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기사에게 돌아온 용주는 위령의 잔을 꺼냈다.
위령의 잔에 반응하는 건 딱히 없었다.
이 상태가 아니었다.
뭔가를 더 해야 했다.
‘일단은 그렇게 해볼까?’
잔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용주는 검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자신의 검이 아니었다.
용주가 잡은 건 기사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검이었다.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쥔 용주는 단번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 뽑을 수 없습니다.
- 검을 뽑아 내기 위해 필요한 힘 : 100
메시지를 확인한 용주는 급하게 스탯을 분배했다.
이윽고 이어지는 두 번째 시도.
댕 대래랭!
용주의 손을 떠난 검이 땅을 굴렀다.
변화가 나타난 건 그와 동시였다.
철그럭!
일말의 움직임도 없었던 기사가 고개를 든 것이다.
투구 아래로 보이는 기사의 눈동자.
그는 정확히 용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 기사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 통역에 필요한 지능 : 80
“여긴….”
고개를 든 기사가 좌우를 살폈다.
부서진 안뜰은 이곳에 있었던 일과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난 여기서 쓰러졌었지.”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뻥 뚫린 그의 갑옷 구멍으론 반대편 풍경이 보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구나. 내 시간은 멈춰 있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어.”
허리를 숙인 기사가 자신의 대검을 집어 들었다.
“그대가 나를 다시 깨웠나?”
기사의 물음에 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성적이고 침착한 모습이 용주에겐 오히려 의외의 반응으로 다가왔다.
그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장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대에게서 위령의 향기가 나는군. 그대가 날 찾아온 이유도 거기 있겠지.”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기사가 손을 움켜쥐었다.
“그래. 작고 조그마한 자여. 묻겠다. 나의 희생은 가치가 있었던 것이냐?”
“…….”
“이 부서진 풍경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허무함과 비통함뿐이구나. 목숨을 바쳐 지켰지만,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죽음은 가치가 있었던 것이냐?”
기사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가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했다는 것 정도.
그는 자신의 가슴에 꽂혀 있던 검을 움켜쥐고 있었었다.
“그래. 그래도 그 대답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구나.”
기사가 대검을 지면에 반듯하게 꽂아 넣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묻도록 하겠다. 후세에 살고 있는 그대여. 그댄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
기사의 물음에 용주는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 대한 단서 같은 거, 지금껏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렇군. 그대의 대답은 잘 들었다. 난 이곳을 지키기 위해 내 모든 걸 바쳤건만, 내겐 그 작은 소망조차 허락되지 않았단 건가.”
다시금 검을 뽑아든 기사가 지면을 내리찍었다.
그가 만들어 낸 충격에 날아오른 회색 재는 눈처럼 흩날렸다.
“돈을 바라고 한 희생이 아니었다. 명예를 바라고 한 희생도 아니었다. 누가 시켜서 한 희생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원망했던 희생도 아니었다.”
대검을 가로로 누인 기사가 용주를 겨눴다.
“내가 바란 건 그저 나란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는 것뿐. 그거 하나였다. 하지만 위령제를 지내러 온 그대조차 내 이름을 모르는구나. 이 세상에 날 기억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단 뜻이겠지.”
기사의 오른팔이 갑작스럽게 팽창하더니, 검은색의 살점이 갑옷을 깨부수며 흘러나왔다.
“잊히게 한 자들을 저주한다. 잊은 자들을 저주한다.”
하늘 높이 치켜든 대검이 용주에게 내리꽂혔다.
용주를 향한 기사의 눈동자엔 비통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사라지지 않겠다! 지워지지 않겠다! 난 이곳에 있었고! 이곳에 있다!!”
맹렬하게 이어지는 기사의 돌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왼쪽으로 굴러 공격을 흘려보낸 용주는 기사의 왼편으로 파고들었다.
맞부딪치는 철과 철.
