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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29화 (129/357)

129화

‘대주교 라….’

마법진의 중심에 있는 자는 분명 라였다.

혈옥은 인위적인 구조물이 거의 없는 공간으로.

베히모스의 몸속에 원래부터 있던 빈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마법진은 혈옥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바닥 쪽에 서클이 하나.

그리고 천장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서클이 또 하나 있었다.

대주교를 휘감고 있는 가시넝쿨들은 모두 그 두 마법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저게 의식이란 건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봐선 고문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벌인 일이라고 한다면 자해에 더 가깝겠지.

‘그런데….’

의식 자체도 기괴하긴 했지만, 더 이상하게 보이는 점은 따로 있었다.

‘석조 드워프들은 피를 흘리지 않았었는데.’

4기사단도.

이곳에서 베었던 다른 드워프들도.

붉은 피를 흘리지 않았었다.

처음엔 베히모스의 피가 녀석에게 떨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면을 적시는 피는 분명 녀석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녀석들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르단 건가.’

어째서 녀석만 다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설녀나 황도 12궁처럼.

존재 자체부터가 그들과 달랐을 수도 있었고,

선천적, 혹은 후천적 돌연변이일 수도.

특정 사건이나 물건 등을 계기로 변화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긴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멈추십시오!!”

용주가 속도를 높인 그때.

권위적인 여성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지이잉~!

그와 동시에 용주의 곁에 나타난 빛의 문자.

순식간에 옥죄여 오는 빛에 칼날을 댄 용주는 그대로 빛을 잘라냈다.

“제 구속을 깨뜨리다니. 마녀를 풀어준 건 당신인가 보군요.”

목소리의 주인은 종교재판관 세크.

떨어지는 대주교의 피를 온몸으로 받고 있던 그녀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희 신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걸음을 멈춘 종교재판관이 지팡이를 내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거기엔 깊은 분노가 녹아 있었다.

“글쎄. 그거야 일을 저지른 베히모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헛소리 집어치우십시오!”

또 다른 작은 마법진을 그린 종교재판관이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4기사단이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제 과오이고 불찰입니다. 평생 해야 할 속죄입니다. 13번째. 그자의 이야기를 의식해야 했습니다!”

마법진을 타고 피어오른 불길은 수십 마리 새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점점 수를 늘린 화염은 모두 용주를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 풀어준 마녀를 다시 제 앞에 데려온 건 당신의 과오이고 불찰입니다. 속죄를 위해, 성전을 위해 돌려받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을 방해하게 두진 않겠습니다!”

빗발치기 시작하는 불꽃!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기세로 맹진하던 새들은 급격하게 힘을 잃고 추락했다.

처음 생겼을 때 불꽃이었던 것들은 마지막엔 단단한 얼음 결정이 되어 있었다.

“지난번처럼 순순히 잡혀줄 줄 알고?!”

대주교의 마법진을 밟은 설녀가 손을 뻗었다.

파바바방!!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고드름들.

“겨우 그 정도론 어림도 없습니다!”

모든 얼음을 태워 버린 종교재판관은 지팡이를 겨눴다.

“라의 신념!”

광!!

지면에서 폭발하는 강렬한 화염.

화산처럼 터져 나가던 화염은 뿌리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 속에서 나타난 설녀는 그을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마녀…. 역시 마녀를 구속할 수 있는 건 라 님의 사슬뿐인가. 하지만….’

13번째는 사슬을 끊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구속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쉽게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해. 마녀 쪽을 무력화하면 지금보다 훨씬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어.’

힘을 집중시키던 종교재판관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뿔싸!’

13번째.

놈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가까운 곳까지 파고들어 와 있었다.

“라의 신념!”

작렬하는 화염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큭…!”

본인이 일으킨 폭발에 물러난 종교재판관은 자신의 목덜미를 짚었다.

목엔 선명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작렬하는 빛과 화염 속에서도 녀석은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었다.

