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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27화 (127/357)

127화

* * *

뒤돌아선 용주가 손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용주의 손을 잡은 설녀는 마지막 오르막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엄청 길게도 파놓으셨네요.”

베히모스의 살점을 밟은 설녀가 감상평을 내놓았다.

“여기로 들어오실 때도 혹시 이런 식으로 들어오신 거예요?”

“아니, 살점을 헤집으며 움직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

“얼지 않은 호수가 하나 있더군. 그 아래로 들어왔다.”

“얼지 않은 호수…?”

고개를 갸웃한 설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혹시 그거 베히모스의 코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늘을 나는 거대한 고래 베히모스.

다른 고래들과 마찬가지로 베히모스도 물을 내뿜곤 한다.

얼지 않는 부동의 호수.

그건 분명 베히모스의 코에 고인 물일 것이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음… 혹시 베히모스의 장기 쪽에 커다란 구멍을 내시거나 한 건 아니죠? 그건 살 쪽이랑은 완전 이야기가 다른데요.”

“걱정하지 마라. 나도 이 녀석이랑 같이 추락하는 건 사양이니까.”

“음… 그런가요.”

용주가 만든 상처를 바라보고 있던 설녀가 얼음을 걷어냈다.

벌어진 상처 틈 사이론 불긋불긋한 핏물이 고이고 있었다.

“저… 근데 왜 절 도와주신 건가요? 전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설녀가 물었다.

“네가 사라지면 이쪽 목도 같이 날아가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그건 아까 하신 말씀의 연장선인 건가요?”

“뭐, 그런 셈이지.”

용주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편이 더 납득시키기 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니 뭐니.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싶지도 않고, 말해 봤자 별로 영양가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알고 계시단 거네요. 제가 왜 끝없는 겨울을 이어가고 있었는지.”

“뭐, 그렇지.”

“당신은 절 믿어주시는 건가요?”

“어쩌다 보니 네 기억의 일부를 봐 버려서 말이야. 내 입장에선 믿지 않는 게 더 힘든 상황이지.”

“제 기억을?”

설녀의 물음에 용주가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설녀의 눈물.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결정이 된 바로 그 물건이었다.

“네가 여기로 끌려오던 날을 봤다. 네가 친구라고 부르던 자들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었지.”

“…….”

“이건 돌려주마. 원래 네 것인 물건이었으니까.”

설녀의 손을 잡은 용주가 그녀의 손에 결정을 쥐여 주었다.

눈물이 설녀의 손에 들어가자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일렁거리며 떠오른 열두 개의 빛.

각 별자리의 기호들을 그려 보인 빛들은 다시 결정 안으로 돌아갔다.

빛을 마주한 설녀의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슬퍼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이건 기쁨의 눈물.

사라졌다 생각했던 친구들은 아직 이 안에 있었다.

“고마워요.”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설녀가 이야기했다.

소리 없이 흘린 눈물은 아직도 그녀의 뺨에 묻어 있었다.

“감사라면 일이 다 끝나고 해도 늦지 않을 거다.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손을 뻗은 용주가 무심하게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스스로 눈물을 거둘 때까지 그저 기다려준 용주였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 아픔은 다르지 않겠지.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

“이제부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주제를 바꾼 설녀가 물었다.

용주의 돌발 행동 때문에 조금 놀란 듯한 그녀의 눈동자였다.

“수도원을 무너뜨릴 거다.”

“수도원이라면… 아까 제가 잡혀있던 거기 말씀이신가요?”

“그래.”

“엄청난 일을 되게 쉽게 이야기하시네요. 수도원의 규모도 규모고 거기 있는 드워프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요.”

“녀석들을 하나하나 상대할 생각은 없다. 굳이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될 테니까.”

“뭔가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설녀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떻게 하시려는 건진 몰라도 저도 힘을 보태드릴게요. 둘이면 혼자보단 나을 거예요.”

“피를 보게 될 거다.”

용주가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 상황에서도 대화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던 그녀였다.

이런 살육은 그녀에게 그다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각오하고 있어요.”

설녀가 용주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고, 가능하면 대화로 풀고 싶었다.

