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정복했도다. 나의 이름으로. 빛을 남겼도다.”
빛의 길 끝에 도착한 울이 두 발을 바짝 붙였다.
태양을 보며 꼿꼿하게 뻗은 양팔.
완벽한 ‘Y’자를 그린 울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울이 뭘 하든 크게 관심을 주지 않은 용주는 한 발판 앞에 섰다.
네 개의 기둥에 둘러싸인 발판이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용주는 발판에 발을 올렸다.
발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중 전부를 실은 용주가 발판에 올라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발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 한번 올라와 봐 주겠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조와 환을 보며 용주가 이야기했다.
“넷!”
신속하게 움직이는 조.
그가 올라서자 발판은 서서히 아래를 향했다.
“음…. 뭔가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주위를 살펴본 환이 이야기했다.
“역시 부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통째로 드러내야…!”
“아니. 그러지 마.”
아까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한 용주는 반대편 언덕을 가리켰다.
“맞은편에 비슷한 장치가 하나 더 있다. 그거까지 작동시켜야 다리가 내려갈 거다.”
“그렇군요. 그럼 어서 움직입시다. 저희가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조의 발언.
표정을 숨긴 용주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연히 움직일 생각이다. 다만, 움직이는 건 나를 포함한 2인. 나머지 둘은 여기에 있어 줘야겠다.”
“어째서입니까?”
발판에서 내려간 용주는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가 발판에서 내려가자마자 발판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보다시피 발판은 누르고 있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두 개가 동시에 눌려야만 그 상태가 유지되지.”
“그렇군요.”
“그리고 발판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적어도 너희 중 한 사람이 올라가 줘야 한다. 내 무게론 작동하지 않는 것 같거든.”
“무게는 곧 근육의 무게. 운동이, 머슬이 부족하시군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저의 이 환상적인 근육들로 이 돌을 사로잡고 있겠습니다.”
당당하게 발판 위에 올라선 환이 차례대로 세 개의 동작을 선보였다.
사이드 체스트.
다른 건 몰라도 그 동작 하나 정도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럼 제가 동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여긴 환과 울 두 사람에게 맡겨두고.”
“아니, 미안하지만 데려갈 사람은 정해 뒀다.”
조의 의견에 반대 의사를 내비친 용주가 울을 가리켰다.
울은 아직도 태양 만세를 하고 있었다.
셋 중 울을 지목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제일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을 여기 남겨둘 바에야, 그냥 안고 가는 게 뒤가 구리지 않겠지.
‘환을 혼자 여기 두는 것도,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말이야.’
“그러시군요. 다녀오십시오! 책임지고 자리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래. 다리가 완전히 내려오면 환과 같이 다리 앞으로 와라. 거기서 만나는 걸로 하자.”
“넷! 알겠습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울에게 다가갔다.
“가자. 백날 그러고 있어 봐야 아무것도 안 나온다.”
무심한 듯 옆을 스쳐 가며 하는 용주의 이야기.
“나의 에너지, 태양에게 나눠줬다. 충분히 줬으니 당분간은 걱정 없을 거다.”
처음보다 팔이 많이 내려온 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바꾸었다.
* * *
“음. 마신 갑자기 배가 아프다. 정말 원통하게도 잠시 배를 움켜쥐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반대편 언덕에 도착한 울이 털썩 주저앉았다.
용주가 걷는 길만을 정확히 쫓던 울이었다.
그가 주저앉은 건 용주의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
비슷한 듯 다르게 생긴 비석의 앞엔 십자 모양으로 배치된 다섯 개의 발판이 있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발판 위에 올라섰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를 가진 이쪽 발판은 용주의 몸무게에도 작동을 했다.
발판이 눌리자 한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회색을 띠던 발판이 지금은 흰색을 띠고 있었다.
용주의 시선은 앞쪽에 있는 비석을 향했다.
비석엔 크게 6개의 구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채워야 하는 색깔은 6개. 순서대로, 하늘, 주황, 초록, 보라, 자주, 옅은 노랑.’
