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닉네임 좀비헌터-153화 (153/357)

153화

‘여기도 마찬가지로 규칙성은 있어.’

시간도, 시야도 제한되어 있었지만, 반복된 관찰은 그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마지막 1/3 정도의 지점은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그전까지의 규칙성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움직일 수 있는 곳까진 움직여 볼까.’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이기 시작한 용주는 불기둥을 등진 채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하는 건 가로로 왕복 운동을 하는 세 개의 고문 바퀴.

대각선으로 그 중간을 관통하는 고문 바퀴가 하나 있었기에 신경 써야 했다.

‘그다음은….’

용주가 원하던 위치에 도착하자 뒤쪽에서 비춰오던 빛이 사라졌다.

불기둥이 사라지며 찾아온 암전.

주변에서 들려오는 고문 바퀴의 소리는 위협적이었지만, 용주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빛이 없는 상황은 익숙.

심지어 예상 가능한 암전이었기에, 충분한 대비도 구상해 놨다.

드르르륵!

기다리던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앞으로 네 걸음.’

어둠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용주.

앞이 보이는 것처럼 움직인 용주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우측으로 세 걸음.’

5초간 멈춰 섰던 용주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불빛과 별개로 계속되는 용주의 걸음.

또다시 찾아온 암전 속에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용주는 코앞을 지나는 진동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회전하기 시작한 용주의 몸.

고문 바퀴의 옆면에 매달린 용주는 또다시 숫자를 세었다.

고문 바퀴의 움직임이 멎은 한순간, 손을 놓은 용주.

용주의 앞에 멈춰 있던 고문 바퀴는 자신이 왔던 곳을 향해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진 오케이….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인데.’

자리에 멈춰 선 용주는 어지러움이 가시길 기다렸다.

여기라면 괜찮았다.

어떤 고문 바퀴의 영향도 받지 않는 완벽한 안전 지대였으니까.

‘여섯… 일곱….’

소리의 중심에서 정확한 숫자와 동선을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나온 소리와 진동들을 걸러 내며 최대한 새로운 것들에 집중하는 용주.

몇 번의 검증을 거치고서야 한 블록을 전진한 용주는 마찬가지의 과정을 또 한 번 거쳤다.

용주의 전진은 빠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정확했고, 확신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출구의 빛.

불과 몇 걸음만을 남겨두고 멈춰 선 용주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 앞에 있는 고문 바퀴… 지금까지의 다른 것들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고문 바퀴들은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봤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이 고문 바퀴들은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탈곡기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뭐… 상관없나.’

점멸을 사용한 용주는 그대로 바퀴를 관통했다.

가로로 놓은 수많은 고문 바퀴들 중 작동하지 않거나, 이빨이 빠진 자리가 있을 수도 있었다.

작동을 멈출 장치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 돌발 퀘스트 - ‘잊힌 미궁’을 클리어했습니다. >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대항력이 1 상승했습니다.

▷ 300 소울을 획득했습니다.

▷ ‘???의 의족’을 획득했습니다.

다시금 빛을 마주한 용주의 앞에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보상으로 들어온 건 대항력과 소울.

그리고 누군지 모를 인물의 의족이란 아이템이었다.

▷ ???의 의족

- 지하 미궁을 설계한 자가 사용하던 의족.

- 설계자만이 알 수 있는 지름길을 이용해 설계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준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한 용주는 의족을 손에 쥐었다.

의족엔 검은 먹물 같은 게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미궁의 설계자?’

제대로 단서를 찾았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던 그 기사와 마찬가지로 설계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그도 퀘스트에서 원하는 잊힌 영웅 중 한 사람이란 소리였다.

‘안내해 주는 건 좋은데, 어떻게 사용하란 거지?’

의문 속에서 용주는 일단 의족의 효과를 발휘했다.

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하는 의족.

변화를 감지한 용주는 의족을 내려놓았다.

토끼뜀을 하듯 폴짝폴짝 뛰어가는 의족.

