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별 무리의 인도를 따라 움직인 두 사람은 드워프들이 만들어 놓은 입구를 통해 베히모스의 몸 밖으로 나왔다.
“하아…. 하아….”
지상으로 올라온 설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베히모스의 머리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더 가야 하건만.
체력도 마나도 이미 한계였다.
“…….”
점점 느려지는 그녀에게 발맞추던 용주는 오른손만으로 그녀를 덥석 둘러업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설녀가 놀라 외쳤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
용주가 이전에 한 번 해줬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설녀의 발버둥이 금방 잠잠해졌다.
“여기쯤이면 될 거예요.”
별 무리를 따라 달린 용주가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멀리 땅끝으로 통하는 비탈길이 보였다.
베히모스의 울음소리는 심장을 울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제가 한번 말을 걸어볼게요.”
목청을 가다듬은 설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설녀의 노랫소리는 베히모스에 비하면 작디작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베히모스의 소리에 묻히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며 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을 여기까지 안내해주던 별 무리는 하늘로 흩뿌려지며 은하수의 돔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30초 정도 계속되던 설녀의 노래는 차차 잠잠해졌다.
설녀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분노… 슬픔… 고통…. 이 말만 반복하고 있어요. 제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아요.”
가슴에 손을 올린 설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베히모스는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여기 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대로면….
‘아니야. 이제 겨우 한 번 해봤을 뿐이잖아. 포기하지 마.’
스스로를 다잡은 설녀는 노래를 계속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베히모스는 점점 더 추락할 뿐이었다.
‘베히모스를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설녀의 분투를 지켜보던 용주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에게 많은 것을 맡기긴 했지만, 이건 그녀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베히모스가 반복하고 있다는 말은 역시 13번째가 떠오르는 말들이었다.
그가 베히모스의 정신에 관여하고 있다.
혹은 오염시키고 있다고 봐도 좋은 상황이겠지.
‘혹시 그거라면 도움이 될지도….’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별의 노래.
실체화된 별의 노래는 가야금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밤하늘로 만들어진 공명동엔 별로 짠 12개의 줄이 감겨 있었다.
생각보다 큰 크기에 용주는 일단 악기를 눕혔다.
도저히 들고 연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주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악기의 크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악기를 연주하는 법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이야기도 없었기에 흉내를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게다가 현악기라 함은 두 손을 다 써야 하는 게 보통 아니겠는가.
지금의 왼손은 움직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별빛이 용주의 오른손에 떨어졌다.
▷ ‘별의 인도’가 느껴집니다.
- 별의 노래가 당신을 이끕니다.
빛이 감도는 용주의 손.
무언가에 이끌리듯 움직인 용주의 손은 가야금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부드럽게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건….’
한 손으로 뜯고 퉁기는 소리는 완벽한 소리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주엔 분명 흐름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별들의 노랫소리….’
설녀의 귓가에 들린 베히모스의 목소리.
처음으로 들린 다른 단어에 설녀의 시선이 용주에게 향했다.
완벽하지 않은 반쪽짜리 연주.
그렇지만 거기에 베히모스는 분명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베히모스에게 목소리가 닿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고 있는 이 멜로디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하겠지.
그가 연주하고 있는 악기도.
그가 연주하고 있는 곡도.
별들이 알려주었던 것들이었으니까.
“왼손은 제게 맡겨주세요.”
용주의 왼편에 자리를 잡은 설녀가 가야금에 손을 올렸다.
용주의 연주에 맞춰 남은 반쪽을 연주하는 설녀.
잠시 멈췄었던 그녀의 노랫소리는 다시 한번 밤하늘을 울렸다.
* * *
끊임없이 낮아지던 고도가 멈춰선 건 연주가 막 끝날 무렵이었다.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베히모스의 소리는 맑고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닿았어…. 닿았다고요!”
연주를 멈춘 설녀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용주를 와락 끌어안았다.
“드디어 제 목소리에 답해줬다고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는 설녀의 얼굴.
3초 정도 용주를 끌어안고 있던 설녀는 급하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뭐… 신경 쓰지 마라.”
용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용주의 손을 움직이던 빛무리는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 베히모스의 추락을 저지했습니다. 열두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12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지막 줄을 뜯은 용주의 앞에 마지막 시련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대항력이 4 상승했습니다.
▶ 출구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하늘의 사슬’을 획득했습니다.
- 대상이 되는 자를 그 자리에 고정시킵니다.
▷ ‘석조 삼형제 소환서’
- 계승자를 맹목적으로 섬기는 세 명의 석조 드워프를 소환합니다.
▷ ‘잊힌 영웅들의 성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됐습니다.
- 잊힌 영웅들의 영혼을 모두 거두십시오.
마침내 장황했던 퀘스트의 끝을 알리는 알림이 나타났다.
“후우….”
마침내 찾아온 안도감.
긴장의 끈을 놓은 용주는 이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해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
그게 아프거나 힘들다는 감정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이게 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설녀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말하려던 문장에 또 공백이 있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공백이었다.
“아아아~! 이젠 저도 알아야겠어요! 이렇게 말 못 하는 건 이제 싫다고요!”
고개를 저은 설녀가 용주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름… 알려주세요.”
자신감 넘치던 그녀의 행동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남에게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 이름은 들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들을 거라고요. 당신 이름.”
“뭐, 그러냐.”
무심하게 대답한 용주는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용주….”
용주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설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외웠다는 제스처인 모양이다.
“이게 다 용주… 씨… 님…?”
그런 자신감과 달리 설녀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작아졌다.
아무래도 이름 뒤에 붙일 호칭으로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뭐라 불러도 상관없으니.”
