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육안으로 보이는 시야는 동그란 원의 형태였다.
넓이는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는 정도, 깊이도 대략 2m 정도로 키보다 좀 더 깊은 수준이었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저 잔해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 벽이라도 있는, 그런 느낌인데.’
일반적인 땅굴이라면 지면이 파헤쳐지면서 위에 있던 것들이 아래로 쏟아져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일단은….’
밖에 나가서 상황을 확인해 보기로 한 용주는 굴을 빠져나왔다.
“……!”
그런 용주가 마주한 한 가지.
깊게 파헤쳐져 있어야 할 지면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그렇다는 건….’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가설이라면 지금 일어난 현상들이 모두 설명이 되었다.
‘이 스킬로 굴을 파도 위쪽의 상태는 그대로란 건가.’
잠시 고민하던 용주는 코너를 바라보았다.
붉게 표시된 시야가 정해진 경로를 정해진 시간만큼 탐색하고 돌아가는 게 보였다.
‘어디 해보자고.’
두 사람의 시야각이 사라진 지 정확히 43초.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한 용주는 고양이처럼 네발로 코너를 돌았다.
사족 보행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게 두 발로 걷는 것보다 훨씬 발소리를 줄일 수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학습했으니까.
저 앞에 두 녀석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방향을 알려주는 선은 한 건물의 잔해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 목적지를 확인한 용주는 생각했던 정확한 타이밍에 땅굴 파기를 사용했다.
위쪽으로 보이는 동그란 시야와 거길 바라보는 붉은 시선.
다가오는 발소리 속에서 용주는 숨을 죽였다.
타박…. 타박….
시야 끝에 나타난 두 명의 잊힌 자.
두 사람의 발걸음이 용주가 파놓은 굴 위로 다가왔다.
둘 중 먼저 움직인 이는 왼쪽에 있던 녀석.
굴 위로 내딛는 발걸음이 용주가 보기엔 허공을 향해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녀석의 통과였다.
말 그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고,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허공을 걸어간 두 녀석은 하던 그대로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후우….’
참았던 숨을 내쉰 용주는 굴을 빠져나왔다.
차분하지만 신속하게 움직이는 용주.
그나마 형태가 남아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용주는 선을 따라 건물 2층으로 이동했다.
2층 잔해에 바짝 붙은 용주는 다음 선이 가리키는 동선을 살펴보았다.
반대편 루트가 이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평범한 도시의 잔해처럼도 보였지만,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길이 아닌 곳의 땅은 텅 비어 있잖아.’
정해진 길이 아닌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떨어지면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무사할 것 같은 생김새는 아니었다.
특이점은 더 있었다.
순찰을 돌고 있는 잊힌 자들 중 처음 보는 형태의 존재들이 있었다.
개나 늑대의 골격을 가진 부패한 존재들.
썩어 문드러졌던 쥐와 결을 같이 하는 녀석들이 함께 정찰을 돌고 있었다.
킁킁거리는 녀석들의 모습은 흡사 수색견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저게 신수인가?’
선이 끝나는 지점으로 시선을 옮긴 용주의 눈에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하나 보였다.
도시 중앙에 자리 잡은 나무는 축 처져 모든 가지를 땅에 내려놓고 있었다.
나무에선 옅은 보랏빛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 오면서 감지한 보랏빛의 출처는 저기인 모양이다.
‘수색 인력이 제법 많은데.’
각 루트마다의 인력이 상당했다.
게다가 저 수색견의 모습을 한 녀석들이 영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 신경 쓴 건 시각과 청각.
거기에 후각까지 신경 써야 한다고 하면, 용주에겐 득이 될 게 없었다.
땅굴 파기의 효용도 미지수고 말이다.
신수로 이어지는 마지막 대로엔 유독 거대한 잊힌 집합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녀석이 만드는 거대한 시야각은 옅었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는데, 아무래도 각 머리가 주기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수가 없을까.’
통과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경로가 여럿 보였다.
동선이 겹쳐 비는 시간이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곳도 있었고.
길을 막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녀석들도 몇몇 있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려나.’
진행 경로와 잊힌 자들의 동선.
그 모든 것을 고려하던 용주는 한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그리고 구매한 세 가지 아이템.
순서대로 비방하는 해골.
진흙 묻은 대변 경단.
이끼 낀 썩은 나뭇가지였다.
용주는 그 중 ‘진흙 묻은 대변 경단’을 손에 쥐었다.
경단의 악취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그대로.
동글동글 말린 세 개의 경단이 나무 꼬치에 꿰어져 있었다.
‘이름이나 냄새 중에 하나라도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똥 맛 카레랑 카레만 똥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면 뭘 고를지.
지금 상황에 비하면 두 가지 선택지 모두 아주 선녀이지 않은가.
촉촉하기에 식감이 더 거북한 그것을 삼킨 용주는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
이 타이밍을 잡기까지 용주는 정말 많은 것들을 고려했다.
고지는 반대로 가장 많은 시야각에 노출되어 있는 지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제일 먼저 할 건 거기까지 도달하는 거야.’
주변 사물들과 땅굴 파기를 적재적소에 활용한 용주는 적들의 시야각을 마술처럼 피해 갔다.
개 형태의 녀석들이 처음 곁을 지날 땐 용주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대비를 한다고 하긴 했지만, 어떤 결괏값이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녀석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갈 길을 가버렸다.
사거리에 도착한 용주는 굴을 파고 기다렸다.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3분마다 찾아오는 5초의 공백뿐.
한 걸음 전진하고 숨고.
또 한 걸음 전진하고 숨고를 반복한 용주는 사거리를 지나 끊어진 다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같은 대로로 이어진 두 가지 선택지 중 이곳을 택한 용주는 2단 점프를 활용해 빈 공간을 뛰어넘었다.
