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 녀석, 진심으로 널 죽일 생각이니까.”
간발의 차로 설녀를 구해 낸 용주가 이야기했다.
“저, 정말로 몰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의 설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울먹임을 머금고 있었다.
“그의 외로움, 그의 아픔, 그의 슬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어요. 그것도 모르고 웃으면서 지냈다고요.”
그녀가 자책하는 와중에도 화염은 두 사람을 쫓았다.
설녀의 죽은 눈과 굼뜬 움직임에 용주는 그녀를 둘러업었다.
설녀의 놀란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만 꾸물거렸었다면, 지금 일어날 폭발에 말려들었을 게 분명했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출구가 있던 곳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곳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각적 변화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넌 그걸 정말 네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늘을 곁눈질한 용주가 물었다.
까만 하늘엔 뱀주인자리가 그려지고 있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알아차렸을 턱이 없지.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
고개를 든 설녀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용주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난 외부인이고, 아는 바도 별로 없다. 하지만 녀석이 그랬지. 자신은 빛을 내지도, 말을 걸지도 않고, 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고.”
“네… 분명 그랬었죠.”
“멀리 숨어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럼 그냥 스토커 아니냐.”
“스토커…?”
“그래.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게 보이는데. 녀석의 슬픔도, 녀석의 기다림도 다 스스로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 집착도 그 정도면 병이지.”
90도로 방향을 꺾은 용주가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뱀주인자리에서 떨어진 13개의 유성우는 몇 초 간격으로 두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스토커가 천 년을 기다렸든, 만 년을 기다렸든, 그게 네 잘못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어진 12번의 폭발을 피해낸 용주는 마지막 유성을 마주했다.
“그게 네 모든 걸 뺏어갈 권리가 될 수는 더더욱 없지. 절대로.”
“……!”
타오르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유성은 지면에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용주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설녀는 그에게서 내려왔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네가 결정할 일이지. 마녀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었던가?”
“…….”
“하지만 네가 무슨 결정을 하더라도 난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그게 내 의지니까.”
용주의 확고한 한 마디에 설녀의 눈빛이 살아났다.
아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그러셨었죠.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라고.”
“그래. 그랬었지.”
“과거 있었던 일을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막는 건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해보려고 해요.”
설녀가 오른손을 펼치자, 어둠 속에 한 줄기 오로라가 수놓아졌다.
사견궁을 감싸며 펼쳐진 초승달 모양의 오로라.
“그게 설령 비극이라 할지라도.”
일순간 얼어붙은 오로라는 강렬한 냉기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에 휘말린 사견궁이 충격에 주춤거렸다.
“린…! 네가 어떻게 나한테…!”
분노에 치를 떤 사견궁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당신과 전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당신을 모릅니다. 우린 친구가 아니에요.”
“친구가… 아니라고?”
사견궁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있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그럼 난 난 뭔데?”
“제 작은 행복을 빼앗은 사람. 절 마녀로 만든 사람. 그리고 이제부터 제가 막아야 할 사람.”
“막아…? 나를? 아핫! 아하하핫!!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린 사견궁이 커다란 비석 하나를 만들었다.
비석에는 열두 별자리의 이름과 설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잃을 게 없는 나를 네가 무슨 수로 막겠다는 거야? 네가 알기나 해? 나의 상처를! 나의 고통을! 나의 증오를!!”
비석에서 시작된 불기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뻗어 나갔다.
화마가 노리는 건 설녀.
코앞까지 다가온 불기둥을 정면에서 마주한 설녀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에 손끝에 닿은 불기둥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당신 말대로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렇지만 결심했어요. 잃지 않겠다고. 그러니 지켜낼 거예요.”
불꽃을 타고 뻗어 나간 얼음의 물결은 그가 만든 비석을 산산이 조각냈다.
12개로 갈라진 얼음 조각.
설녀의 힘에 놀란 사견궁은 12개 파편에 비치는 12명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힘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잃을 게 없는 사람은 강하지.”
바로 정면에 있던 얼음 거울이 깨지며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신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하지만….”
날카롭게 내리꽂힌 용주의 일격이 사견궁의 가슴을 꿰뚫었다.
유리창처럼 깨져 나간 몸의 파편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지킬 게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처절하게 발버둥 칠 수 있다.”
“크윽…! 커어억!”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사견궁의 몸에 수십, 수백 개의 균열이 생겨났다.
중심부에서부터 깨져 나가는 사견궁의 몸.
“안 돼. 이렇게 끝날 순 없어. 혼자는 싫어. 혼자는…!”
농구공만 한 구멍이 생긴 사견궁이 설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린…!”
뻥 뚫린 가슴에 나타난 붉은 핵은 공간을 채웠던 모든 어둠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응집된 힘이 방출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치이이익!!
사방에 진동하는 고기 굽는 냄새.
눈보라를 일으킨 설녀는 서둘러 화염을 진화하고 나섰다.
“…….”
이번에도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했어.’
이번엔 전과 달랐다.
깊게 파인 폭발의 진원지에 있는 건 얼음으로 만든 크리스탈.
크리스탈 안쪽엔 그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얼음에 갇힌 탓에 제대로 움직이고 있진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분명 자신을 보고 있었다.
* * *
▷ 대주교 ‘라’를 제거했습니다. 열한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110 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별의 비수’를 획득했습니다.
