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까드드득!
미믹어처가 만드는 소음이 계속되던 그때.
반지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균열은 삽시간에 반지 전체에 퍼져 나갔고, 유리창처럼 깨진 반지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사아아~!
반지가 파괴되자 잊힌 자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웅이 만들었던 자들은 물론이고, 해주석에 의해 나타나던 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툭!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땅에 떨어진 미믹어처도 같이 소멸해 버렸다.
용주에게 보이는 변화는 거기에 하나 더 있었다.
반지에 들어왔던 빛이 사라졌고, 대신 그의 팔에 감긴 10개의 링에 각기 빛이 들어왔다.
용주의 시선은 영웅의 머리로 향했다.
거기서 마주한 크고 선명한 빛.
거꾸로 뒤집힌 왕관에는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선명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두 개의 방패로는 창을 막아냈지만, 한 개의 방패로는 창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다른 곳을 노릴 필요는 없었다.
놈을 쓰러뜨리는 데 필요한 공격은 단 한 번.
저 왕관에 딱 한 방만 먹일 수 있으면 됐다.
“이 더러운 손으로 다시금 검을 잡고 싶지 않았건만.”
반지를 잃어버린 영웅이 오른손을 내리찍었다.
엄지와 검지가 바닥을 향한 이질적인 손동작.
팔찌에서 흘러내린 빛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빛을 움켜쥐는 잊힌 영웅.
잡초처럼 뽑힌 빛은 황금빛의 칼날이 되어 있었다.
“지면에서 검을 뽑아냈잖아?!”
“온다!”
지면에서 검을 뽑아낸 잊힌 영웅은 가까이에 있던 세 드워프를 먼저 공격했다.
“성검. 마신과는 상성이 안 좋은 물건이다. 마신. 여기선 피해 있어야 할 것 같다.”
누구보다 빠르게 검의 궤도에서 벗어난 울은 기둥과 기둥 사이 정중앙에 섰다.
“마신 비기. 인지 저하.”
벽에 바짝 붙어 정자세를 취하는 울.
숨조차 죽인 그의 모습은 처음부터 거기 있던 조각상 같았다.
콰앙!
이어지는 영웅의 일격.
우연인지 실력인지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울에게 닿지 않았다.
칼날의 사정거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타닥!
공격 타이밍에 맞춰 뛰어오른 용주는 영웅의 칼날 위에 올라탔다.
툭!
칼날을 발판 삼아 공중으로 한 번 더 도약한 용주.
자신을 잡으려는 영웅의 왼손을 보고 있던 용주는 잡히기 직전 한 번 더 도약했다.
‘이대로 타고 오르면….’
검지를 타고 오른 용주는 손등을 지나 그대로 손목으로 향했다.
팔등부터 어깨까지의 경사가 제법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가능할 거란 판단이 있었다.
그런데.
“!”
손목을 지난 용주는 순간 몸이 커다란 저항을 받는 걸 느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뒷걸음을 칠 수도 없었다.
붕 떠오르는 두 다리.
그대로 튕겨 나온 용주를 덮친 영웅의 왼팔은 지면을 끔찍하게 짓이겨 놓았다.
‘방금 그건 뭐였지.’
부서진 지면 사이로 비집고 나온 용주가 왼팔을 짚었다.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튕겨 나와 버렸다.
‘사건의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원인이라 짐작할 만한 건….’
저항을 느낀 건 손목에 감긴 첫 번째 링을 밟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는 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저 링.
만약 그렇다면 저 링들을 무력화하기 전까진 같은 일이 반복될 거란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쉽게 왕관까지 도달할 순 없단 건가.’
돌파에 필요한 한 손만 무력화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력화해야 할 링은 총 5개.
각각의 링에 10번의 공격을 적중시켜야 한다고 가정하면 결코 적은 공격은 아니었다.
“마스터!”
급하게 달려오던 조와 환의 모습이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양쪽 모두를 동시에 공격하는 잊힌 영웅.
타이밍에 맞춰 참격을 적중시킨 용주가 뒤쪽으로 날아갔다.
의도한 동작이 아니었다.
이건 불가항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움직임.
이걸로 추론이 확신에 좀 더 가까워졌다.
