울려 퍼지는 소리와 진동.
검을 휘두른 용주의 표정이 순간 구겨졌다.
칼날을 타고 부러질 듯한 진동이 전해졌다.
이 느낌.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이건 강도 이상의 무언가를 베었을 때의 감각.
벨 수 없는 것을 때렸을 때 전해져 오는 검의 비명이었다.
“함께였던 열 개의 링도 이제 혼자가 됐나 보군.”
지면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가시들이 순식간에 용주를 꿰뚫었다.
“텐링. 그것 역시도 내가 알고 있는 물건. 대처하는 법만 알면 전설을 깨뜨리는 것도 가능하지.”
삼각뿔을 그리며 교차하는 얼음 돌기들.
두 다리가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용주의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점멸을 사용한 용주는 가시 지옥을 빠져나왔다.
심각한 균열이 생긴 링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9번….’
링에 남은 보호 능력은 이제 단 한 번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지금 내 검으론 녀석을 벨 수 없어.’
황금 보검으론 부족했다.
녀석의 갑옷을 뚫으려면 더 강한 일격이 필요했다.
‘오른손이라면 아직 할퀴기를 사용할 수 있어. 그게 아니면 물어 뜯기를….’
순간 멈칫한 용주가 고개를 저었다.
물어뜯기의 중첩.
순간, 그때 느꼈던 살육의 충동이 섬뜩하게 밀려왔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더 있다고 한다면….’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스킬이 스쳐 갔다.
아웃레이지 스내치.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입수하게 되었는지, 어떤 형태의 스킬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엄청난 요구값을 자랑하는 만큼 위력은 확실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번. 그걸 사용한다 가정했을 때 기회는 딱 한 번뿐이야.’
남아 있는 HP와 MP를 고려했을 때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HP 쪽의 지불은 특히 치명적.
자칫 잘못했다간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자체 회복은 불가. 시간이 끌릴수록 불리한 쪽은 나야.’
결단을 내린 용주는 검을 집어넣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용주는 이 한 방에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