- ‘별의 씨앗’을 획득했습니다.
▷ 별의 비수
- 황도의 13번째 별자리의 저주가 응집된 단검.
- 적중 시 ‘사견궁의 저주’가 자동 발동됩니다.
‘사견궁의 저주’
: 별의 핵을 만들어 일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이후 폭발해 큰 피해를 입힌다.
: 사용자에게도 동일한 피해를 입힌다.
- ‘사견궁의 저주’를 사용하기 전까지 별의 비수는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 ‘사견궁의 저주’를 사용한 별의 비수는 사멸됩니다.
▷ ‘별의 씨앗’을 획득했습니다.
-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별의 잔해입니다.
- 희미한 별의 힘이 느껴집니다.
▶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 고통의 낙인 (Lv.1)
- MP 소모량 10
- 상대에게 고통의 낙인을 새깁니다.
- 계승자가 받는 데미지가 낙인이 새겨진 자에게도 적용됩니다.
- 지속시간이 만료되거나, 계승자가 사용을 중단할 경우 효과는 종료됩니다.
▶ 부정한 개입. (Lv. max)
- 대상자의 죽음에 개입합니다.
- 대항력이 영구적으로 1 감소합니다.
- 자신의 HP를 소모해 대상자의 상처를 회복시킵니다.
- HP 소모량은 대상자의 상처에 비례해 증가합니다.
- 이미 죽음이 지나간 자에겐 사용할 수 없습니다.
땅을 밟은 용주의 앞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나열되었다.
분량은 많았지만 핵심만 정리하자면 네 가지였다.
10번째 시련 클리어.
새로운 아이템.
새로운 스킬.
그리고 기존에 있던 몇몇 스킬들의 레벨업.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건 ‘부정한 개입’이라는 액티브 스킬이었다.
맥스 레벨로 시작하는 이 스킬에는 유례없는, 대항력 감소라는 페널티가 달려 있었다.
고개를 돌린 용주는 설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급하게 달려온 그녀는 힘에 부친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해된 건 아니죠?”
식은땀을 닦아낸 설녀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용주가 가벼운 손 제스처로 화답했다.
호박 속에 들어간 벌레의 시점이나.
빙하 속에 들어간 공룡의 시점이 이런 걸까 싶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
그 말을 들은 직후 설녀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용주의 왼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 손이….”
설녀가 용주의 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용주는 그제야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때였나.’
녀석의 몸에 핵이 나타났을 때가 떠올랐다.
손이 이 모양이 된 건 핵에 빨려 들어갔던 그때였겠지.
‘아직 시련이 하나 남았는데….’
손을 바라보던 용주의 시야가 순간 흐릿하게 번졌다.
심한 두통과 함께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스팀팩의 부작용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용주를 부축한 설녀가 물었다.
머리를 짚은 용주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 문제없다.”
“문제없긴요? 지금 제대로 서 계시지도 못하시잖아요!”
“그런가…. 미안하지만 잠깐만 더 이러고 있어 주면 고맙겠는데.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네. 맘껏 빌려드릴게요. 아무리 오래 걸리셔도 계속 붙잡고 있을 거라고요.”
눈을 감은 용주는 페널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스팀팩의 효과가 가시며 뒤늦게 통증이 돌아왔다.
자연스러운 흔들림으로 손가락이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시체 뜯어먹기는 이번에도 불가능.
눈을 뜬 용주는 설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미안하지만, 내 이 왼손, 얼음으로 덮어줄 수 있을까?”
“손을?”
“그래.”
“아, 알았어요! 그럼 최대한 조심해서….”
설녀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집중시켰다.
용주의 손엔 아주 얇은 얼음막이 덮여 있었다.
‘좀 낫군.’
얼음이 손을 덮자 움직임이 최소화되었다.
온도가 내려가며 화끈거림도 좀 누그러들었다.
이제 남은 건 얼어붙은 피부와 재생이 힘을 내주길 기다리는 것뿐.
용주가 숨을 돌린 그때.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소리와 울림이 혈옥 내부를 울렸다.
‘이 소리는….’
용주는 기억을 더듬었다.
딱 한 번.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들어본 적 있었다.
“베히모스가… 울고 있어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설녀가 이야기했다.
그리고.
“……!”
순식간에 귀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설마.’
보이진 않았지만, 고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열두 번째 시련
- 베히모스의 추락을 저지하십시오.
‘추락하고 있다고? 그렇지만 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녀를 지키면 추락은 자동으로 빗겨 갈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네가 체온을 유지해 주면 괜찮은 거 아니었나?”
용주가 물었다.
“불가항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베히모스가 스스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스스로?”
‘그렇다는 건 녀석이 일으킨 마지막 일격이 베히모스에게 뭔가 악영향을 끼친 건가?’
설녀의 대답에 용주가 눈썹을 기울였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베히모스한테 가봐야 해요. 지금 이대로면 추락하고 말 거예요.”
설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베히모스의 머리 위. 거기라면 베히모스와 교감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진정시켜 볼게요!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진정시킬게요!”
설녀가 의지를 다지자 그녀가 가지고 있던 눈물 결정에서 한 줄기 은하수가 흘러나왔다.
혈옥의 출입구로 흘러간 은하수는 별 무리를 지으며 멈춰 섰다.
마치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