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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28화 (128/357)

128화

“!”

앞만 보고 달리던 설녀가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건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까만빛의 파동이 딱 한 번 수도원을 가로지른 걸로 끝.

폭삭 주저앉은 베히모스의 살은 복도의 일부까지 추가로 집어삼켰다.

빛이 방출되는 순간 드워프들의 비명이 난무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붕괴가 빠르긴 했지만, 그가 그렇게 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거울에 담긴 힘은 친구들의 힘.

깨지고 부서진 힘의 파편이라도 그 정도 위력은 나올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도원이 그렇게 무너질 거란 것도.

그 많은 드워프이 그렇게 생을 마감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 그가 말한 대로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달랐다.

걱정하지 말라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로 옮길 수 없었다.

자신은 그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저한테 말한 거랑 다르잖아요.”

앞을 가로막은 붉은 벽에 손을 올린 설녀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어디 있는 거예요? 장난하지 말고 어서 나와요.”

고개를 숙인 설녀가 얼굴을 묻었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전 아직 당신 이름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와 함께한 건 불과 반나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감정을 교류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가 누구인지는커녕 이름조차 몰랐다.

님이라기보단 남인 사이였다.

안타까움을 느낄지언정 슬픔을 느낄 정도의 사이일 리 없었다.

그렇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함께한 잠깐의 시간 동안 그가 자신에게 준 건 어둠 속에 한 줄기 빛.

구원이었으니까.

“아니야. 울지 마. 울어 봤자 아무것도 나아지진 않는다는 거 알잖아.”

고개를 든 설녀가 힘을 집중시켰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어…!”

잠식을 시작한 얼음은 빠르게 그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었다.

“뭐 하려는 거냐?”

“베히모스의 살점을 뭉텅이로 깨뜨릴 거예요.”

누군가의 물음에 설녀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왜지?”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 아니! 반드시 찾을 거예요!”

“그 사람?”

“네! 저한테 그렇게 큰 소리 뻥뻥 쳐놓고, 자기 말도 못 지키는 거짓말쟁이….”

설녀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

놀란 설녀의 표정과 함께 얼음들이 깨져 나갔다.

눈앞에 있는 이는 찾으려던 그 사람이었다.

“왜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냐?”

“그렇지만 분명 저기 깔리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시간상으로도 거리상으로도 불가능했다.

탈출할 수 있는 경로는 딱 하나뿐이었다.

그가 탈출했다면 자신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고.”

용주가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설녀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설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더라.

설녀가 눈물을 흘리는 건 사라지기 전 딱 한 번뿐이라더라.

설녀가 눈물을 흘리는 건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해서라더라.

대개 그런 것들이었지.

하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설녀는 그런 이야기에 나온 설녀들과는 다른 사람인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기존에 들었던 설녀에 대한 이야기가 잘못되었던 걸 테니까.

“왜… 왜 곧장 나타나시지 않은 거예요? 어디 숨어서 제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계셨던 건가요?”

눈물을 닦아낸 설녀가 물었다.

놀라움에서 안도로.

그리고 안도에서 원망으로 바뀐 그녀의 눈빛이었다.

“뭐…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거든.”

그녀가 말한 것 같은 악취미는 당연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부분에서 계산 착오가 있었다.

붕괴의 속도

황도의 거울을 사용하며 공중에서 밀려난 거리와 틀어진 각도.

붕괴의 여파로 무너져 내린 복도.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무너져 내린 천장에 깔리기 바로 직전 가까스로 점멸의 쿨타임이 돌아왔다.

다급하게 사용한 점멸의 출구는 사방이 꽉 막힌 비좁은 공간이었는데, 사방이 얼음으로 되어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추측건대, 설녀가 만들었던 얼음벽들이 무너지고 교차하며 생긴 일종의 에어포켓이었던 모양이다.

한 번 더 쿨타임이 돌기를 기다린 용주는 그때야 수도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주한 게 지금 이 상황.

▷ 라의 성기사 수도원을 파괴했습니다. 여덟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8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설녀의 화형을 저지했습니다. 아홉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9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용주의 앞엔 클리어 문구가 동시에 출력되고 있었다.

‘확실하게 처리되긴 한 모양이군.’

수도원의 중심부엔 마녀의 화형 틀이 함께 놓여 있었다.

두 시련이 동시에 나타났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니, 조금만 안일하게 생각했으면 큰일 날 뻔했던 거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퀘스트를 순서대로 진행했다면. 수도원의 붕괴와 함께 설녀 역시도 저기 매몰되었을 거고, 수도원을 붕괴시키고 설녀의 화형을 저지했어도 설녀는 목숨을 잃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베히모스가 추락하는 결과에는 똑같이 도달했겠지.

▷ 열 번째 시련

- ‘라의 의식’을 저지하십시오.

- 의식의 진행도에 따라 대주교 라의 힘이 증가합니다.

- 현재 진행도 50%

‘대주교…. 역시 녀석은 다른 곳에 있었군.’

수도원에서 마주한 드워프들 중 가장 높았던 인물의 계급은 ‘주교’.

여섯이 합친 힘으로도 설녀에게 밀리는 수준이었다.

자리에 없던 이는 대주교뿐만이 아닐 것이다.

종교재판관.

설녀를 구속했던 그녀 또한 수도원에 없었다고 봐야 타당하겠지.

‘의식이 진행되면 될수록 녀석을 상대하는 게 힘들어진다라.’

이런 흐름대로라면, 다음 시련은 대주교라는 자와의 전투일 가능성이 높았다.

