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닉네임 좀비헌터-133화 (133/357)

133화

* * *

노을이 내려앉은 횡단보도.

책가방을 멘 예은은 신호를 기다렸다.

‘문제집도 샀고, 샤프랑 지우개도 새로 샀고, 가다가 시장 들러서 찬거리만 좀 사가면 되겠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신호등이 바뀌었다.

옆 사람들보다 한발 늦게 출발한 예은은 평소와 다름없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아앗!”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한 여성이 뒷사람에 밀려 넘어지는 게 보였다.

학생이 보고 있던 파일은 날아가듯 떨어졌고, 들어 있던 내용물이 횡단보도에 흩뿌려졌다.

“빨리 와! 이러다 붙은 자리 없겠어!”

“말 안 해도 뛰고 있거든!”

“트롤들끼리 빨리 가서 뭐 할 건데? 캐리머신 모셔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횡단보도를 벗어나 도로를 가로질렀다.

고의는 아닌 것 같다만, 사과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학생들을 흘겨본 예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도와드릴게요.”

자세를 낮춘 예은은 인쇄물들을 줍기 시작했다.

신호등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저… 정말로 감사해요. 혼자였으면 다 못 주웠을 거예요.”

횡단보도를 건너온 여성이 감사를 표했다.

“고맙긴요. 당연한 거 가지고.”

인쇄물들을 건네주려던 예은의 눈에 익숙한 문장들이 들어왔다.

여기 적힌 시조.

분명 문제집에서 본 적 있는 것이었다.

틀리고, 해석을 봤는데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 기억에 남았다.

“감사의 표시로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안경을 고쳐 쓴 여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괜찮아요. 그러려고 도와드린 것도 아닌데요, 뭘.”

예은이 정리한 인쇄물들을 건넸다.

“그래도….”

“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예은이 검지를 세워 보였다.

“10분 아니, 딱 15분만 시간 내주세요. 음료는 각자 내는 걸로!”

“15분? 왜요?”

“그게 언니한테 물어보고 싶은 문제가 있거든요. 거기 제일 앞장에.”

예은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음… 그렇구나. 그렇게 설명해 주시니까 막혔던 게 뻥 뚫린 기분이에요.”

붐비는 카페.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고3인 줄 몰랐어요. 더 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학생이 진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힛! 엄청 쉽고 이해하기 편한 설명이었어요.”

“저도 처음에 엄청 애먹었었거든요. 제가 이해한 방법으로 이해됐다니 뭔가 뿌듯하네요.”

“언니한테 과외받는 학생은 좋겠어요.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설명도 잘해 주니까요.”

“과외?”

놀란 여성이 손사래를 쳤다.

“과외라니, 오해예요. 저 그럴 만한 능력도, 자격도 없는걸요. 전 그냥 평범한 재수생이에요. 제 주제에 과외는 무슨….”

스스로를 재수생이라고 밝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본인을 그렇게 밝히는 게 창피했다.

“음… 그러셨구나.”

“네, 그렇다고요.”

여성이 빨대를 깨물었다.

원래라면 노량진에 있는 고시텔에 있을 시간이었다.

오늘 여기 올라온 건 그냥 엄마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 어리광쟁이에겐 너무 사치스러운 평가이지 않은가.

“언니도 고생이 많네요.”

“고생…?”

“그야 그렇잖아요. 한 번 준비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걸 두 번이나.”

“…….”

돌아온 대답에 여성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과외 선생님에서 재수생으로.

자신에게 붙어 있던 명찰의 급수가 수직 하락 한 상태였다.

그에 따라 당연히 평가도 나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럼 언니도 올해 수능 준비하고 계신 거겠네요.”

“네… 그렇죠.”

“힘들진 않아요?”

“수험생한테 그런 말 들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겸연쩍게 뺨을 긁적인 여성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괜찮아요. 달리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하면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으니까요.”

“멋진 부모님이네요.”

