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하아~ 오랜 악연이었지. 녀석은 내 것이어야 했을 것들을 전부 가져갔어.”
성덕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래는 마치 모래시계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내 것이어야 했을 것들?”
“내 것이어야 했을 명성들, 내 것이어야 했을 여자, 내 것이어야 했을 아이, 내 것이어야 했을 행복. 녀석은 앞에서 그걸 다 가로채 갔어. 녀석만 없었다면, 녀석만 없었더라면 다 내 것이 됐을 텐데.”
성덕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었다.
“녀석과 난 닮은 점이 많았어. 나이도, 헌터가 된 시기도, 헌터로서 가진 힘도, 라이벌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
“…….”
“물론, 전부 다 같은 건 아니었어. 녀석은 딱딱하고 권위적이면서 더럽게 무게를 잡아댔지만, 난 아니었거든.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가는 리더. 누가 봐도 내가 훨씬 훌륭한 리더였지.”
“그러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녀석과 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있더라고. 모두가 녀석을 믿고 의지하며 따랐지만, 어째선지 내겐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지.”
“어머….”
“이해가 되지 않았어. 같은 등급의 게이트, 비슷한 위험도의 미션을 클리어해 왔고, 활약도에서도 전혀 밀릴 게 없었는데 왜 그렇게 된 건지.”
성덕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그래도 전부는 아니었어. 딱 한 명. 내게 환하게 웃어주는 그녀가 내게 있었지. 난 그녀만 봐도 행복했어. 그녀 하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 그녀만 있으면 난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었어. 그런데….”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마저 녀석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어. 어느 순간!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녀석 옆에 서 있었다고!”
성덕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녀석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었어. 그런데도 그녀의 사랑을 차지했다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데도 가지지 못했는데 녀석은…!”
성덕이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했다.
흘러내린 모래는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무릎 정도까지 올라오는 형만의 조각이었다.
“녀석은 웃는 얼굴로 내 전부였던 걸 빼앗아 갔어! 그때의 내 기분은 아무도 몰라. 그 비통함, 그 상실감, 그 무력감. 분노를 넘어 치욕스럽기까지 했지.”
모래 조각을 내리치는 성덕.
그의 발길질 한 번에 부서진 머리는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그때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녀석이 내 전부를 빼앗아 갔으니, 나도 녀석의 전부를 빼앗아 가겠다고!”
성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상당히 의아한 타이밍에 나온 이질적인 미소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엄청난 사실 하나 말해줄까? 특별히 너니까 해주는 이야긴데.”
“저야 영광이죠, 선생님.”
“난 이미 녀석에게 두 가지나 빼앗았어. 내 이 두 손으로.”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가장 처음 빼앗은 건 녀석의 아내. 한때 사랑했던 그녀가 눈감는 걸 보는 건 정말 가슴이 아팠지.”
“그거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네요.”
“그다음으로 빼앗은 건 녀석의 아들. 그쪽을 처리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어.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고, 아무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지.”
“경찰이나 길드에선 가만히 있었고요?”
“두 사건 모두 게이트에서 일어난 사고. 즉, 언노운에 의한 희생으로 기록됐어. 의심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정도로 허술하게 움직이진 않았으니까.”
남은 형만의 몸통 부분을 찍어누른 성덕의 미소가 점점 번져 갔다.
옅었던 그의 미소에선 흥분과 기대가 느껴졌다.
“이 몸이 너희 팬텀에 협력하고 있는 이유. 궁금해했었지?”
“네, 물론이죠. 다른 분도 아니고, 길드에서도 인정받는 특A급 헌터시니까요.”
“당연히 나라고 아무 이유 없이 협력하고 있는 건 아니야.”
성덕이 검지를 세워 보였다.
“내가 너희 보스와 협력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는 그녀를 온전한 모습으로 돌려받기 위해서.”
“…그렇지만 선생님의 그녀란 분은….”
“일을 망설이고 있던 내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었거든. 바로 너희 보스였지. 녀석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뺏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돌려받고 싶지 않냐고.”
“돌려받는다.”
“녀석이 그랬었지. 오염되지 않은 순수했던 그녀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냐고. 나만을 바라보는 나만의 그녀를 가지고 싶지 않냐고! 형만의 것인 그녀는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내 것인 그녀.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그녀라고!”
성덕이 손을 움켜쥐었다.
“녀석과 만나고 난 마을을 굳혔다. 녀석과 손을 잡고 함께 그녀를 빼앗았지.”
성덕의 머릿속에 그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 모습이.
“그녀의 순수한 정수는 지금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야.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박형만 그 녀석을 완벽하게 몰락시키는 것. 단순히 목숨을 빼앗는 거론 부족해. 아주 처절하게 짓밟혀서 오래오래 비통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스.
여기선 그렇게 불리고 있는 그자는 말했었다.
그녀를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그릇을 빚을 이형 결정체.
그녀의 정수와 기억을 정화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둘을 결합하기 위한 헌터의 정수.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헌터. 그 절망이, 그 자책이 녀석을 지탱해주고 있는 마지막 기둥을 무너뜨릴 거야. 난 알 수 있어. 녀석을 오랫동안 봐 왔으니까.”
그로부터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녀를 품에 안는 건 놈을 파멸로 인도한 다음.
그 전이면 오히려 곤란했다.
와인이 가장 달콤한 순간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니까.
“음…. 놀랍고도 생소한 이야기네요. 보스한테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말이에요.”
놀라움을 표한 엔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누구한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성덕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벌써 일어나시려고요?”
“그래. 지금 여기 온 건 이걸 돌려주려고 한 거였으니까. 덕분에 기분도 좀 나아졌고.”