용주는 의족의 뒤를 쫓았다.

의족을 따라 이동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용주는 한 어두운 통로에 들어서 있었다.

의족은 저 앞에 서 있었다.

‘멈췄잖아?’

의족의 역할은 설계자에게까지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설계자가 있는 곳이라고 여기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여긴….

사방이 꽉 막힌 막다른 길이 아닌가.

‘왜 멈춘 거지? 왜 여기로 안내한 거고?’

용주는 다시금 생각을 정리했다.

결과가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계자만이 알 수 있는 지름길…. 분명 그걸 이용하게 해준다고 적혀 있었지.’

지금까지 지나온 루트를 생각해 보면, 딱히 설계자만이 알 수 있는 길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딱히 숨겨져 있다는 느낌도 아니었고, 잊힌 자들도 간혹 마주쳤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설계자만이 아는 길에 가장 가까운 건 지금 있는 이곳이긴 했다.

만약 자신이 혼자였다면, 아까 그 길에서 이쪽으로 들어서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길이 있는 거로 보이진 않는데….’

세 사람 정도가 같이 걸을 수 있는 폭을 가진 통로는 막다른 길인 걸 제외하면 딱히 다른 곳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특이점이 있다고 하면….’

통로 끝에 보물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물건이었다.

‘저기 뭔가 있단 건가?’

그나마 그게 제일 합리적인 추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밀 통로를 이용하기 위한 열쇠라든가 뭐, 그런 게 들어 있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의족과 나란히 섰다.

보물 상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용주.

“……?”

보물 상자를 향하던 용주의 움직임이 급하게 멈춰 섰다.

‘뭐였지?’

미세하지만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었다.

쥐나 벌레가 만든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이건 상자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소리.

쥐나 벌레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린 용주는 떨어져 있던 돌조각 하나를 주웠다.

있는 힘껏 돌조각을 던지는 용주.

보물 상자의 뚜껑을 때린 돌조각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덜컥!!

그 순간 일어난 격렬한 변화.

“게레레레~!!!”

폭발하듯 열린 보물 상자에서 기다란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미믹.

보물 상자로 위장하고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저건 또 뭐야….’

미믹을 마주한 용주는 녀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자의 안쪽은 분홍색을 띠고 있어 마치 입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외곽을 타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수십 개 자라나 있었으며, 기분 나쁠 정도로 긴 혀에선 침이 뚝뚝 떨어졌다

폴짝폴짝 뛰기 시작한 미믹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안에 뭐가 있던 게 아니다. 그럼 왜 여기 멈춰 섰던 거지?’

검을 고쳐잡는 용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던 용주는 머지않아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미믹에게 막혀 있던 벽면에 작은 입구가 보였다.

‘그래. 그런 거였군.’

미믹을 향해 달려 나간 용주는 점멸로 녀석을 관통했다.

상자의 이음새에 검을 욱여넣는 용주.

미믹은 뒤로 돌기 위해 쿵쾅거렸지만, 대각선으로 껴버린 몸은 그 이상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콰직!

레버를 잡듯 검을 움켜쥔 용주는 그대로 미믹을 가로로 갈랐다.

위아래가 분리된 미믹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미믹’을 쓰러뜨렸습니다.

▷ 100 소울을 획득했습니다.

▷ ‘미믹어처’를 획득했습니다.

-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미믹을 소환합니다.

- 미믹은 처음 문 대상을 죽거나 죽일 때까지 씹습니다.

미믹이 쓰러지자 의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의족.

길 끝에서 마주한 정사각형의 로비엔 거대한 석조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안개가….’

살짝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론 안개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용주를 여기까지 안내해 준 의족은 안개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개를 뚫고 들어온 용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있어야 할 게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의족이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입구의 반대편에 도착할 때까지도 의족은 찾을 수 없었다.

방의 벽과 천장까지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다 살펴본 것 같건만, 설계자라는 자 역시도 보이지 않았다.