아까 날아갔던 건 저 링에 효과에 의해서였다.
“저주받을 이 몸에 위령받을 자격은 없다.”
잊힌 영웅이 뱉어낸 하얀 숨결이 지면을 덮었다.
공격을 사전에 감지한 용주는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영웅에게 시야를 고정한 용주.
툭!
그런 용주의 어깨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뭐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일이었지만, 용주에겐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왜냐면 자신이 머릿속에 그려둔 지도에서 여기 부딪칠 만한 건 없었으니까.
“…….”
용주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런 용주가 마주한 건.
당장 도술이라도 부릴 것 같은 자세로 굳어 있는 울이었다.
“너 언제 여기로 온 거냐.”
“마신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오른손 중지와 검지를 바짝 세우고 있던 울이 재빠르게 손을 바꿨다.
“결계다. 성검에 결계. 마신과는 극상성이다.”
“아… 그러냐.”
고개를 돌린 용주는 조와 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제대로 된 공격지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그래도 생각보단 일찍 무력화할 수 있을 거야. 우선 왼손에 공격을 집중할 수 있도록….’
“결계 무시하면 된다.”
생각을 정리하던 용주의 귀에 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계가 있으면 없는 곳으로 날아가면 된다. 그게 바로 마신의 공략법. 39.900원에 전국 서점에서 만나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장난 같은 마신의 이야기.
하지만 용주에게 팍하고 꽂힌 한 문장이 있었다.
‘결계가 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어.’
효과가 링에 접촉하는 걸로 나타난다면, 접촉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링에 닿지 않고 왕관이 있는 곳까지 날아갈 수만 있다면….
“그 책이란 거 조금 흥미가 가는데? 꽤 유용할지도 모르겠어.”
울을 바라본 용주가 씨익 웃어 보였다.
“마스터 할인으로 39.800원까지 할인 가능하다. 사인도 해준다.”
“그래. 출판 기대하지.”
할인율 0.25%.
귀가 의심될 정도의 할인율을 제안받은 용주는 다른 두 드워프들에게 달려갔다.
‘인스네어.’
용주의 손에서 떨어진 초록 가스가 빠르게 일대를 잠식해 갔다.
“이건 또….”
“우리가 접하지 못한 적의 공격인가.”
“아니.”
사주를 경계하고 있던 두 드워프의 대화에 끼어든 용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마스터!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이건 마스터가 하신 거군요!”
“그래. 그보다 너희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저와 이 아름다운 머슬들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고개를 끄덕인 용주는 두 사람에게 작전을 이야기했다.
쾅! 콰강!
잊힌 영웅은 녹색 지대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다른 방법을 간구한 영웅은 가로로 눕힌 칼날로 지면을 휩쓸었다.
후욱!
그 순간 가스를 뚫고 오른 하나의 투사체.
투포환처럼 쏘아 올려진 건 다름 아닌 용주와 조였다.
환의 힘을 빌어 발사된 두 사람 중 두 다리를 땅으로 향하고 있는 이는 조.
용주는 마치 목봉처럼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어리석구나. 공중에선 아무것도 피할 수 없거늘.”
왼손을 움직인 영웅은 그런 두 사람을 내리찍었다.
“마스터!”
다가오는 손을 올려다보던 조는 있는 힘껏 용주를 내던졌다.
손가락 사이로 튀어 오르는 용주.
영웅의 손바닥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조는 엄청난 속도로 추락해 버렸다.
‘신세를 졌군.’
충분히 예상했던 저항이었다.
그 정도 반응은 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대비했었다.
환의 역할이 로켓 발사대였다고 한다면.
조의 역할은 추진력과 각도를 보완해 줄 보조 엔진.
용주의 제안에 조는 흔쾌히 역할을 맡아주었다.
‘이제 남은 건….’
쩍 벌린 영웅의 입을 마주한 용주는 오른발로 공중을 디뎠다.
흐르는 하얀 숨결을 뛰어넘는 용주의 추가 도약.
예상했던 두 가지 저항을 차례대로 넘긴 용주는 영웅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단 일격에 산산이 조각나는 저주받은 왕관.
