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하! 입은 그럴듯하게 놀렸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야기 못 한다는 거잖아.”
성덕이 따지듯 이야기했다.
“적어도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거든! 하나하나 전부 반박당한 주제에!”
이어지는 서윤의 반박.
“난 A급 헌터야, A급 헌터!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A급 헌터면 뭐 어쩌라고! A급 헌터면 입으로 똥을 싸도 괜찮다는 법이라도 있어?!”
“뭐? 똥?! 이런 천박한…!”
계속해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립을 보다 못한 동제는 가지고 있던 수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수첩에는 특별 조사관의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오성덕 헌터님.”
“아? 왜?”
“정중하게 퇴장을 요청드립니다. 이 이상의 행동은 조사 방해로 여기겠습니다.”
“뭐? 퇴장?! 조사 방해? A급 헌터인 이 몸이?”
성덕의 표정이 또 한 번 굳어졌다.
‘네가 감히’라고 말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었다.
“오성덕 헌터님의 출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건 해당 게이트 지원에 나서주신 헌터님을 존중해서였습니다. 아예 사건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하지만 헌터님께선 다른 헌터님들을 전혀 존중해 주지 않으시더군요. 요청에 응하지 않으신다면, 강제적으로라도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 몸은 A급 헌터야! A급 헌터한테 감히 명령을 하겠다고?”
“전 이 사건의 특별 조사관입니다. 제겐 그럴 권한이 있다는 건 헌터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권한에 따른 책임이 발생하면 제가 지겠습니다. 그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어지는 동제와 성덕의 신경전.
분노에 찬 콧소리를 내던 성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경질적으로 닫힌 방문 뒤론 그가 만들었던 모래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뭐야? 너 보기보다 제법이잖아?”
서윤이 이야기했다.
특별 조사관이란 게 이름뿐인 자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들부들거리면서도 한마디도 못하는 A급 헌터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비밀의 방이란 건 뭐야?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게이트에서 관측된 이상 현상이었습니다. 단 네 명의 생존자만 있던 비극이었죠.”
“이상 현상? 그게 대체 뭐였는데?”
“당사자 본인이 있으니 물어보시면 저보다 더 잘 설명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용주를 바라본 동제가 수첩을 챙겼다.
“이야기는 들은 적 있네만, 설마 그 사건의 당사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려.”
금화가 이야기했다
용주만이 아니었다.
형만도, 수지도, 태영도.
비교적 최근에 마주친 이름들이 아닌가.
“저 녀석도 게이트에 왔던 거냐?”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 용주가 물었다.
딱히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네. 오성덕 헌터님께서도 해당 게이트에 지원을 나가셨었습니다.”
“저 아저씨, 집사 다음으로 들어왔어.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왔는데, 게이트 들어오자마자 혼자 안쪽으로 들어갔었어.”
예나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게이트에 들어온 그는 네 사람의 상태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렇다고 혼자 게이트를 클리어한 건 아니었다.
안쪽에 팬텀이 있나 수색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팬텀은 추가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색에서 딱히 발견한 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팬텀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셨었죠.”
노트북 화면을 확인한 동제가 이야기했다.
“근데 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주원이 손을 들었다.
“그, 아까 이야기에서 나온 박형만이라는 분, 감독관으로 나왔던 그분 맞죠?”
“제가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선 그럴 겁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던 거예요? 뭔가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던데요.”
“좋아 보이지 않긴. 어떻게 해서든 없애 버리고 싶어 안달 난 것 같더만.”
서윤이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말투. 억양. 대화의 방향. 표정.
그 어떤 걸 봐도 동지의 언어와는 거리가 멀지 않았던가.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함부로 발언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요. 다만, 두 분께서 사이가 좋지 못한 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밖으로 보이는 이미지만 보면 오성덕 헌터님께서 일방적으로 적대하시는 것에 가깝죠.”
“뭐야, 그게? 무슨 짝사랑도 아니고. 그 꼰대 아저씨, 질투라도 하는 거 아니야?”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서윤의 시선이 용주와 마주쳤다.
“뭐,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그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동제가 적당한 거리에서 선을 그었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정리해 보고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더 생각나시는 이야기나, 하고 싶으신 이야기는 없으십니까?”
동제의 물음에 다섯 사람의 시선이 오갔다.
“의미 없어 보이는 작고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윤현 헌터와는 구면이시니 뭔가 변화가 있었다면 더 쉽게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말했잖아. 스킬을 사용하고 힘도 강해졌다고.”
굳이 따지면 말투도 바뀌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화라고 하기엔 뭔가 애매했다.
그쪽이 녀석의 원래 말투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아!”
그런 서윤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변화.
거기에 부합하는 게 하나 더 있긴 했었다.
“뭔가 더 있는 겁니까?”
“그래. 윤현의 가슴 부근에 동그란 장치 같은 게 하나 있었어. 잘은 모르지만, 거기 대고 힘을 내놓으라는 식의 말을 했던 거 같아.”
“동그란 기계 장치….”
동제가 노트북을 두드렸다.
“동그란 장치라면….”
“우리 쪽에도 있지 않았어요?”
예나와 주원이 금화를 바라보았다.
변신 전의 모습까진 알 수 없었지만, 변신 후엔 작은 장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었다.
“양쪽 모두 관측되었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변화와 연관이 가능성이 제법 커 보이는 정보군요.”
“혹시 잔해가 발견되거나 한 건 없나? 폭발의 진원지에 있었으니 분명 부서졌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금화의 이야기에 동제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니요. 교전이 있던 장소에서 그런 게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음… 그런가.”