‘효과 범위가 충분해야 할 텐데.’
비방하는 해골을 꺼낸 용주.
해골을 다리 위에 올려놓은 용주는 다리를 다시 뛰어넘었다.
“야, 이 냄새나는 벌레 같은 놈들아! 집에서 가정 교육을 대체 어떻게 받았길래…!”
뒤쪽에서 비방하는 해골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고오오오.”
비방이 시작되자 잊힌 자들의 움직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움직이던 이들이 일제히 해골이 있는 다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주는 재빨리 ‘이끼 낀 썩은 나뭇가지’를 사용했다.
입고 있던 옷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고, 살구색이 돌던 손은 하얀 뼈만 남았다.
잊힌 자의 모습으로 변한 용주는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했다.
비방하는 해골의 효과로 대부분의 잊힌 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건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녀석과 잊힌 집합체뿐.
다섯이 나란히 뿜어내는 시야각 속으로 들어간 용주는 왼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해골에 반응하지 않는 이 녀석들.
다리가 뿌리처럼 변해 지면에 박혀 있었다.
이런 녀석이 양쪽 루트 모두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이라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쉽게 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좋았어.’
모든 시야각에서 벗어난 용주는 자연스럽게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건 하나.
마지막 대로를 지키고 있는 그 녀석뿐이었다.
대로에 들어선 용주는 잊힌 집합체와 마주했다.
용주가 볼 수 있다면, 당연히 녀석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녀석의 시야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처럼 낮았다.
‘저 녀석만 넘기면….’
걸음을 옮기려던 용주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감지했다.
저 앞에서부터 붉은빛이 차차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전혀 관찰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이변에 용주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용주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가장 상부에 있던 머리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가 관찰한 시간보다 한 사이클의 시간이 긴 녀석이 있었다고?’
그것 말고는 설명되는 답이 없었다.
‘빨리 굴을…!’
용주는 서둘러 땅굴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런데.
‘뭐야.’
굴이 파지지 않았다.
앙상한 뼈만 남은 자신의 손은 그냥 보도를 긁고 있을 뿐이었다.
용주의 시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해야.’
빛이 다가오는 속도를 계산해 봤을 때 10초 뒤면 시야각에 노출될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마음을 굳게 먹은 용주는 오히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거리 역시도 순찰을 도는 잊힌 자가 있었다.
용주가 흉내 내고 있는 건 지금은 자리를 비운 어떠한 자의 동선.
시간이 맞는지 어떤지.
그런 건 이제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용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녀석의 움직임과 동선, 그리고 시선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흉내 내는 것.
붉은 시야각 속으론 들어온 용주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붉은빛.
사라지는 시야각을 보며 용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들키진 않은 모양이네.’
마치 탈옥수가 마주한 경찰의 스포트라이트 같았다.
‘지나갔으니 다시 마주할 일은 없겠지.’
왼쪽으로 최대한 붙은 용주는 좌측에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첫 번째.
두 번째 머리가 눈을 감자 생긴 좁은 통로.
걸음을 옮긴 용주는 잊힌 집합체를 통과했다.
< 돌발 퀘스트 - ‘소리 없는 위령자’를 완료했습니다. >
▷ ‘수호자의 갑주 파편’를 획득했습니다.
- 잊힌 전설 속 영웅이었던 자의 갑주 파편입니다.
- ‘???’의 모습과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 ‘암살자의 뼛조각’을 획득했습니다.
- 잊힌 전설 속 영웅이었던 자의 뼛조각입니다.
- ‘???’의 모습과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 ‘죽음의 책’을 획득했습니다.
- 이름이 지워진 명부입니다.
- 사용 시 다음의 존재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 잊힌 집합체 1, 고문 바퀴 4, 잊힌 자 8.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대항력이 2 상승했습니다.
세 가지 아이템을 확인한 용주는 성수의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섰다.
지속시간이 끝난 용주의 모습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감옥처럼 촘촘하게 늘어선 가지들 사이로 한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성당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저택의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둘 다 저기 있나 보군.’
용주는 문을 살펴보았다.
손잡이의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저건….’
무언가를 발견한 용주는 넝쿨들을 뜯어냈다.
그곳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홈이 뚫려 있었다.
다섯 개의 잎을 가진 꽃의 형태.
‘친위대의 증표’를 꺼낸 용주는 홈에 증표를 맞췄다.
끼익.
낡고 투박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문 안쪽엔 짙은 안개가 가득 차 있었다.
‘해보는 수밖에.’
안개에 손을 올린 용주는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스킬들은 불통.
검에 달린 황금률도 효과가 발휘되지 않았다.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제한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징징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
안개의 안쪽은 상당히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넝쿨과 나무뿌리에 상당히 잠식되긴 했지만, 과거의 모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빛바랜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 교회에서 쓸 법한 기다란 나무 의자들이 수십 개 놓여 있었다.
2층엔 테라스도 보였다.
테라스에는 3개의 휘장이 걸려 있었는데.
양쪽의 2개에는 친위대의 증표와 같은 문양이.
중앙에는 종에 장식되어 있던 것과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형님. 오랜만에 누군가 찾아온 모양입니다.”
누군가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2층 테라스.
화려했었을 제복을 입은 사내는 아이언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적이냐? 아군이냐?”
훨씬 거친 누군가의 목소리.
“적인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테라스에서 일렁인 보랏빛이 1층 천장으로 떨어졌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이는 한 명의 기사.
“제거하겠다. 늘 그랬듯이.”
두 개의 사슬검을 휘두르는 잊힌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