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쿠구구궁!!
거친 마찰을 일으킨 기사의 맹진.
기사의 목을 밟은 용주는 진행 방향과 반대되게 뛰기 시작했다.
강렬한 마찰에 일어나는 반동은 결코 작지 않았지만, 용주는 중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몸통과 엉덩이 부근을 지난 용주는 기사의 잘린 다리 쪽으로 뛰어내렸다.
용주의 칼날엔 검은 먹물이 묻어 있었다.
‘그런 건가.’
지면에 착지한 용주는 조금 전 상황을 되짚었다.
머리와 어깨, 몸통에 이르기까지 어딜 베어 내도 베었다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본체가 따로 있고, 보이는 건 어떠한 원리로 투영된 실체가 있는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기사의 몸 곳곳을 베며 그것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의 특정 몇몇 지점을 베어 낼 때는 베는 감촉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확인한 지점은 총 다섯 군데.
등에 돋은 네 개의 팔과 잘려 나간 한쪽 다리였다.
순간 영혼 상점에서 봤던 ‘점을 보는 눈’이란 보조 스킬이 떠올랐다.
빛의 형태로 약점을 보여준다는 스킬.
그런 게 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약점이 아니라고 해도, 들어가는 데미지가 0인 건 좀 선을 넘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지만… 따져봐야 뭐 하겠는가.
어차피 들어줄 사람도 없고, 듣는다 한들 바뀌는 것도 없을 텐데.
키이익!!
인스네어의 범위를 빠져나간 기사는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멈춰 섰다.
등 뒤에 자라난 네 개의 팔로 땅을 짚는 기사.
기괴한 동작으로 방향을 튼 기사는 다시금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공략에 가장 적합한 위치….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기겠지.’
왼쪽으로 내달리던 용주는 90도로 방향을 틀었다.
최대한 길게 사용한 점멸.
기사의 가랑이 사이에서 나타난 용주는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황금으로 채워지는 거대한 말뚝.
순식간에 방향을 꺾은 기사는 메이스를 내리쳤다.
정통으로 가격당한 황금의 말뚝은 지면에 깊게 박혀 버렸다.
‘하나는 됐고….’
빠르게 거리를 벌린 용주는 기사의 다음 돌진을 기다렸다.
그에 호응하듯 돌진해 오는 기사.
속도를 높이던 기사의 움직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쿵! 쿵!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날뛰고 있는 기사.
고개를 돌린 기사는 자신의 하나 남은 발을 바라보았다.
치리링~!!
발목과 무릎 두 부위에 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슬의 끝이 연결되어 있는 곳은.
아까 자신이 박아 넣었던 그 말뚝이었다.
등 뒤에 자라났던 기사의 팔들이 사슬을 풀어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팔이 굽어지는 방향과 각도.
신체 구조상 네 팔로는 다리에 감긴 사슬을 제대로 겨눌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기사는 결국 몸을 돌렸다.
용주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시야.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용주는 기사의 네 개의 팔 사이에 섰다.
‘할퀴기,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맹독.’
동시에 발동한 두 개의 스킬에 생겨나는 맹독의 손톱.
네 개의 팔에 차례대로 상처를 만들어낸 용주는 오른쪽 앞 팔이라 할 수 있는 팔을 집중적으로 노리기 시작했다.
용주의 뺨에 흩뿌려지는 검은 먹물.
기사의 팔들은 용주를 잡기 위해 움직였지만, 한 치의 위협도 줄 수 없었다.
다리와 마찬가지로 이 중심부 역시 완전한 사각지대.
갈기갈기 찢겨 잘려 나간 팔 하나는 그대로 지면에 떨어졌다.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느린 저음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기사는 메이스로 자신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깡통처럼 점점 찌그러지는 그의 다리.
고통스러운 내색 하나 없이 자신의 다리를 뭉갠 기사는 사슬에서부터 자유를 되찾았다.
“말을 하고, 숨을 쉬어도 전부 죽은 거야. 산 자는 없어.”