금화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기 뭔가 단서가 남아야 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 거기 있던 살덩이들은?”
“표본을 채취해 의뢰를 맡긴 결과. 99.99% 인간의 것이라는 결과가 돌아왔습니다.”
“그런가….”
금화가 씁쓸함을 삼켰다.
“방금 나온 기계 장치까지 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길드의 결정이 내려오기 전까진 여기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기하라고? 여기서?”
서윤이 물었다.
그런 이야기 금시초문이었다.
“윤현 헌터의 목적이 이용주 헌터님이었다면, 같은 목적으로 다시 위협을 가해올 위험이 있습니다.”
“카오스 게이트 바깥에서도 공격해 올지도 모른단 소리야?”
“가능성이 없진 않죠. 지금까지 특정 누군가에게 원한을 드러낸 팬텀은 없었으니까요.”
동제가 노트북을 덮었다.
“여기라면 괜찮을 겁니다. 여러분이 여기로 옮겨진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고, 안수지 헌터님, 임승우 헌터님을 비롯한 쟁쟁한 실력자들도 계시니 말이죠.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동제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 *
일렁거리는 차원의 틈.
워프 장치가 만든 포탈을 빠져나온 건 다름 아닌 성덕이었다.
“어휴~ 피곤해. 거, 아무도 없어?”
포탈을 빠져나온 성덕은 근처에 있던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당히 익숙하다는 게 느껴지는 그의 움직임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요.”
계단 위쪽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고개를 든 성덕은 손을 들어 보였다.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사람은 엔비였다.
“아~ 자리에 없다 싶더니 위에 있었구나?”
“마침 청소 중이었거든요. 별것 아니여 보여도 중요한 업무랍니다.”
계단을 내려온 엔비가 성덕에게 다가왔다.
고혹적인 그녀의 옷차림에 성덕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스께 오실 거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수고해 주셨다고 그러시더군요.”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엔비가 다리를 꼬았다.
“아아~ 수고했고말고. 이거 회수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번개도 나보단 느렸을걸?”
성덕에게서 모래의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테이블 위에 깔린 모래 곳곳엔 기계 장치의 잔해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형 리액터.
도준이 사망한 현장에 널려 있던 그것이었다.
“죄송해요. 정말로 말한 사람한테만 신경 쓸 줄은 몰랐거든요.”
왼뺨에 손을 올린 엔비가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회수하긴 글렀었을 거예요.”
“선생님? 하핫!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호칭이야.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성덕이 손뼉을 부딪쳤다.
오늘 하루 받았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쪽 이야기는 좀 어떻게 돌아가던가요?”
“아~ 이 몸이 말이야, 무려 특별 조사관한테 하는 이야기까지 다 듣고 왔다 이 말이야.”
“어머, 그거 굉장한데요? 역시 A급 헌터.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래서요?”
“확실히 정보가 많이 새나가긴 했어. 윤현이랬던가? 걔 말고 나머지 한쪽이 누군지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고. 이시우. 그 꼬꼬마한테 씌워졌던 누명도 깨끗하게 벗겨질 모양이고.”
“실패의 대가네요. 프라이드가 목격자만 깔끔하게 제거해줬으면 이렇게 복잡해질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하필 그 꼬꼬마를 시킨 거야? 똑 부러지는 다른 누구 시켰으면 서로 좋았잖아.”
“마침 돌아왔던 이가 프라이드였어서요. 그렇다고 글러트니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엔비가 고개를 저었다.
“글러트니가 그 뚱땡이인가?”
“네. 통통하니 귀여운 친구요.”
“통통은…. 걔 다이어트 좀 시켜.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혀를 찬 성덕이 질펀하게 소파에 기댔다.
무장 해제된 그의 배는 불룩하니 솟아 있었다.
“후후. 네, 주의 줄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엔비는 와인 한 병을 내왔다.
“일이 잘 해결된 것치곤, 안색이 안 좋으시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물음을 던진 엔비가 잔을 채웠다.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킨 성덕은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아~ 역시 엔비라니까? 속일 수가 없어.”
“후후, 과찬이에요.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아~ 그게 말이야. 일이 터지고 난 직후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었단 말이지.”
“꼭 한번 듣고 싶네요.”
“뼈대는 간단해. 누명을 씌우는 거지.”
“누명이라. 그거 무척 흥미로운걸요.”
“그렇지? 이용주. 마침 그 꼬꼬마랑 관련된 사건을 하나 알고 있었거든. 길드 내에선 비밀의 방이라고 불리는 사건인데.”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이야기네요.”
“그런 헛소리 한 귀로 흘려버려. 믿어 봤자 믿는 사람만 바보 되는 거라고.”
성덕이 또 한 잔을 비웠다.
“아무튼 그거랑 이 사건을 엮어서 이용주 꼬꼬마를 팬텀으로 모는 계획이었다고. 그럼 줄줄이 소시지처럼 박형만 그 자식을 엮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계획은 완벽했어. 분명 완벽했을 텐데….”
“잘 안 풀렸나 보군요?”
“…….”
성덕이 미간을 구겼다.
“박형만 헌터…. 선생님은 그자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하셨죠. 괜찮으시다면 그분과 어떤 관계인지 조심스럽게 여쭤보고 싶네요. 보스와 손을 잡으셨던 계기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궁금해?”
한참을 망설이던 성덕이 물었다.
“네. 부디 꼭 한번 듣고 싶은걸요.”
호기심을 표하는 엔비.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성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