순식간에 기사의 발목과 허벅지 갑옷에 상처를 낸 용주는 집요하게 왼쪽을 물고 늘어졌다.
기사의 갑옷에 상처가 생길 때마다 먹물과 같은 검은 색의 액체가 흩뿌려졌다.
“기사의 싸움을 모르는 자구나! 그런 조약한 편법으로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왼발을 내지른 기사가 순식간에 용주를 걷어찼다.
날아가는 용주를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대검은 지면을 조각냈다.
“사라졌어?”
공격이 빗나갔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
“크윽…!”
오른팔을 상처 부위에 쑤셔 넣은 기사는 그 뒤편에 있던 것을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닿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를 한 번 더 찢은 자는 지면을 긁으며 멈춰서고 있었다.
“등에 상처는 기사의 수치! 수치스럽구나! 치가 떨릴 정도로 수치스러워!”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한 갑옷이 목을 지나 투구까지 이어졌다.
“죽여 버리겠다! 위선자!”
깝질을 깨고 나오듯 튀어나오는 검은 살점.
투구를 뚫고 나온 머리는 인간보단 악어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
왼손으로 대검을 건넨 기사는 오른팔을 이용해 힘껏 도약했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기사의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미끄러지듯 교차하는 두 개의 그림자.
180도로 방향을 튼 용주는 공간 균열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 속 내려다보이는 검은 물체.
직각으로 떨어진 용주는 기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크윽! 크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던 기사는 지면에 머리를 처박은 채 돌진했다.
갈려나가는 대지.
수많은 묘비를 난폭하게 뒤엎은 기사는 그대로 벽에 들이받았다.
실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뚝 하고 끊긴 기사의 움직임.
갑옷을 뚫고 나왔던 검은 기사의 갑옷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처음 만났던 그 모습으로 돌아간 기사.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 ‘???’를 쓰러뜨렸습니다.
- 200 소울을 획득했습니다.
기사가 쓰러지자 밝은 빛이 용주를 덮쳤다.
눈살을 찌푸린 용주의 앞에 더 이상 기사의 모습은 없었다.
있는 건 작고 희미한 하얀빛.
그게 전부였다.
‘이름은 결국 마지막까지 모르게 됐네.’
적을 쓰러뜨리고 나온 메시지에서도 기사의 이름은 출력되지 않았다.
‘…….’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위령의 잔을 꺼낸 용주는 빛을 담았다.
0이었던 숫자는 1로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이 소울이란 건 뭐지?’
퀘스트 게이트에서 적들을 쓰러뜨리고 얻는 기본적인 것들은 경험치와 골드였다.
하지만 지금 들어온 것은 ‘소울’.
적혀 있는 골드창에는 따로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 새로운 룰이 적용되었습니다.
▷ ‘영혼 상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해당 상점에서 구입한 효과는 해당 게이트에서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 해당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은 해당 게이트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혼 상점?’
새롭게 나타난 메시지에 용주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무리 다시 봐도 저 메시지 외에 다른 설명은 없었다.
‘어찌 됐든 상점이라면….’
용주는 일단 상점창을 활성화했다.
그동안 들어가지 않았던 만큼 여러 물건들이 갱신되어 있었다.
하지만 용주가 찾는 것들은 아니었다.
여기서 요구하는 것들은 골드.
소울이 아니었다.
‘이게 아닌가.’
용주가 생각에 잠겼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이 접근법은 아니었다.
당장 생각나는 다른 경우의 수는.
이 게이트 어딘가에 영혼 상점이란 게 있고 그 존재를 알려만 줬을 경우.
그리고….
‘그러고 보니, 상점 패널도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었지.’
상점 패널을 닫은 용주는 메뉴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영혼 상점’이라고 이름 붙은 새로운 패널을.
▷ 보조스킬
▷ 아이템
패널의 초입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유중인 소울은 200.
용주는 일단 보조스킬이란 것을 살펴보았다.
▷ 2단 점프 - 200 소울
- 도약 후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게 된다.