시작과 동시에 진행도는 50%.

그걸 역으로 되돌릴 순 없지만, 빨리 찾을수록 앞으로의 상황들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용주가 뭔가에 화들짝 놀랐다.

쇄골를 타고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

용주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건 불만 가득한 설녀의 얼굴이었다.

“저기요. 제 이야기 듣고 계신 거예요?”

눈을 가늘게 뜬 설녀가 물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반응도 없고.

이거 완전 투명인간 취급이지 않은가.

“아, 미안. 뭐라고 했지?”

“뭐예요. 정말 하나도 안 듣고 계셨던 거예요?”

설녀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다음에는 뭘 도와드리면 되냐고요. 이걸로 끝내진 않으실 거 아니에요.”

“대주교라는 녀석을 찾을 예정이다. 아마 녀석과 담판을 짓게 되겠지.”

“대주교?”

설녀가 기억을 더듬었다.

대주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분명 창살 너머로 들었던 기억이 났다.

“혹시 녀석을 만난 적 있나?”

용주가 물었다.

그녀라면 대주교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꼭 의식과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뭐라도 정보가 있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음… 아니요.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래?”

예상외였다.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던 설녀가 수중에 들어왔으면, 당연히 한 번쯤은 보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 대주교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기억이 있어요. 혈옥인가 어딘가 하는 곳에서 무슨 의식을 준비한다고 했던 것 같아요.”

‘의식.’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혈옥에 위치에 관한 건?”

“음… 거기에 대해선 들은 적 없는 것 같아요”

‘뭐, 그렇겠지.’

묻고 나서도 괜히 물었다 싶었다.

그런 걸 주저리주저리 말할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위치를 찾을 방법이라면 생각났어요! 제 친구들한테 부탁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설녀가 결정을 보였다.

결정에서 떠오른 각기 다른 12개의 빛은 설녀의 곁을 맴돌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빛들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빛의 일부는 황도의 나침반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아래라고 하네요. 다 왔대요.”

나침반이 가리킨 방향을 한 번 더 확인한 설녀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길을 따라갈수록 빛은 점점 줄어들었다.

길의 폭은 점점 줄어갔고, 붕괴된 건물의 잔해는 반대로 많아졌다.

바닥 타일의 붕괴가 심한 곳은 살과 돌이 뒤엉켜 상당히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설녀와 나란히 선 용주는 고개를 들었다.

카타콤의 입구가 생각나는 건축물엔 누군가의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진짜로 위에 있다고 해도 믿겠어.’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봤던 조각이었다.

대주교 라의 석상.

안 그래도 바위 같은 피부를 가진 석조 드워프를 돌로 깎아놓으니, 영락없는 본인이었다.

“대주교라는 사람 옆엔 분명 종교재판관이 있을 거예요.”

정면에서 용주를 막아선 설녀가 이야기했다.

“제 과거를 봤다면, 당신도 봤겠죠? 그녀가 사용하는 이상한 힘을.”

“그래. 널 구속하고 있던 그 사슬도 그녀가 만든 거였겠지.”

“전 구속을 깨뜨리지 못했어요. 이번에도 잡히면 아마 깨뜨리지 못하겠죠. 저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건 이제 싫어요.”

설녀가 손을 움켜쥐었다.

“돕고 싶어요. 그렇지만 방해될까 겁이나요.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용주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빛이 흩어지고 다시 모이기까지 그녀는 유독 말이 없었다.

지금의 고민은 아마 그때부터 계속 이어진 거겠지.

“넌 어떻게 하고 싶지?”

용주가 무심하게 물었다.

“저는….”

설녀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여기까지 날 따라온 건 네 의지였다. 그러니 네 의지로 결정해라. 들어갈지. 돌아갈지.”

설녀를 다른 곳에 대피시켜 놓는 것.

설녀를 가까운 곳에 두고 지키는 것.

어느 선택지라도 리스크는 있었고, 어느 것을 정답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설사 그게 정해진 답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정답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저는… 저는….”

“마녀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마녀는 자기 결정에 망설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

용주의 한마디에 설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알겠어요. 결정했다고요.”

자리를 옮긴 설녀가 용주와 나란히 섰다.

“아까 그러셨었죠.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그러니 전 여기 있을 거예요. 방해가 되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러냐.”

왼손을 든 용주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네가 끊지 못하는 건 내가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하지 못하는 걸 네가 할 수 있겠지.”

용주의 손길에 설녀가 고개를 돌렸다.

용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자신감을 가져라. 뭘 할 수 없는지가 아니라, 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그럼 방해되고 싶어도 방해될 수가 없으니까.”

용주의 시선이 설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망설임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뭘 할 수 있는지….”

용주의 말을 되읊은 설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끝까지 망설여졌었다.

틀리고 틀리고 틀렸어서.

또 틀릴까 봐 무서웠다.

자신을 향한 눈동자는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보단 얼음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왠지 안심이 됐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저 차가움이 왠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설녀이기 때문일까?

“앞장서지.”

손을 내려놓은 용주가 걸음을 옮겼다.

의식의 진행도는 이제 막 60%를 넘어서고 있었다.

계단의 초입은 상당히 어두웠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점점 주변이 밝아졌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용주는 밝은 빛 속으로 들어섰다.

혈옥.

그렇게 불리는 공간에서 마주한 건.

불과 빛의 마법진.

그리고.

빛으로 빚은 가시넝쿨에 휘감겨 있는, 피에 물든 드워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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