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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48화 (148/357)

148화

“…….”

모습을 드러낸 검은 드레스의 여인.

팬텀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는 더 이상의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오늘은 일 끝나고 바로 온 거야?”

엔비의 물음에 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어? 이상한 건 없었고?”

러스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성덕이 사라졌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목소리 내도 돼. 가신 거 맞으니까. 가면도 이제 벗어도 되고.”

엔비의 확인을 받고서야 러스트는 가면을 벗었다.

죽은 눈동자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엔비를 보고 있었다.

“없었어. 비밀의 방. 비슷한 것도.”

“음… 그래? 알았어. 보스껜 내가 말해둘게. 고생했어.”

“응….”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러스트.

“러스트.”

엔비는 그런 그녀를 다시 한번 불러 세웠다.

“혹시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러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없으면 다행이고. 혹시 상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이 언니가 들어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러스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박형만 헌터….’

계단을 오르는 러스트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맴돌았다.

‘왜 그 이름이 이렇게 메아리치는 걸까?’

낯선 이름이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머리가 아팠다.

가슴 안쪽 깊숙한 어딘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괴로웠다.

‘그 사람을 만나면 혹시 뭔가 알 수 있을까? 내가 찾아 헤매던 게 무엇이었는지.’

* * *

“보스, 들어갈게요?”

문을 두드린 엔비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피로 만든 듯 붉고 매끈한 바닥타일엔 엔비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붉은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실내는 거주를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실험을 위한 장소처럼 보였다.

“손님께선 돌아가셨어요. 길드 쪽에서 발견하기 전에 이형 리액터는 성공적으로 회수했고요.”

엔비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래. 수고했다.”

“윤현의 상태는 좀 어때요?”

“리액터는 거의 안정화됐다. 남은 건 윤현 본인에게 달린 일이지.”

“윤현이 혹시 깨어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씨앗에서 싹이 났으니, 열매가 열릴 때까지 관리해야지.”

“당분간은 더 같이 있을 수 있단 소리네요.”

“깨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겠지.”

“…….”

“마음에 들어도 너무 마음 주지 마라, 엔비. 윤현의 존재 목적은 너희와 같지 않으니.”

“…후훗. 물론이죠, 보스.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 가족뿐이라고요.”

엔비가 싱긋 웃어 보였다.

“있잖아요, 보스. 조금 전에 프라이드랑 잠깐 이야기를 했어요. 흥분한 모습이야 자주 봤지만 그렇게 치를 떨며 즐거워하는 건 처음 봤어요.”

“…….”

“프라이드가 그러더라고요. 인간에게서 언노운의 느낌을 받았다고. 보스 생각은 어때요?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그 아이가 그렇게 느꼈다면, 틀림없겠지.”

“저도 그렇다곤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상하단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그런 건 우리 귀여운 글러트니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용주 헌터라고 했었지. 비밀의 방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네.”

“재미있군.”

입꼬리를 올리는 보스.

눈치를 살피던 엔비는 보스 옆으로 다가갔다.

“러스트도 돌아왔어요. 결과는 이번에도 역시 꽝이었나 보고요.”

“타이밍이 묘하게 겹쳤군. 혹시 얼굴을 보인 건 아니겠지?”

“러스트가 온 게 한발 늦게라 둘이 마주치진 않았어요. 이야기 정도는 조금 들은 모양이지만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다음번엔 조금 더 주의를 하는 게 좋겠구나.”

“신경 쓰도록 할게요. 근데….”

무언가를 말하려던 엔비가 급하게 말꼬리를 잘랐다.

유일하게 러스트에게만 채워져 있는 족쇄.

거기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기로 한 엔비였다.

괜한 의구심이나 호기심을 표현해 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 말이 헛나왔네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답지 않은 실수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아니겠어요?”

엔비가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 참! 보스,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어요. S급 헌터인 이안이 D급 게이트에 손을 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안이?”

“네.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러스트도, 그리드도 분명 뛰어나지만, 그자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보스가 다시금 눈을 떴다.

“그리드가 돌아오면 전해라. 수색은 당분간 중단이라고.”

“네. 그러도록 할게요. 러스트에게도 그렇게 일러주면 되죠?”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엔비를 지난 보스가 그녀가 내려놓은 보따리를 풀었다.

이형 리액터의 조각들은 중력을 거스르며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조만간 본격적인 헌터 사냥이 시작될 거다. 준비하고 있도록.”

“네, 그럴게요. 프라이드가 아주 좋아하겠는걸요.”

고개를 숙인 엔비가 천천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비밀의 방은 찾지 못했지만, 더 재밌는 정보가 손에 들어왔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보스가 책 한 권을 펼쳤다.

“부족한 한 조각. 그거면 열 수 있을지도 몰라.”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쓴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S급 카오스 게이트.

그 문을 여는 방법에 대한 고찰.

* * *

“자~ 그럼 던집니다!”

요란한 손동작을 선보인 주원이 손안에 든 것을 던졌다.

보드 위에 떨어진 두 개의 주사위는 도합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 봤어? 더블이야! 더블이라고!”

신난 주원의 외침.

“오빠,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돌아온 건 예나의 시큰둥한 눈빛이었다.

“그럼 우선 열두 칸 전진합니다.”

진행을 맡고 있던 승우는 주원의 말을 움직였다.

주원의 말이 도착한 곳엔 에펠탑 미니어처가 세워져 있었다.

“아….”

“통행료는 320만 원 되겠습니다, 손님.”

굳어진 주원에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과 눈이 마주친 주원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씨익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는 어딘지 무서웠다.

“누나가 존댓말 쓰니까 더 무서운데요.”