용주는 가운데 발판을 제외한 4개의 발판을 차례대로 밟아보았다.
똑같아 보이던 발판은 제각각의 색을 숨기고 있었다.
흰색, 노랑색, 파란색, 빨간색.
이 4개의 색을 조합해 순서대로 6가지 색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이 주변엔 아까 봤던 것 같은 함정은 없다. 안심해도 돼.”
용주가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살살 눈치를 보고 있는 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법처럼 통증이 가셨다. 이제 움직일 수 있다.”
당당한 울의 발걸음.
정중앙의 발판에 선 울은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렸다.
하늘 높게 든 두 팔로 완성시킨 뒤집힌 ‘Y’.
시옷이나 사람 인(人) 자처럼도 보이는 동작을 선보인 그는 이번에도 태양을 보고 있었다.
“나의 에너지로도 다리가 내려오지 않는다. 마신의 힘에 저항하다니, 놀라운 힘이다. 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는다. 내가 왜 마신인지….”
“…됐으니까 그만하고 거기 서 봐.”
요가 동작인지, 무슨 의식인지 모를 울의 행동을 지켜보던 용주가 한 발판을 가리켰다.
“알겠다, 마스터. 그래도 보증에 사인은 안 된다.”
걸음을 옮긴 울이 용주가 가리킨 발판에 섰다.
각기 들어온 흰색과 파란색.
두 발판이 빛을 발하자 석판의 가장 아래 칸에 불이 들어왔다.
첫 번째 칸에 채워진 색은 하늘색.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워졌다.
‘좋아. 다음은….’
용주는 차례차례 색을 채워 나갔다.
빨간색과 노란색을 섞어 주황색을 만들었고.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어 초록색을 만들었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어 보라색을.
빨간색과 흰색을 섞어 자주색을.
마지막으로 노란색과 흰색을 섞어 옅은 노란색을 만들었다.
모든 불빛이 들어오자 올라갔던 다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디오스. 좋은 승부였다.”
오른손을 높이 들어 보이는 울.
어느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동작을 지켜보던 용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완전히 내려와 있었다.
* * *
다리를 건너온 용주는 요새를 마주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보입니다.”
철문의 상태를 살피던 조가 이야기했다.
“머슬의 강도는 곧 힘의 크기. 맡겨만 주시면 길을 열어 보겠습니다.”
환이 자신감을 표했다.
‘그래도 일단은 밑져야 본전인가.’
딱히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실패한다고 해서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그만.
용주는 한번 기회를 줘보기로 했다.
“그래. 그럼 한번 맡겨 보지. 자랑하던 그 근육의 위력을 보여달라고.”
“당연하디당연하지요! 잘 보고 계십시오. 이 탄탄한 근육을, 머슬이 만드는 하모니를!”
격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환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힘찬 도움닫기로 뛰쳐나가는 환.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린 환은 전력으로 철문에 부딪혔다.
콰앙~!!
울려 퍼지는 소리와 진동.
그렇게 시끄럽던 물소리까지 집어삼킨 소리는 종소리처럼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아무래도 완전히 허세였던 건… 아니었나 보네.’
뭔가 대단하거나 특별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뭐를 기대했어도 그 이하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건 단순무식하고, 1차원적인 해석의 돌파였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결과만은 확실했다.
철문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환이 돌진한 모양 그대로 말이다.
“후후훗! 환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지. 이것은 모두 마신의 힘! 마신의 가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환이 만든 결과물에 울이 재빨리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냐.”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용주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끼익!!
그 순간,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구멍 뚫린 철문이 닫힌 채로 점점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문은.
이쪽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방금 그 충격에 고정하고 있던 이음새들이 망가진 건가?’
“뛰어!”
판단과 동시에 외친 용주가 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을 덮치는 거대한 철문.
작은 지진을 일으키며 넘어진 철문의 머리 위엔 아슬아슬하게 탈출에 성공한 세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마신의 예지력. 마신의 판단력. 마신의 행동력. 이것이 바로 나. 마신.”