‘이건 대체….’

상처는 분명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가슴 안쪽에 통증이 있었다.

베이거나 찢긴 것과는 전혀 다른 통증이었다.

통증 부위가 얼어붙은 것처럼 시렸다.

폭발을 뚫고 나온 용주는 속도를 유지했다.

설녀의 도움으로 피해를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었다.

종교재판관을 노릴 순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용주의 눈동자가 담고 있는 건 가시넝쿨에 휘감긴 대주교.

공간 균열의 반지를 사용한 용주는 단숨에 그의 가슴에 검을 욱여넣었다.

▷ ‘라의 의식’을 저지하기 전까진 대주교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칼날이 대주교에 몸에 닿는 순간.

빛의 폭발이 용주를 덮쳤다.

충격에 튕겨 나온 용주는 뒤로 길게 밀려났다.

보이는 것과 달리 이쪽이 입은 데미지는 제로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쪽이 준 데미지 역시도 제로였다.

‘직접 공격하는 방법으로는 의식을 저지할 수 없단 건가?’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이 안에 단서가 분명 있을 텐데.’

땅을 디딘 용주에게 빛과 화염이 쏟아졌다.

‘분명 뭔가가….’

화염을 뚫고 나온 용주는 다시 한번 주변을 분석했다.

‘가시인가?’

하나의 가설을 세운 용주는 곧장 검증에 들어갔다.

마법진과 연결된 가시넝쿨을 잘라 내는 용주.

대주교와 달리 가시는 벨 수 있었다.

하지만 벤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복구되었다.

몇 개를 잘라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의식의 진행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이게 아니야.’

“대주교님께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겁니다!”

베히모스의 살점을 뚫고 나온 불의 사슬이 순식간에 용주를 결박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그와 동시에 열기를 잃어가는 화염.

설녀는 용주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말하지 못했다.

물어야겠다고 생각해놓고.

아직도 묻지 못했었다.

“내 친구한테 손가락 하나 못 댈 거예요!”

“마녀…!”

솟아오르는 냉기의 가시에 종교재판관이 뒤로 물러났다.

불길과 함께 흩어졌던 종교재판관의 모습은 대주교의 그림자 아래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종교재판관. 그렇다면 녀석이 매개인가?’

두 번째 가설로 눈을 돌린 용주가 종교재판관을 따라붙었다.

황도 12궁과의 전투에서 그녀는 4기사단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계급이 높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했지만.

그녀의 전투가 근접전에 특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설 또한 가능했다.

“라의 고뇌!”

종교재판관은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의 100%를 발휘했다.

“라의 진리!”

그녀가 일으키는 화염은 위협적이었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빛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잡았어!”

두 사람을 동시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왼쪽 발목에서부터 시작된 얼음은 순식간에 종교재판관의 두 다리를 묶었고, 이동 불가 상태가 된 종교재판관에게 용주가 파고들었다.

“라의 진리!”

종교재판관은 부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소용돌이치며 종교재판관을 감싼 빛의 문자들을 베어낸 용주는 그대로 그녀의 가슴을 길게 베어 냈다.

“라… 님….”

상처 부위를 붙잡고 비틀거린 종교재판관이 이내 쓰러졌다.

의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종교재판관도 아니야?’

가시도, 종교재판관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뭐가 이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저거 아직 안 멈춘 것 같은데요?”

설녀가 대주교를 가리켰다.

‘그런 건 말 안 해도 안다고.’

설녀를 노려본 용주가 말을 삼켰다.

용주의 눈빛에 흠칫 놀란 설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

“아?!”

무언가에 걸린 설녀가 거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얏….”

설녀를 넘어뜨린 건 다름 아닌 동그란 바위였다.

‘덜렁대기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던 용주가 다시 한번 설녀를 바라보았다.

베히모스의 살에 반쯤 파묻힌 바위.