“헤헷, 그럼 그럴게요. 이게 다 용주 씨 덕분이라고요. 혼자였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울고만 있었을 거예요.”
싱긋 웃어 보인 설녀의 눈에 한 가지 이상이 감지되었다.
자신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빛무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 근데 저건 뭘까요?”
클리어 포탈을 가리킨 설녀가 물었다.
친구들이 만든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별것 아니다. 그냥 일이 잘 끝났고,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는 신호지.
‘헤어져…?’
설녀가 본능적으로 용주의 손을 붙잡았다.
용주의 눈동자에 비친 설녀의 동공은 평소보다 몇 배로 커져 있었다.
“가신 다고요? 어디로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돌아온 대답에 설녀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용주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부드러웠다.
“그런가요. 그럼 붙잡을 순 없겠네요.”
설녀가 고개를 돌렸다.
붙잡고 싶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고, 욕심이었다.
“뭐… 잠깐 정도라면 붙잡혀 줄 수도 있긴 하지.”
용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퀘스트 게이트의 시간이라면 현실과는 무관했다.
조금 더 시간을 사용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그걸로 저 표정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수 있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의 가치는 있으리라.
“정말요?”
“그래.”
“정말 정말요?”
“…그래.”
두 번이나 의사를 확인한 설녀는 용주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설녀의 손에 이끌린 용주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 * *
‘어디로 가나 싶더니, 여기였나.’
설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용주도 아는 곳이었다.
설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머물던 곳.
신전에 도착한 그녀는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잠깐만이라고 해놓고 벌써 잠깐은 훨씬 지난 것 같네요.”
목덜미를 긁적인 설녀가 멋쩍은 듯 이야기했다.
“용주 씨도 여기 알고 계시죠?”
“뭐, 대충은.”
“욕심 같아서는 좀 더 제대로 된 상태에서 초대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걸음을 옮긴 설녀는 제단 앞에 섰다.
제단에 올라간 눈물 결정.
그곳에서 시작된 별빛은 제단 주변을 감싼 연못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뒤로 돌아선 설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제가 왜 용주 씨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아요?”
“글쎄. 그거야 이제부터 네가 알려주겠지.”
“그거야 그런데요. 수수께끼라고요, 수수께끼. 한번 맞춰보세요.”
그녀를 바라보던 용주의 시선이 연못으로 향했다.
흐르는 밤하늘 속엔 황도 12궁의 마크가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용주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는 게 지금은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눈이 바로 앞에서 빛나고 있었으니까.
“히힛, 그럼 보여드릴게요.”
설녀의 손을 떠난 눈송이가 연못을 한 바퀴 가로질렀다.
▶ 돌발 퀘스트 - ‘그리움의 별’
- 다시 한번 시작되는 별들의 탄생을 목도하십시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황도 12궁은 나타난 자리에서 모두 잠들어 있었다.
그들 모두 그녀의 기억 속에서 봤던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요정처럼 작고 아담했다.
“용주 씨가 구해주신 제 친구들을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힘이 다해서 다들 쪼끄매지고, 잠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 모습들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 돌발 퀘스트 - ‘그리움의 별’을 완료했습니다.
▷ 대항력이 1 상승했습니다.
▷ ‘황도의 오르골’을 획득했습니다.
- 별의 자장가가 담긴 오르골로 듣는 이들을 잠들게 합니다.
- 잠든 이들에게 걸린 해로운 마법을 모두 해제합니다.
별들의 모습을 확인한 용주는 또 하나의 퀘스트 완료할 수 있었다.
그냥 지나쳐도 존재 자체도 몰랐을 퀘스트였다.
“용주 씨 아니었으면, 제가 기다리는 이도, 저를 기다려줄 이도 없었을 거예요.”
설녀가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네요. 드워프들도 그렇고, 그 13번째라는 분도 그렇고.”
베히모스에 모든 드워프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목숨이 사라진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냐.”
연못으로 다가간 용주는 연못에 한 가지 물건을 올려놓았다.
어디까지나 어쩌면의 영역에서 한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영 헛다리만 짚은 건 아닌 모양이다.
별의 씨앗.
빈자리에 놓인 씨앗에게선 마크가 나타나고 있었다.
13번째.
뱀주인자리의 마크였다.
“이건….”
놀란 설녀가 씨앗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사견궁은 형태를 이루진 못했다.
하지만 다른 별자리들과 이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3번째. 녀석이 쓰러지면서 남긴 물건이다. 아무래도 녀석도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닌 모양이군.”
용주가 어깨를 들썩였다.
“어떻게 할 거냐?”
“별에서 아까 느꼈던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아요. 완전 아기로 돌아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연못에 손을 담근 설녀가 이야기했다.
그녀의 두 손바닥 안엔 사견궁의 마크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깨어나는 데 얼마가 걸릴진 모르겠지만요.”
“그러냐. 그럼 그렇게 하면 돼. 난 마녀에게 전권을 양도했으니까.”
“…….”
자리에서 일어난 설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용주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이건 제 작은 감사의 표시에요. 마지막까지 신세를 졌으니 저도 뭐라도 하나는 드려야죠.”
▷ ‘설녀의 수호부’를 획득했습니다.
- 목숨을 위협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 자동 발동됩니다.
- 해당 피해를 무효로 합니다.
- 이 효과가 발동된 수호부는 소멸합니다.
수호부를 받아든 용주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저 혹시 정말정말 마지막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될까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설녀의 목소리.
“머리… 머리에 손 한 번만 더 올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얼굴을 붉힌 설녀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어째서였을까.
그가 그렇게 해줬을 때 의지가 되고, 마음이 엄청 편안해졌었다.
그러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대고 싶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
용주의 발소리는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설녀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린 용주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