“기부 천사한테 그 정도 서비스도 못 해주려고. 신경 쓰지 마.”

“으….”

울며 겨자 먹기로 통행료를 지불한 주원이 다시 한번 주사위를 잡았다.

앞쪽에 기다리고 있는 건 용주와 서윤이 차지한 무지막지한 데드라인.

밟을 확률이 밟지 않을 확률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었다.

“오빠, 잘 던져. 어디라도 밟으면 바로 파산이라고.”

“괜찮아. 운 하면 바로 나, 이주운이니까!”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보는데.”

예나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운이 좋다고 하기엔 지금까지 보여준 게 너무 엄청났다.

“음. 그거야 방금 막 생각했으니까?”

“알았으니까 꼭 피해 가야 해. 이거 지면 나 집사랑 또 공부하러 가야 한단 말이야.”

“오케이! 나만 믿어!”

주원의 손에서 떠난 또 한 번의 주사위.

주사위의 눈금은 1+1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산이었다.

“오빠!!”

“아하하핫. 왜 이러지. 이게 아닌데.”

머리를 긁적인 주원이 신속하게 예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럼 아가씨. 약속했던 대로 2부 수업 하러 가실까요?”

승우가 자연스럽게 보드게임판을 정리했다.

지금 이 시간이 마련된 건 예나의 아이디어였다.

몇 날 며칠 여기만 있는 게 여간 따분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으… 알았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깊은 한숨을 내쉰 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언니들 그럼 일단 해산하는 거로 할게. 어울려 줘서 고마워.”

“그래, 예나야. 공부….”

손 인사를 건네던 주원이 벌을 서듯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째려보는 예나의 눈빛에 나온 자동 반사였다.

“음~ 뭐야. 그나마 시간 죽일 만한 일이 사라져 버렸네.”

서윤이 기지개를 켰다.

“승우 형한테 말해서 보드라도 빌릴까요?”

“팀도 안 맞잖아.”

남은 인원은 3명이었다.

금화는 먼저 거절했었다고 한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용주가 어울렸을 가능성도 낮았겠지.

“개인전으로 하면 되죠. 3명이면 충분하다고요.”

“난 됐다. 하고 싶으면 둘이 해.”

용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지만 딱히 할 것도 없지 않아요? 똑같은 풍경 보면서 종일 운동만 하는 것도 지겹다고요.”

“뭐, 그러냐.”

어깨를 들썩인 용주는 쿨하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날로부터 며칠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길드에선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회의가 길어지고 있는 건지.

아니, 회의가 시작이 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오겠다며 수지는 자리를 비웠다.

무슨 일 생기면 칼 뽑아 들기 전에 전화부터 남겨놓으라고 신신당부했었지.

‘무작정 시간만 보낼 수야 없지.’

애초에 말을 잘 듣는 모범생도 아니었다.

옛날엔 그랬을지 몰라도, 헌터인 자신은 아니었다.

몸 상태는 물론, 컨디션도 궤도에 올라왔으니,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겠지.

‘카오스 게이트가 전부가 아니야.’

용주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경북 영덕의 장사리.

남은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강해져야 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윤현과의 싸움도 쉬웠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설녀의 부적이나, 별의 비수 같은 아이템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정도로 유리하게 판을 짤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라이드와의 차이는 몸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밀리다 밀려 재앙의 씨앗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거였다.

‘그릇….’

검에 빗댄 비유에 이어 그릇에 빗댄 비유가 있었다.

만약 그 힘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강했더라면, 의식이 날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S급 헌터에 닿아야 했다.

저 위에 있는 자들에게 닿아야 했다.

윤현도.

프라이드도.

팬텀도 다 뛰어넘고 이안마저 넘어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쓰러질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쓰러져선 안 됐다.

‘움직이자.’

창가를 살피던 용주는 걸음을 옮겼다.

공간 균열이 손안에 들어온 지금.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

문을 나서려던 용주의 발걸음이 급하게 멈춰 섰다.

언젠가 한 번 마주했던 것 같은 상황의 데자뷔.

순간적으로 어떤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윤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야의 한 장면.

왜인지 모를 풍경에 용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

당황한 서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을 열려던 그녀의 손은 급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감정을 삼킨 용주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그럼 비켜주지 그러냐.”

“어디 가려고?”

“그런 거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욘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잠시 망설이던 서윤이 비켜 가려던 용주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저기 있잖아! 이용주!”

“?”

“오늘 자정에 요 앞 야외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뭐? 왜?”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전혀 뭐 짚이는 게 없었다.

“…그건 나와 보면 알 거야. 그전까진 비밀이라고. 알았지?”

물음표를 붙인 서윤이 검지를 용주의 입술 앞에 가져갔다.

“지금 대답하지 마. 대답은 그때 들을게.”

재빨리 뒤돌아선 서윤이 도망치듯 달려갔다.

‘뭐지?’

다시 한번 차분히 생각을 돌이켜 본 용주였지만, 역시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분위기가 뭔가 평소랑은 다른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콕 집어서 뭐라고 하긴 좀 애매했지만 말이다.

‘혹시….’

순간 아까 봤던 풍경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순간 스쳐 갔던 그것처럼 서윤도 뭔가 떠올렸을지도 모르지.

‘곤란하게 됐는데….’

그냥 여기서 말하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장사리까지 왕복할 생각을 한다면, 자정까지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만약에 항공편을 이용한다고 한다면….’

핸드폰을 꺼낸 용주가 화면을 두드렸다.

포항까지 날아가는 루트가 있긴 했지만, 항공편은 하루에 한 대가 고작.

비행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말고 내일 움직여야 하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뭐, 그냥….”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목소리.

한발 늦게 반응한 머리는 소리를 좇으라 명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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