성덕이 위층을 바라보았다.
“너희 보스는?”
“윤현 때문에 바쁘신 모양이에요. 손님 대접을 맡기신 것도 그 때문이고요.”
“윤현. 그 녀석 살아는 있는 거냐? 말로는 시꺼멓게 타서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는데.”
“호흡, 맥박 모두 회복 중이에요. 생명엔 지장 없다고 하셨고요.”
“거, 목숨 한 번 질기네.”
“평범한 화상이 아니라 겉모습과 목숨이 크게 연관되진 않는가 봐요. 타버렸다기보단 변신이나 진화에 좀 더 가까운 거죠.”
“아~ 그래? 그런데 녀석, 머릿수를 더 늘려서 뭘 하려는 거야? 지금 있는 전력을 안정화하는 것부터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불안정한 놈들 있잖아.”
“안정화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음… 그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성덕이 이형 결정체로 만들어진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 안쪽엔 이형 워프 장치가 2열 횡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아, 참! 그렇지!”
떠날 채비를 하던 성덕의 시선이 엔비를 향했다.
“이안의 움직임이 최근 이상할 정도로 활발하다.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이안이라면 그 S급 헌터 말인가요?”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엔 D급 게이트에도 손을 대고 있다는 내부 정보가 있더라고. 괜히 건드렸다간 그냥 넘어가긴 힘들 거야. 주의하라고.”
“음… 그런가요? 데이터베이스엔 그런 정보는 없었던 것 같은데….”
엔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無)의 헌터 이안.
알고 있기로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에 임무나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였다.
게이트 임무에 선발대로 나서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가 움직이고 있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자와 게이트에서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기록하지 않고 움직이거나, 다른 이름으로 움직였을 가능성 정도를 우선 예상해 볼 수 있겠지.”
“그렇군요. 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자료를 토대로 면밀히 분석해 마주칠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조심들 하라고. S급이 괜히 S급이 아니니까. 너희 개개인의 전력이 상당히 안정화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안은 아니야. 충고하는데, 맞닥뜨리면 전력으로 도망가는 것만 생각해. 알았지?”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 가지 더. 본격적으로 상위 헌터 사냥을 시작해도, 박형만은 건들지 마. 녀석의 지옥은 여기여야 하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얘들한텐 제가 전해둘게요.”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수고해.”
이형 워프 장치를 활성화한 성덕.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오냐.”
90도로 고개를 숙인 엔비의 머리를 쓰다듬은 성덕은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나와도 돼.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어.”
1층 내부에 자리한 거대한 기둥을 바라본 엔비가 외쳤다.
기둥 뒤에서 나타난 이는 프라이드였다.
“그 꼰대 아저씨, 이제야 간 거야?”
“그래.”
“비위도 좋다.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면 면상을 날려 버렸을 텐데.”
“손님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내 일. 보스를 실망시킬 순 없잖아? 그리고 나름 적성에도 맞고. 재미있잖아.”
“아~ 예예. 그러십니까?”
건성건성 대답을 끝낸 프라이드가 위층 계단으로 향했다.
“윤현은 어떻게 됐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있대?”
“음, 아니. 그 모습에 완전히 잠식된 모양이야.”
“그래? 그거 너무 아쉬운데. 얼굴로만 벌어먹고 살아도 행복할 꽃미남이었는데.”
“아~ 예예.”
“다른 건? 더 이야기 나온 거 있어?”
“이형 리액터 손상이 심해서 고생 중인가 봐.”
“음…. 대체 뭘 맞았길래. 해봤자 겨우 C급이었을 텐데, C급이 그렇게 간단히 부술 만한 강도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큭! 크크큭!”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프라이드의 미소.
엔비는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아~ 미안미안, 그렇지만 또 생각나 버려서. 그 녀석. 무지막지하게 흥분됐었거든.”
“그러고 보니 직접 붙어본 소감을 안 들어봤던가? 못 죽인 거야, 안 죽인 거야?”
“에이~ 날 뭘로 보고. 어떻게 말하든 잔소리할 거잖아. 말 안 할래.”
“안 하면, 두 배로 들을 텐데도?”
“…당연히 안 죽인 거지. 그렇지만 그 녀석, 중간부턴 인간 같지가 않았어. 진짜 죽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인간 같지가 않았다니? 무슨 소리야? 변신이라도 했어?”
“그냥 변신이 아니었어. 소름이 끼쳐서 온몸이 전율했다고.”
“그러니까 그게 뭐였냐니까.”
“그 녀석을 딱 보고 든 첫 생각이 말이야, ‘저건 뭐 하는 생명체지?’였어. 카오스 게이트에 어슬렁거리는 어떤 언노운보다 더 언노운 같았다고.”
프라이드의 얼굴에 또 한 번 미소가 번졌다.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니야. 녀석이 내뿜는 그 불길한 기운…. 그건 헌터한테 감도는 냄새랑은 달랐어. 그건… 그래. 언노운이 풍기는 거랑 닮아 있었어.”
“언노운의 냄새라고? 헌터가?”
엔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프라이드가 그렇게 느꼈다면 분명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형 결정체가 언노운에게서 나온다고 해서, 그걸 사용한 인간이 언노운과 같은 기운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프라이드의 저 반응.
지금까지 한 번도 저 정도로 격렬하게 흥분했던 적이 없었다.
“됐지? 솔직하게 말했으니 잔소리는 사양한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올라 간 프라이드는 엔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테이블로 돌아온 엔비는 부서진 이형 리액터의 잔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도 이제 나와도 돼.”
조각을 모으던 엔비가 이야기했다.
“중간부터 듣고 있었지?”
그녀의 부름에 작은 부스럭거림이 일었다.
“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