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니야. 참아야 해. 참아야 한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프라이드가 자신의 뺨을 긁어내렸다.
자해로 생긴 상처에선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하이한 기분을 또 만끽하기 위해선 죽이면 안 된다고. 잘 생각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면 다음은 없어.”
“카각!”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용주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프라이드와의 거리는 불과 1m.
지면을 후벼 판 용주의 모습은 순간 프라이드의 시야에서 지워졌다.
‘이건….’
눈이 아닌 몸이 시키는 대로 반응한 프라이드.
사라졌던 용주는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까 봤던 그거네. 그렇게 되고 나서부턴 안 쓰길래 못 쓰는 건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지?”
기습을 오히려 역이용한 프라이드는 용주를 길게 베어 냈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깊은 상처.
텅 빈 용주의 왼팔을 파고든 프라이드는 용주의 양쪽 아킬레스건을 베어 냈다.
미끄러지며 넘어진 용주는 곧장 일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나도 더 놀고 싶긴 하거든.”
거리를 벌린 프라이드는 윤현을 둘러업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킨 용주는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근데 더 하면 내가 진짜로 널 죽여 버릴 것만 같단 말이지.”
용주에게 등을 보인 프라이드가 씨익 웃어 보였다.
“엔비가 시킨 일에 널 죽이는 건 없었어.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난 이 즐거움을 단타로 끝내고 싶진 않거든.”
속도를 높인 프라이드는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그럼 또 보자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프라이드.
그를 쫓으려던 용주는 불과 다섯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쓰러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
목표를 잃은 용주의 눈동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런 용주의 눈에 들어온 서윤.
무릎과 한 팔로 땅을 긴 용주는 단숨에 서윤을 덮쳤다.
의식 없는 서윤을 내려다보는 용주의 눈.
쩍 벌린 용주의 입에서 흘러내린 피와 침이 서윤에게 쏟아졌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서윤을 물어뜯으려는 용주.
“칵…!”
그런 용주의 행동에 제동이 걸린 건 그녀의 피부에 이빨이 닿기 바로 직전이었다.
서윤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용주의 오른팔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급격하게 요동치는 용주의 눈동자.
격동적으로 날뛰던 용주의 얼굴에 피가 튄 건 그로부터 수초 뒤였다.
“카각…!”
서윤의 몸에 상처는 없었다.
용주가 물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용주는 더욱 격하게 자신의 손을 물어뜯었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피의 증기.
무릎을 꿇은 용주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용주에게서 흘러나온 피는 부서진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 * *
“…….”
서서히 떠오르는 의식.
극심한 두통에 몸서리치던 용주는 눈을 떴다.
바닥에 처박힌 머리는 땅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일어나야 해.’
본능적으로 든 생각에 용주는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왼쪽으로 기우뚱하고 기운 몸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왼팔이 없었다.
양발이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 그랬었지.’
희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팔을 잘라낸 건 자기 자신.
발은….
‘젠장…!’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온 몸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았다.
‘녀석들은…. 윤현은. 고대의 재앙은. 프라이드는. 어떻게 된 거지?’
사방이 너무 고요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삼파전이 이루어졌었는데,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윤은….’
거기에 생각이 미친 용주는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을 꿇는 단 하나의 동작만으로도 고통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용주.
고개를 든 용주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여긴 자신이 있던 카오스 게이트도, 원래 있던 세계도 아니었다.
윤현도, 고대의 재앙도, 프라이드도.
서윤도 없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부서진 세계.
회색 재에 뒤덮인 검은 대지와 붉은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하늘.
깨진 유리조각처럼 흩뿌려져 있는 세계의 조각들은 서로 다른 풍경을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날아다니고 있는 건.
‘사신형 언노운….’
그 날.
그곳에서 봤었던 바로 그 녀석들이었다.
‘사후 강직. 스팀팩.’
용주는 몸을 강제로라도 움직이게 만들려고 했다.
이 두 가지 스킬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떠한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스킬이 발동되지 않았다.
‘저 녀석들이 대체…. 여기는….’
어느 것 하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마지막은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그 기억이었다.
그때 느꼈던 강렬한 충동들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후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쓰러졌었는지조차.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용주는 녀석들을 주시했다.
사신형 언노운들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을 뿐.
변화가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 글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퀘스트나 레벨업 같은 걸 알려주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이건….
점자였다.
‘점자라고?’
점자로 기록된 메시지.
딱 한 번 이런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봤던 메시지.
그건 유일하게 그자가 자신에게 남겼던 메시지였다.
‘그렇다는 건 설마….’
마른침을 삼킨 용주는 점자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문장.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삼켜지지 마라.
담지 못할 물을 받은 그릇은 넘치고 깨질 뿐이다.]
* * *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주는 두 눈을 깜빡였다.
보이지 않았다.
부서진 세계도.
사신형 언노운도.
점자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그곳에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병원 침대 위였다.
불 꺼진 병실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젠장….’
용주가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기억에 커다란 공백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팬텀은?
고대의 재앙은?
카오스 게이트는?
부서진 세계와 점자는?
‘서윤은?!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된 거지?!’
순간 스쳐간 불길한 예감.
애써 그 불길함을 부정한 용주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흠칫 놀라 멈춰서는 용주.
용주의 눈동자엔 자신의 왼손이 비치고 있었다.
‘분명 잘라 냈었는데….’