두 팔과 허벅지로 기어 움직인 기사는 갑작스럽게 몸을 뒤집었다.
세 개의 팔을 다리 삼아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기사.
마치 꼽등이처럼 뛰어오른 기사는 있는 힘껏 지면에 충돌했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사후 강직의 효과로 충격을 받아 낸 용주는 공격을 이어 갔다.
노리는 건 오른쪽 뒤쪽에 자리한 팔.
맹독이 더해진 손톱은 확실하고 착실하게 데미지를 누적시켜 나가고 있었다.
쿵! 쿠구궁!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용주를 으깨려는 기사의 도약.
그리고 그런 기사를 쓰러뜨리려는 용주의 발악.
타협 없는 전투를 계속하는 두 사람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콰랑! 콰라라랑!!
강렬한 쇳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기사.
오른쪽 두 개의 팔을 모두 잃은 기사는 무게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하아…. 하아….”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기사.
대자로 뻗은 그의 손에서 메이스가 떨어졌다.
목이 변형되어 똑바로 눕지 못하는지, 그의 머리는 앞이 아닌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원한 얼음 포도주 한 병이 그립구나.”
나지막한 한마디를 내뱉은 기사.
하얀빛을 내뿜은 그는 빛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 ‘???’를 쓰러뜨렸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350 소울을 획득했습니다.
▷ ‘도르래 레버’를 획득했습니다.
▷ ‘찢긴 도면 37’을 획득했습니다.
위령의 잔을 꺼낸 용주는 그가 남긴 빛을 담았다.
얻은 아이템은 소울을 제외하면 2가지.
도면을 펼친 용주는 도면을 살펴보았다.
어떤 다리에 대한 설계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까 보좌관을 만났던 그 다리에 대한 설계는 아니었다.
여기 그려져 있는 건 열리는 다리.
배가 다니는 길에 놓인 그런 형태의 다리였다.
설계도의 양쪽엔 다리를 여닫을 방법과 특정 장치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도면을 집어넣은 용주는 레버를 움켜쥐었다.
도면은 어디에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걸 어디에 써야 할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합판에 올라선 용주는 도르래에 레버를 꽂았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편리함은 없었다.
이건 손으로 돌린 만큼 작동하는 방식.
레버를 잡은 용주는 도르래를 돌리고 또 돌렸다.
느리긴 했지만, 도르래는 꾸준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쿠궁!
최상층에 도착하자 작은 흔들림이 일었다.
안정적으로 고정된 발판.
반복해서 안전을 확인한 용주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어둡고 눅눅한 터널 속 위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묵묵히 계단을 오른 용주.
정상에 선 용주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어디서 본 듯한 풍경들이었다.
‘그게 이쪽으로 이어져 있던 거냐….’
층층이 쌓인 촛불들과 중심에 피워진 화톳불.
저 위쪽에 보이는 왕의 의자까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여긴 와인 기사가 있던 그 성당이었다.
▷ ‘생명의 화로’를 이용하시겠습니까?
화톳불 앞에 앉은 용주의 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용주의 이번 선택은 YES.
삽시간에 화톳불을 에워싼 안개는 주변 풍경을 지워 버렸다.
‘회복 속도는 대략 이 정도인가.’
HP와 MP.
양쪽 모두 회복되고 있었다.
HP 회복은 물어뜯기나, 시체 뜯어먹기보단 느리고, 재생보단 빠른 정도.
MP 회복은 자연회복량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수준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그건 구입해 둬서 손해 볼 건 없겠어.’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생긴 막간의 시간.
영혼 상점을 연 용주는 ‘점을 보는 눈’이란 보조 스킬을 우선 구매했다.
▷ ‘점을 보는 눈’을 구매했습니다.
- 적의 약점이 빛의 형태로 표시됩니다.
알림이 하나 나온 것 외에 특별한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거나, 소울이 줄어들지 않았다면, 배웠는지조차 의아했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자 HP와 MP가 모두 회복되었다.