그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싸우는 건 물론 싫어요. 피를 보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지만 불과 얼음은 공존할 수 없어요.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이 대립은 끝나지 않을 거란 걸 배웠어요. 잃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전 마녀가 되겠어요.”

설녀의 눈동자에 힘이 실리자 그녀가 딛고 있던 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내 옆에 꼭 붙어 있어라. 방해되지 말고.”

“네! 그럴게요!”

* * *

“탈출한 마녀는 아직도 못 찾았나?!”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진 드워프가 물었다.

“저, 그게… 아직….”

“대주교님과 종교재판관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단 말이다! 마녀를 놓쳤단 걸 두 분께서 아시는 순간 화형을 당하는 건 우리가 될 거다!”

난간을 내려친 드워프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주교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밖에선 계속 연설과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건 극히 소수의 인원뿐.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이야기가 새어 나가서는 안 됐다.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찾아! 찾으란 말이야!”

“주교님! 주교님!”

다급하게 들려오는 드워프들의 발소리.

“왜? 마녀를 찾은 거냐?!”

고개를 돌린 주교가 물었다.

“사용하지 않는 지하 창고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마녀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수상한 흔적이라고?”

“네. 바닥 타일 하나가 날카로운 것에 잘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베히모스의 피가 고여 있었습니다.”

“거기다!! 당장 추격해!”

“시도는 하고 있지만, 피가 가득 차 있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지지대를 세우고 피를 빼내는 작업을….”

“그럴 시간 없으니 당장 추격해! 어떻게 해서든 마녀를 잡아 오란 말이야!”

“주교님! 주교님!”

주교가 언성을 높인 그때.

또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달려왔다.

“왜? 빨리 말해! 시간 없으니까!”

“마녀를… 마녀를 찾았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어디야! 당연히 생포했겠지?!”

“마녀가 목격된 곳은 라 님의 신상이 있는 광장. 마녀는 지금 수도원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주교가 미간을 좁혔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또한 마녀의 곁에는 그녀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하수인? 황도 12궁이라면 전부 멸했을 텐데?”

“네, 황도 12궁처럼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붉은 악마.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는 막아서는 모든 자들을 도륙하고 있습니다. 위세가 어마어마합니다.”

“조용히 처리하긴 글렀군…. 전 병력을 동원해 녀석들을 잡는다! 마녀는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다른 한쪽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 당장 움직여!”

“네!”

* * *

“잡아라!”

“마녀를 생포해!”

“붉은 악마는 사살해도 좋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석조 드워프들.

“제가 처리할게요!”

자신들을 둥그렇게 에워싼 그들을 바라보던 설녀가 손을 휘저었다.

파! 바! 바! 방!!

가까운 곳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얼음 가시.

교차하며 솟아오른 가시들은 순식간에 드워프들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싸울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쉽게 끌려오진 않았겠군.’

운 좋게 가시를 피해 간 드워프들은 용주와 검을 맞대야 했다.

드워프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용주는 중간중간 설녀 쪽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설녀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일대 다수의 상황에서 그녀의 힘은 가히 압도적.

얼음은 어중간한 불 정도는 손쉽게 얼려 버렸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복도를 질주하던 용주가 이야기했다.

저 앞에 수도원이 보였다.

“아니요. 제가 보고, 제가 듣고, 제가 기억할 거예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요.”

설녀가 손을 뻗자 드워프들의 발이 얼어붙었다.

“으아악!”

“다리! 다리가 안 움직여!”

땅에 고정된 드워프들.

전광석화로 그들을 가로지른 용주는 하나하나 녀석들을 베어 냈다.

“라의 겁화는 거짓을 불사를지니!”

일방적이었던 학살에 제동을 건 것은 파도치며 밀려오는 거친 불길이었다.

불길을 피해 물러난 용주는 불길 너머를 바라보았다.

복장이 다른 여섯 명의 드워프가 수도원의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중심이 되는 한 사람을 기준으로 반원을 그리며 서 있는 드워프들.

그들에게서 나온 빛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나머지 다섯의 힘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구조인가.’

불의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이는 빛이 모인 드워프 혼자였다.