예은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라면 역시 부모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부모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아니에요.”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두 분도 물론 같은 생각이시겠죠. 그렇지만 이 말을 해준 분은 부모님이 아니에요.”

“그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이 해준 말이에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요?”

“말했잖아요. 이상하게 들릴 거라고. 그렇지만 정말로 그날 딱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였어요. 가장 힘들고 어두운 곳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줬죠.”

여성의 눈에 힘이 실렸다.

“그날 다짐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해서, 그 사람 앞에 서겠다고. 스스로 보기에 부끄럼 없는 모습으로 반드시 다시 만나겠다고.”

이야기를 이어 가던 여성이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이런 오글거리는 소리나 하고.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멋진 사람이네요. 만나본 적은 없지만, 듣기만 해도 알 것 같아요.”

예은이 보고 있던 인쇄물을 돌려주었다.

“언니라면 분명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열심인걸요.”

종이만 만져봐도 알 수 있었다.

이게 결코 한두 번 보고 만 게 아니란 것을.

“…고마워요.”

두 손으로 인쇄물을 건네받은 여성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조금 전에 이마를 콕 찌르던 그 사람이 모습이 겹쳐 보였었다.

“슬슬 일어날까요? 15분만이라고 해놓고,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 버렸네요.”

“저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여성이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 괜찮으면, 번호… 교환하지 않을래요? 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혹시 모르는 거 있을 때 서로 물어보고 봐주면 쌍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여성이 예은의 눈치를 살폈다.

“한마디로 온라인 스터디 하자는 말씀이시네요?”

“아… 비슷할 거예요.”

“저야 좋죠! 나중에 귀찮다고 차단하기 없기에요!”

핸드폰을 받은 예은이 자기 번호를 입력했다.

“이예은이에요. 언니는요?”

“은희. 김은희예요.”

* * *

‘다음은 경북 영덕에 장사리인가.’

새하얀 침대에 앉은 용주가 인벤토리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았다.

그곳이 잊힌 영웅들의 성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다음 퀘스트 게이트였다.

퀘스트의 잔여 기일은 21일.

많다고 하면, 제법 많은 일자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용주의 시선이 반응했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은정이었다.

“손은 좀 어때요?”

진료기록부를 살피던 은정이 물었다.

용주는 왼손을 보였다.

왼손은 원래 모습을 되찾아 있었다.

“좀 잠잠하다 싶으시더니, 이번엔 손을 완전 박살을 내 오시고. 하여튼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요. 약간이긴 하지만 동상도 있었고.”

한숨을 내쉰 은정이 팔짱을 끼었다.

“용주 씨 회복이 신기할 정도로 빨라져서 망정이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몇 달은 치료했어야 했을 거라고요. 대체 뭘 하면 손이 그 모양 그 꼴이 되시는 거예요.”

“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말이야.”

“에휴. 그 일이란 거 두 번 했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고요. 정말이지, 조금은 몸 좀 사리시란 말이에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은정이 용주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캔으로 된 수정과였다.

“방금 막 뽑아서 시원할 거예요.”

“그래. 고맙게 마시지.”

캔 뚜껑을 딴 용주는 수정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용주의 얼굴을 보던 은정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까치발을 들고 마주했던 용주의 입술.

흠칫 놀란 은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용주가 물었다.

은정의 방금 그 행동.

잠을 쫓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으응. 아니에요. 멀쩡하다고요.”

“그러냐.”

무심하게 답한 용주가 캔을 내려놓았다.

“냥 선생님, 분위기 좋을 때 방해해서 대단히 죄송한데, 잠깐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병실로 들어온 한 간호사가 차트를 보였다.

은정 또래의 젊은 간호사였다.

“승아 씨?! 제가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아 달랬잖아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은정이 소리쳤다.

“후후후후. 부끄러워하시는 모습 보니 더 놀리고 싶잖아요. 참을 수가 없다고요.”

그리고 거기에 돌아온 건.