하지만….
‘역시 최대 HP는… 이렇게 해도 회복되지 않는 건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바람 정도는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와인 기사를 만나는 것보다 더 우선시해 봤던 거였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풀로 회복된 HP의 최대치는 여전히 100이 아니었다.
화톳불을 나선 용주는 계단을 올랐다.
왕의 의자에는 여전히 와인 기사가 있었다.
그는 누워 있지 않았다.
똑바로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
와인기사의 모습을 확인한 용주는 한 가지 특이점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기사의 아킬레스건 부위에서 빛이 보였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개의 작은 빛.
아무래도 저게 점을 보는 눈의 효과인 모양이었다.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허리라도 배겼나 보지?”
용주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그사이에 그가 없어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용주였다.
“나~.”
용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와인 기사가 와인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촤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와인을 흩뿌렸다.
용주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와인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히히힛! 얼음 없는 얼음 포도주야. 시원하진 않지만, 그걸로 봐달라고.”
용주에게 와인을 뿌린 와인 기사가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
시원하게 와인을 선물 받은 용주는 눈가를 쓸어내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이었지만, 용주의 머릿속에 걸리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얼음 포도주.
그건 미궁을 설계했던 기사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던 말이었다.
“너… 설마 듣고 있었던 거냐?”
물으면서도 스스로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와인을 뿌릴 이유도.
저런 말을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나~ 들어? 뭘 들어? 아~ 이거 들고 있었었냐고? 그럼 들고 있었지.”
순식간에 풀어진 와인 기사의 자세.
헬멧의 틈으로 와인을 들이부은 기사가 해롱거렸다.
자기 집 안방이나 되는 양 뒹굴뒹굴 구르던 와인 기사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히히힛!”
갑작스러운 그의 웃음.
“왕의 보좌관이 굴욕을 맛본 게 얼마 만인지 몰라. 딸꾹! 쥐구멍 앞에 앉은 고양이 신세라니.”
혼잣말을 중얼거린 와인 기사는 뽀득뽀득 와인병을 닦기 시작했다.
“…….”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고, 듣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사실을 그는 다 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왕의 보좌관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다.”
“히히힛! 왕의 보좌관을 문다고? 쥐인 줄 알았더니 개인가 보네. 그거 재밌겠어. 나도 구경시켜줘.”
진지한 물음에 돌아온 실소 섞인 대답.
“나~?”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와인 기사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입 냄새. 방구 냄새, 겨드랑이 냄새. 안 좋은 냄새 나. 하수도 냄새야. 100만 년 동안 안 씻은 보좌관 냄새야.”
코를 틀어막는 시늉을 한 와인 기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의문을 삼키는 용주에게 와인병을 들이미는 와인 기사.
“냄새야! 냄새! 아주 고약한 냄새!”
뭐가 그리 신이 난 건지 폴짝폴짝 뛰는 와인 기사의 모습.
그의 모습을 보던 용주는 그가 여길 잘 봐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병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용주.
딱히 특이한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뭐야….’
순간 뭔가 이질적인 걸 감지한 용주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바람에 머리가 살랑거리며 보였던 이질감.
그 실체를 마주한 용주는 말이 없었다.
관자놀이에 가까운 이마의 좁은 부위가 다른 곳과 달랐다.
얼핏 보면 커다란 딱지가 앉은 것도 같았지만, 딱지는 아니었다.
왼손을 가져간 용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을 짚었다.
피부도, 체온도 없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건 단단하고 차가운, 소름 끼치는 감촉.
마치 해골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섬뜩함이었다.
“냄새 싫어. 불쌍해. 마침 나한테 하나 남은 게 있으니까, 이거 줄게.”
의자 아래쪽에 숨겨져 있던 공간을 연 와인 기사는 조그마한 와인병 하나를 건넸다.
코르크 마개도 따지 않은 새 와인.
와인을 내민 기사는 가져가란 듯 병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