아무래도 그 정도로 힘을 집약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인 모양이었다.

“제가 막아볼게요!”

또다시 밀려오는 불의 파도.

주변 구조물 모두를 얼려 버리며 한기를 발산하던 설녀는 힘을 집중시켰다.

“아니!!”

순식간에 얼어붙은 불의 파도.

그 모양 그대로 얼어붙은 불길은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설녀의 힘은 주교 여섯의 힘을 웃돌고 있었다.

“말씀하셨던 그거, 지금 하실 생각이신가요?”

용주의 왼손을 바라본 설녀가 물었다.

용주의 손엔 동그란 거울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거울의 표면엔 황도 12궁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시계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각 문양에서 흘러나온 은하수가 거울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래.”

“베히모스는… 괜찮을까요?”

“녀석을 지키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할 일이지. 안 그래?”

“…….”

입을 앙다문 설녀가 결정을 움켜쥐었다.

베히모스를 지키는 것.

그리고 베히모스로부터 다른 이들을 지키는 것.

그게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할 일이었다.

“알겠어요. 베히모스 쪽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자연스럽게 팔을 내려놓은 설녀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뭐, 뭐야?!!”

드워프들의 당황한 눈동자가 분주하기 움직였다.

기후란 게 존재할 리 없는 베히모스의 몸 안쪽에 눈보라가 일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저기…! 저기 봐!!”

“얼음이! 얼음이 솟아오른다!”

위아래에서 자라난 얼음 기둥들이 수도원 전체를 감쌌다.

촘촘하게 배치된 기둥들은 서로 자라나며 엉겨 붙었고, 이내 하나의 벽이 되었다.

“당황하지 마라!”

“마녀의 뜻대로 놀아나지 마라!”

“라의 겁화는 거짓을 불사를지니!”

당황한 드워프들을 진정시킨 주교들은 다시금 불길을 쏟아냈다.

“절 믿고 그대로 뚫고 가세요!”

설녀의 외침과 함께 한 줄기의 눈보라가 용주의 허리를 감쌌다.

토성의 고리처럼 용주의 곁을 도는 눈의 고리.

▷ ‘칠링 아머’의 효과가 느껴집니다.

- 혹한의 냉기가 몸을 감쌉니다.

- 화염으로 인한 피해를 냉기의 갑옷이 대신 받습니다.

- 흡수한 피해의 일부를 공격자에게 되돌려줍니다.

새롭게 나타난 버프 메시지.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 용주는 이미 화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메시지의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믿어달라는 그녀의 말을 믿고 있었으니까.

“마녀의 하수인이 화염에 삼켜졌다!”

“라의 불길이…!”

말을 이어가던 주교 중 하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직접적으로 화염을 흩뿌렸던 바로 그 주교였다.

화염에 삼켜졌던 용주의 모습은 다시금 주교들에 시야에 돌아와 있었다.

“저럴 수가!”

용주의 모습을 확인한 주교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분명 정면에서 파도에 집어삼켜졌을 텐데, 녀석에겐 그을린 흔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세 번째 파도.

“으, 으윽…!”

이를 악물고 불길을 일으키던 주교가 결국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멈출 것처럼 가슴 안쪽이 차갑고, 고통스러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뭣들 하고 있나! 제1 주교님을 안으로 모셔라!”

“녀석은 혼자다! 막아! 마녀를 생포해!”

다른 주교들의 명령이 떨어지자 드워프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설녀의 화형식을 지켜보기 위해 낙원을 믿는 대부분의 드워프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 규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너희들이 막아야 할 건 내가 아니야.’

홀몸으로 정문을 돌파한 용주가 왼팔을 잡아당겼다.

“사라졌잖아?!”

“아니! 저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드워프들.

줄줄이 늘어선 기둥들과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수도원의 첨탑.

겹겹이 쌓아 올려진 장작더미와 그 위에 서 있는 화형대.

그 모든 풍경을 한눈에 담고 있던 용주는 황도의 거울을 겨눴다.

노리는 건 살점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

일점에 집중되었던 은하수는 까만빛의 파동이 되어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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