용주는 손을 움켜쥐어 보았다.
이질감은 없었다.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재앙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녀석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통증도 전부 사라졌잖아.’
왼팔 외에도 상처는 무수히 많았다.
그 많던 상처들이 전부 아물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른 건지 기억에 없었다.
‘아니, 다른 건 일단 접어두자. 일단은 녀석들이 먼저야.’
그렇게 생각을 굳힌 용주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그런데.
양쪽 다리의 느낌이 달랐다.
왼쪽 다리가….
어쩐지 훨씬 더 무거웠다.
‘뭐지?’
의아함보단 불안함이 담긴 용주의 눈동자.
그 끝에 머물고 있는 건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늦잠꾸러기네. 아니, 부지런한 건가?”
잠에 취한 눈을 비비고 있는 건.
수지였다.
“안수지?!”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화장 안 한 얼굴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네가 왜 여기….”
하던 말을 멈춘 용주는 왼팔을 짚었다.
기억 속 공백의 한 조각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거… 네가?”
“응. 내가 붙였어.”
“그래. 그랬었어. 내 상처도 그럼….”
용주의 수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근육이 거의 다 망가져 있었어. 양쪽 아킬레스건이 다 반듯하게 잘려서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고. 몸을 관통하는 깊은 상처가 있었어. 한 걸음 움직이기는커녕 숨을 쉬면서 횡격막이 움직이는 것조차 아팠을 거야.”
“녀석들은?!”
용주가 곧장 주제를 돌렸다.
녀석이라면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넷 다 무사하니까.”
“…….”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다.”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말로 튀어나왔다.
“네가 마지막. 이걸로 전원 무사한 셈이네. 축하해.”
자리에서 일어난 수지가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게이트는 어떻게 됐지?”
“아쉽게도 팀 H의 이름으로 받았던 건 실패 처리 됐어. 게이트를 클리어한 건 지원을 나간 다른 헌터들. 나도 거기 있었고.”
“…설마 게이트가 안정화되기라도 했었던 거냐?”
용주의 간담이 순간 서늘해졌다.
게이트엔 워커가 있었다.
게이트 안정화에 필요한 시간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 게이트는 안정화 전에 클리어했어. 길드에 지원 요청이 있었거든.”
“지원 요청? 누가?”
“임승우 헌터. 보다 정확히는 서예나 헌터의 요청을 받은 임승우 헌터였지.”
“예나가?”
“응. 내가 도착했을 땐, 한 명 빼곤 전부 전투 불능 상태였어. 다들 입구 근처에 기대어져 있었지. 떨어진 팔도 하나 있었고.”
용주와 좀 더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수지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디까지 기억해?”
수지의 물음에 용주가 잠시 망설였다.
팬텀.
녀석들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습격을 받았었다. 팬텀이란 녀석들에게. 녀석들은 우릴 공격해왔고, 우린 그들을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전투 도중에 서윤에게 유효타가 들어갔고….”
“거기까지?”
“…그래. 전투의 중간부터 기억에 공백이 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 있는지, 팬텀은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음…. 그럼 그 중간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네.”
“중간 이야기?”
“응. 서윤이란 헌터가 그랬거든. 너라면 전투의 마지막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 근데 너도 모른다는 건 까마귀… 아니, 그 팬텀이란 사람들의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게이트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은?”
“아무것도 못 봤대.”
“그렇다는 건….”
“이형 워프 장치. 팬텀도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장치를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
잠시 생각에 잠긴 용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면 A급 이상의 헌터들 중에 팬텀이 있을 수도 있다든가.”
팬텀엔 윤현이 있었다.
프라이드와 다른 세 사람을 습격한 헌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녀석이 헌터임은 너무도 확실했다.
A급 이상의 헌터들 중에 그런 자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순 없었다.
“…해가 뜨면 아마 바빠질 거야. 미리 푹 자둬.”
수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뻗은 용주는 그런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까마귀…라고 했지. 길드는… 너는 팬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냐?”
수지의 말에 섞여 있던 한 단어.
그걸 콕 집어낸 용주가 물었다.
용주의 목소리엔 어딘가 가시가 돋아 있었다.
“최근 들어 헌터들이 습격당하는 일들이 있었어. 그 배후에 있는 게 팬텀이고.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수지가 한 호흡을 쉬었다.
“팬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어. 스킬을 사용하고, 이형 결정체를 빼앗아 간다. 지금까지 알려진 건 그 정도였어. 팬텀이라는 이름 자체도 이번에 들어서 처음 알게 된 거고.”
“…….”
“길드에서 특별 조사관이 나올 거라더라.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해서.”
“특별 조사….”
전혀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비밀의 방 사건을 겪은 후 만났던 차동제라는 사람도 특별 조사관이었으니까.
“그럼 난 이제 부탁받은 일을 하러 갈 건데. 어쩔래? 같이 갈래?”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부탁받은 일?”
“응. 네가 일어나면 바로 알려달라고. 무려 다섯 사람에게서 부탁을 받았거든.”
“…….”
“그중 넷한텐 지금. 나머지 하나한텐 해 뜨면 알려줄 건데. 어때?”
넷과 하나.
용주의 머릿속에 대충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전자는 팀 H의 네 사람.
후자는 특별 조사관 정도겠지.
“가자.”
조용히 일어난 용주가 딱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지금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리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 한 결정이었다.
녀석들.
걱정하고 있었을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