저건 정확히 마법진 위에 놓여 있었다.

‘숯처럼 검게 변한 바위인가.’

얼마 없는 바닥 타일 중 일부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보였다.

불이 지나간 다른 타일이나 살점에는 어디 하나 불에 탄 흔적이 없었다.

‘왜 저것만 저렇게….’

용주의 시선이 마법진을 따라 움직였다.

‘아니야. 저것만 그런 게 아니었어.’

마법진을 따라 같은 바위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는 총 13개.

돌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마법진 위에 놓여 있었다.

‘시험해 볼까.’

움직이기 시작한 용주가 점점 속도를 높였다.

“왜… 왜 갑자기 그러시는 건데요?! 제가 뭐 잘못하기라도 한 거예요?!”

놀란 설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리를 좁혀오는 용주의 손톱은 마치 마녀의 것처럼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다.

▷ ‘13번째 별의 잔해’를 파괴하기 위해선 13 이상의 대항력을 필요로 합니다.

콰직!

첫 번째 바위를 파괴한 용주는 곧장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파괴된 바위를 중심으로 양쪽 서클이 사라지고 있었다.

땅에 그려진 것만이 아니었다.

하늘에 그려져 있던 서클도 마찬가지.

완벽한 원을 그렸던 서클은 더 이상 원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아무래도 이게 정답이었던 모양이군.”

“정답?”

“서클에 놓인 돌들을 파괴할 거다. 13개 전부 다.”

바쁘게 움직인 용주는 남은 12개의 돌들을 차례차례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설녀는 용주를 도우려 했지만, 설녀의 마법에 돌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13번째. 그건 녀석들이 날 보고 오해하던 숫자 아니었던가. 왜 여기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거지?’

반원을 그린 용주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설녀라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의식을 저지하는 게 먼저였다.

* * *

13개의 바위가 파괴되자, 서클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가시들을 하나씩 잃어 가던 대주교는 마침내 땅으로 떨어졌다.

▷ ‘라의 의식’을 저지했습니다. 열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현재 진행도 79%

- 10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의식의 진행도는 79%.

진행도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열한 번째 시련

- 대주교 ‘라’를 제거하십시오.

- 설녀가 사망하면 퀘스트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그분께서 별빛으로 속삭이셨습니다.”

두 팔로 땅을 짚고 있던 대주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넝마가 된 몰골과 달리 그의 움직임은 편안해 보였다.

“그분께선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대주교가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상처는 불길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딱 하나.

쇄골 중앙에 자리 잡은 성흔을 제외하고.

“그분께선 낙원을 보여주셨고, 절 완전히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선 말씀하셨습니다.”

대주교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불빛.

뭔가 불길함을 직감한 용주는 설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주교의 손가락 사이로 일렁이던 불빛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는 열차의 빛처럼.

“마녀와 마녀의 하수인을 멸하라고. 성전을 완수하라고.”

작렬하는 거친 불길.

‘황금률!’

그림처럼 그려진 세 개의 황금 문은 용주와 대주교 사이를 가로막았다.

열기는 잠깐 동안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세 개의 문을 차례로 녹여낸 화염은 그대로 용주를 덮쳤다.

팡! 파바바방!!

불이 얼음으로 바뀐 건 그로부터 약 3초 뒤.

“괜찮으세요?!”

다급하게 달려온 설녀가 용주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겉으로 보이는 큰 화상은 없었다.

“아, 덕분에.”

칠링 아머는 깨졌지만,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미리 막았어야 했는데.”

“넌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론 안 끝났을…!”

무심하게 이어지던 용주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뭐야….’

용주의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뜨거웠다.

‘대체 뭐가….’

쇄골 중앙 부분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불에 달군 인두로 맨살을 지지고 있는 것 같았다.

“…….”

이를 악문 용주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설녀는 용주의 손을 치웠다.

“!”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피부에 새겨지고 있는 생생한 성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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