어딘가 음흉해 보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냥 선생님?”

다시 둘만 남게 된 병실에서 용주가 물었다.

그녀를 부르는 많은 간호사들을 봐왔지만,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깐요.”

은정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날 사건이 SNS에 떠돌아다니고 있단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까지 닿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고, 그 사진을 접한 사람이 병원 내에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입원하셨던 헌터분이 그러시는 걸 들었어요. 좀비 헌터란 사람이 요즘 아주 난리라고. 그거 용주 씨 이야기 맞죠?”

은정이 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같은 이명이 붙은 헌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 그렇겠지.”

“맨날 다치고, 깨지고. 제가 보기엔 항상 같은 용주 씨 같은데, 용주 씨도 알게 모르게 점점 변하고 있나 봐요. 좋은 쪽으로요.”

은정이 입꼬리를 올렸다.

헌터로서의 실력이나 비정상적인 회복 속도 등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용주라는 사람은 확실히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용주를 안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쌀쌀맞고, 퉁명스러운 데다가 굉장히 공격적이라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있나도 싶었었지.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변화가 정확히 언제라고 정확하겐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변화가 은정은 싫지 않았다.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려던 그의 모습이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 졌으니까.

“뭐, 그러냐.”

“그보다, 퇴원하시면 바로 또 일 나가시는 거예요? 큰 이상은 안 보이긴 하는데 조금 더 안정을 취하라고 권해드리고 싶은데요.”

“미리 잡아둔 임무가 있다. 며칠을 권하든 아마 그 이하겠지.”

“그런가요. 뭐, 큰 기대는 안 했어요.”

은정이 어깨를 들썩였다.

“다치지 말란 말은 안 할게요. 다쳐도 좋고, 좀비 소동이 나도 좋으니, 두 발로 걸어오시라고요.”

언젠가 한 번 했던 것 같은 말을 되풀이한 은정이 캔 옆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작고 동그란 약통이었다.

“영양제에요. 용주 씬 남들보다 많이 다치고, 피도 더 자주 흘리니까 더 챙겨 먹어야 한다고요.”

할 말을 마친 은정이 뒤돌아섰다.

“그럼, 일이 많아서 먼저 실례할게요. 하루 한 번, 꼭꼭 챙겨 드세요.”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띤 은정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약통의 뚜껑엔 누군가 손으로 그린 강아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 *

일렁거리며 열린 차원의 균열.

균열에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내 모두 역병 의사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 여기가 녀석이 있는 게이트란 말이지?”

카오스 게이트를 마주 본 윤현이 이야기했다.

“엔비 님께서 그러셨으니, 100% 신뢰할 수 있는 정보지. 그분께선 틀린 말을 하신 적이 없으시니까.”

도준이 어깨를 풀었다.

“그렇다곤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거,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시험으로 진입할 수 있던 건 분명 D급 게이트였다. 실제로 D급의 기록도 여럿 있었고. 하지만 여긴 C급 게이트. 어째서 녀석들이 여기 있는 걸까?”

첫 번째 손가락을 펼친 윤현이 곧바로 두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그리고 엔비 님은 그런 정보를 다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걸까?”

“음… 그게 그렇게 중요해?”

“생각하는 건 중요한 거다. 너처럼 목 위에 얹기만 한다고 다 머리인 건 아니라고.”

“또 시작이네. 또 말해야겠어. 난 말이야.”

“내 고참이라고.”

“그래. 잘 알고 있네.”

벌서 지겨운 도준의 말에 윤현이 입술을 실룩였다.

가면 아래에서 욕설을 중얼거린 그였다.

“흠, 그래. 생각해 보니 그래도 하나는 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윤현의 손을 타고 검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긴 하지. 팬텀으로서의 첫 번째 임무. 반드시 완벽하게 해내 보이겠어.”

화염을 움켜쥔 윤현이 게이트 내부로 진입했다.

이형 워프 장치가 만든 균열은 일그러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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