‘음….’

고개를 갸웃한 용주는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거라면 역시 세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한 나무 도르래.

삐걱거리는 합판에 올라선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르래가 지나는 길을 따라 횃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도르래는 상당히 높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처음으로 올라갈 만한 루트를 찾긴 했는데….’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거두어야 할 잊힌 영웅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어이가 없다, 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이건?’

도르래를 작동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르래엔 동그란 홈이 하나 파여 있었다.

추측건대 수동으로 이걸 돌릴 수 있게 설계된 구조인 듯 보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그 손잡이 부분이 뿌리째 뽑혀 사라져 있었다.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긴 한데….’

황금률을 이용하면 두 번째 문제는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의족의 안내는 분명 이곳이었어. 여기 어딘가….’

뚜벅! 치리리링…!

용주가 뒤로 돌아선 그때.

거대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뭐지?’

발소리에 이어서 들려오는 철이 쓸리는 소리.

카오스 게이트에서 들었던 워커가 내던 소리와도 얼핏 비슷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이건 기는 소리가 아니라, 걷는 소리였다.

도르래에서 내려온 용주는 소리의 근원에 집중했다.

소리의 방향은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

계단에 바짝 붙은 용주는 석조 문을 주시했다.

드르르륵…!

서서히 열리는 석조 문.

석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의 모습에 용주는 미간을 좁혔다.

기사의 키는 족히 3m는 됐다.

그런데 그건 서 있는 키가 아니었다.

두 팔로 땅을 짚으며 걷는 기괴한 움직임의 기사.

철로 만든 아르마딜로처럼 웅크리고 있는 기사의 한쪽 다리는 잘려 나가고 없었다.

“네가 그 의족의 주인인가 보군.”

용주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없어….”

그에 돌아온 메마른 목소리.

“물도… 식량도… 희망도 없어.”

기사는 고통스러운 듯 메이스를 휘둘렀다.

“나갈 수 없어. 우린 다 죽었어.”

기사의 등을 뚫고 나온 네 개의 팔.

철갑을 두른 팔들은 각각 하나씩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대화는 그른 것 같은데.’

용주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기사.

한걸음에 계단을 뛰어 내려온 용주는 그에게 마주 돌진했다.

우월한 리치를 이용해 선제공격에 나선 기사.

‘공격의 순서는 오른쪽에서부터 시계 방향.’

네 개의 중식도가 그리는 검격들을 차례로 피해낸 용주는 왼쪽으로 크게 물러났다.

오른 어깨를 땅에 부딪친 기사는 지면을 비비며 거친 돌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갑옷이 일으키는 마찰에 불꽃이 튀었고.

그가 지난 자리엔 빨갛게 잔흔이 남아 있었다.

‘돌진하는 순간만은 속도가 빨라지는가 보군.’

속도의 차이가 극단적이었다.

적어도 돌진하는 순간엔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순식간에 방 끝까지 돌진했던 기사는 다시금 용주를 향해 돌진해 왔다.

하나 남은 다리로 마찰을 일으키는 기사.

두 손으로 메이스를 움켜쥔 기사는 미끄러지며 메이스를 내다 꼽았다.

‘인스네어.’

그와 동시에 퍼져 나가는 녹색 가스.

쿠룽!

메이스로 한 번 더 지면을 때린 기사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사이.

기사의 메이스를 디딤돌 삼아 도약한 용주는 점멸을 사용했다.

사라진 용주가 나타난 곳은 기사의 머리 위.

엎드린 자세이기에 기사의 머리는 생각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았다.

기사의 정수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다 꽂히는 일격.

용주의 공격은 클린 히트로 정확하게 명중했다.

그런데.

‘이건….’

용주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분명 정수리를 꿰뚫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고통의 반응도 없었고, 검은 먹물이 튀지도 않았다.

베었다거나, 찔렀다는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신기루를 벤 것 같은 그런 공허한 감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