뒤늦게 팔짱을 낀 울이 여유로운 척 이야기했다.
“그래. 굉장하긴 하군.”
당연히 그 여유가 가짜란 걸 용주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지금 한 말은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뛰어’라고 말하고 뒤돌아선 그 순간.
울은 벌써 뛰고 있었다.
조보다도 빨랐고, 자신보다도 앞섰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순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지력은 몰라도, 판단력과 행동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위기 상황에서만 나온다는 게 조금 문제지만 말이다.
성 안으로 들어선 용주는 내부구조를 살펴보았다.
성은 외성 안에 내성이 또 하나 존재하는 구조였다.
성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깔끔했다.
원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문과 창문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내성 안으로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외성의 성벽을 타고 걸은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내성으로 통하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성벽, 성벽, 성벽.
어딜 가도 성벽만 계속될 뿐이었다.
지금까지 성 안에서 찾은 거라곤 여기저기 널린 두개골과 뼛조각들뿐.
온전한 형태를 가진 잊힌 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형태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성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방법이지만, 이곳의 모습에도 의문이 들었다.
뼈는 몇 군데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돌탑처럼 쌓아 놓은 게 상당히 인위적이었다.
“저길 보십시오! 저기 뭔가 있습니다!”
수색을 계속하던 그때.
조가 외쳤다.
용주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안쪽으로 유독 돌출된 넓은 평지에 커다란 횃대가 있었다.
‘횃대라….’
공터에 들어선 용주는 횃대 주변을 유심히 관찰했다.
돌바닥에 날카로운 발톱이 긁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비행능력을 갖춘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가?’
횃대가 있다는 건 그런 예상을 가능하게 해줬다.
문제가 있다면, 이곳에 이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게 아직도 유효한 이동수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부를 무언가가 없다면 이용은 불가능했다.
“마신은 답을 알고 있다. 마신이 나눠줬던 태양의 힘을 지금 사용할 때인 거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울은 태양을 향해 다시 만세를 불렀다.
변화는 전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 팔은 아까보다 주기가 훨씬 짧아져 있었다.
“마스터! 저기 누군가 있습니다!”
다른 곳을 살피던 조가 외쳤다.
잊힌 자들이 있었다.
갑옷을 입고 검을 들고 있는 자들.
그들이 있는 곳엔 동화 속 마녀가 썼을 법한 거대한 솥이 하나 있었다.
‘혹시 그런 건가….’
딱 한 가지, 퍼즐에 맞춰지는 그림이 있었다.
탑처럼 쌓인 뼈.
깨진 창문과 강제로 뜯긴 문.
고립되어 있는 성.
거대한 솥.
여기서 있었던 일은 말로 표현하기에도 끔찍한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뭣들 하고 있는 거지?”
“불 꺼진 솥에 들어갔다 나왔다. 다 빠진 이빨로 솥을 씹고 있는 뼈다귀도 있군요.”
“역시 두 사람, 마신 없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두 사람의 의문에 울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딱 보면 알지. 스스로를 희생해 사골을 우려내고 있는 거다. 살신성인, 철분에 철분 얹기.”
“그렇다기엔 물이 없는데?”
“불도 없고.”
“마신 눈엔 보인다. 마신 눈에만 보이는 거다.”
“…….”
울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버린 용주는 조금 더 현상에 집중했다.
잊힌 자는 총 넷.
그중 혼자 다른 무장을 하고 있는 자는 소라 고동으로 만든 나팔을 목에 걸고 있었다.
‘나팔이라….’
몇 분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잊힌 자들은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이곳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계단.
“따라와.”
목소리를 낮춘 용주는 커다란 구유 뒤에 몸을 숨겼다.
달그락! 철그럭!
횃대 앞에 도착한 잊힌 자들.
소라 고동을 움켜쥔 잊힌 자는 있는 힘껏 나팔을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