“끄윽! 크아아악!!”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른 잊힌 영웅은 밝은 빛을 뿜어내며 소멸했다.
▶ ‘???’을 쓰러뜨렸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1,000 소울을 획득했습니다.
▷ ‘양극성 저주 주머니’를 획득했습니다.
: 일정 시간 동안 대상이 된 자와 자신의 크기를 동일하게 만듭니다.
: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을지 정할 수 있습니다.
▷ ‘텐링’을 획득했습니다.
: 최대 10번의 공격을 흡수해주는 팔찌입니다.
▷ ‘피로 쓴 자결서’를 획득했습니다.
잊힌 영웅이 소멸하자 지면을 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져 갔다.
부서진 줄 알았던 방의 경계면에선 같은 재질의 타일이 보이기 시작했고, 빛을 잃어버린 수십, 수백 종류의 보석과 사치품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잊힌 영웅이 서 있던 곳엔 10개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계단 위에 있는 건 커다란 문 하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반대편 풍경이 보였다.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종.
빛바랜 황금색의 거대한 종이었다.
‘종….’
용주의 머릿속에 와인 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왕이 있는 곳에 가기 위해선 종을 쳐야 한다고 했다.
저기 보이는 게 분명 그 종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위령의 잔을 채운 용주는 문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점멸과 황금률에 걸렸던 제약이 해제되었다는 알림이 가장 먼저 용주를 반겼다.
용주가 서 있는 곳은 어느 높은 첨탑의 꼭대기였다.
종이 차지한 면적을 제외하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멋진 경치. 마신에게 어울리는 높은 자리다.”
첨탑 난간에 멋지게 올라선 울이 한껏 포즈를 잡아 보였다.
“신기한 기현상이군요. 문 하나를 끼고 이토록 다른 풍경이 나타날 수 있다니.”
“머슬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긴 조용하고 안전하다고.”
“…….”
두 사람의 목소리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용주는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이곳.
이 풍경.
상당히 낯이 익었다.
‘여기 아무리 봐도 거기잖아.’
저 멀리 첫 번째 기사와 전투를 벌였던 장소가 보였다.
왕의 보좌관을 만났던 다리 역시도 정확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내려다보는 높이만 조금 더 높아졌을 뿐, 여긴 와인 기사가 있는 바로 그 성당이었다.
‘종이 있는 게 그 성당의 꼭대기였다니. 등잔 밑이 어둡군.’
뒤돌아선 용주는 종을 살펴보았다.
종의 외형은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다.
다른 종들과 다른 게 있다면 표면에 드래곤의 모습을 형상화한 어느 가문의 문양이 찍혀 있단 것 정도.
‘그런데 이 종, 어떻게 치는 거지?’
이 정도로 거대한 종이라면 종을 칠 별도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무언가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과 이어진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런 원리도 아니라고 추측되었다.
“이 종. 한번 쳐 줄 수 있겠나?”
두 드워프를 바라본 용주가 물었다.
그들의 선천적인 신체적 특성과 우월한 신체 능력이라면 어떻게 칠 수 있지도 않을까 싶었다.
“물론입니다!”
자신 있게 대답한 두 드워프가 있는 힘껏 종을 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강적이군요. 이렇게 되면 조금 거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짧은 도움닫기 끝에 뛰어오른 환이 그대로 종에 부딪혔다.
반동에 튕겨 나오는 환.
철문을 부숴 버렸던 그의 돌진이었건만, 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론 안 되는 건가.’
사후 강직과 스팀팩을 사용하면 용주 스스로도 제법 큰 충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황금률을 사용해 당목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방법으로 이 종을 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환이 전력으로 부딪쳤을 때 당연히 나야 할 기본적인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마신, 내려가는 길 만들었다. 일단 내려가서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느샌가 자리를 옮긴 울이 바닥으로 사라졌다.
원형으로 뚫린 공간엔 나무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환과 부딪치며 아래로 추락할 뻔했던 게 공포심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마신 녀석, 혼자 멋대로!”
“어떻게 할까요? 마스터?”
“…내려가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사다리를 짚었다.
종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자.
일단 이 아래 있는 그 녀석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혹시 뭔가를 더 말해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