▷ 땅굴파기 - 300 소울
- 순식간에 바닥을 파고들 수 있게 된다.
- 어느 재질의 땅이라도 파고들 수 있다.
- 땅굴을 판 상태에선 이동할 수 없다.
▷ 4족 보행 - 500 소울
- 네 발로 행동할 경우 신체 능력이 상승한다.
▷ 점을 보는 눈 - 1,000 소울
- 적의 약점을 빛의 형태로 볼 수 있게 된다.
스킬은 총 4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앞선 3개는 이름만 들어도 대략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단어가 주는 임팩트에서 가장 시선이 가는 건 4번째 스킬.
생명체의 약점이라고 하면 보통 공통된 지점인 경우가 많았다.
머리나 목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기에 굳이 필요한 스킬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호기심은 있지만 실용성은 글쎄.
딱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다음은….’
보조스킬 패널을 나온 용주는 이번엔 아이템 패널을 살펴보았다.
▷ 귀환의 분말 - 100 소울
-가장 최근에 방문했던 화톳불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다.
▷ 이끼 낀 썩은 나뭇가지 - 20 소울
- 일정 시간 동안 ‘잊힌 자’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 비방하는 해골 - 50 소울
- 큰 소리로 비속어를 내뱉는 해골을 소환한다.
- 일정 범위 내의 ‘잊힌 자’들을 한곳으로 불러들인다.
▷ 해주석 - 120 소울
- 가지고 있는 자는 ‘망자의 시선’ 상태에 빠지게 된다.
- 망자의 시선 상태가 된 자는 ‘잊힌 자’들의 1순위 타깃이 된다.
- 해주석이 파괴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잊힌 자’들이 소환된다.
▷ 진흙 묻은 대변 경단 -10 소울
- 일정 시간동안 엄청난 악취가 진동하게 해주는 경단.
▷ 결투의 부적 - 150 소울
- 대상이 된 자의 회복을 금지시킨다.
등록되어 있는 아이템은 크게 6가지.
각 아이템들 모두 1회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잊힌 자….’
몇몇 아이템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였다.
단어에 담긴 뜻만 보면 조금 전에 쓰러진 그 기사도 잊힌 자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맞는가라는 의문도 한편으로 들었다.
왜냐면 여기 적힌 문장들은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뭐… 지금 여기서 고민해 봤자 나아지는 건 없겠지.’
걸음을 옮긴 용주는 다시금 문 앞에 섰다.
다시 한번 문에 손을 올린 용주.
팔에 힘을 준 용주는 좀 전과는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열리는 철문.
문 건너편에서 만난 건 오른쪽으로 휘어진 외길과 그 끝에 자리한, 성당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일단은 저쪽으로 가면 되는 건가.’
주변을 살펴봤지만 목적지로 삼을만한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다.
까드득…! 까드득…!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 소리는 뭐지?’
양쪽으로 늘어선 묘비 사이를 걷던 용주의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돌을 깎는 것 같는 소리.
숨을 죽인 용주는 소리의 뒤를 밟았다.
‘저건….’
묘비에 몸을 숨긴 용주는 소리의 근원지에 집중했다.
낡고 해진 로브를 걸친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키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좀 더 작은 정도.
바람에 나풀거리는 옷가지에선 기괴함이 느껴졌다.
나풀거리는 옷가지 위로 나타나는 팔다리의 윤곽이 마치 뼈만 있는 것처럼 앙상했기 때문이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모를 그자는 묘비에 바짝 붙어 있었다.
떨어져 나온 비석의 파편을 쥔 그자는 무명의 비석을 긁어내고 있었다.
무슨 글자를 새기려는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특별히 무언가가 새겨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긁어도.
긁고 또 긁어도 비석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스윽!
그자의 팔이 올라가며 그의 손이 순간 로브 밖으로 드러났다.
그자의 손에 피부는 없었다.
있는 건 하얗게 드러난 뼈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