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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26화 (126/357)

126화

‘정말 여길 들어가라고 하는 거냐?’

나침반을 바라보고 있던 용주가 걸음을 멈췄다.

확인차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돌았지만, 나침반은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용주의 앞에 있는 건 거대한 호수였다.

이 추운 날씨에도 얼어붙지 않는 부동의 호수.

호수의 표면은 잔잔했다.

‘평범한 물은 아닌가 본데.’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아이템 목록을 확인했다.

잠수에 유용할 아이템이 분명 하나 있었다.

리자드맨의 비늘.

수중에서의 기능 향상이란 뭔가 두루뭉술한 설명이 붙어 있긴 했지만, 무호흡 스킬과 시너지를 내면 분명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리자드맨의 비늘을 사용한 용주는 호수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호수의 안쪽은 잔잔하고 고요했으며, 다른 생명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에 잠기는 느낌은 평소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용주는 평소와 뭔가 다름을 느꼈다.

물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자연적인 흐름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가 흐릿해지지도 않았고, 귀에 물이 차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용주의 시선이 자신과 좀 더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이건….’

뭔가 물결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반투명한 리자드맨의 꼬리였다.

‘강아지 머리띠는 써봤다만, 뱀 꼬리는 또 처음 달아보는군.’

물로 빚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 빼면 모습은 확실히 똑같았다.

물 밖에 있을 땐 이런 건 없었는데.

아무래도 아이템의 효과를 받으면서 생긴 모양이었다.

‘리자드맨들과 비슷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혹시 그것도 가능한 건가?’

숨을 꾹 참고 있던 용주가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로 물 한 모금을 삼킬 각오로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는 우려했던 것과 달랐다.

따로 아가미가 자라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호흡이 가능했다.

‘이거면 마나를 조금이라도 더 아낄 수 있겠어.’

머리를 아래로 향한 용주는 더 깊은 곳을 향해 헤엄쳐 들어갔다.

호수의 바닥엔 어딘가로 통하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 * *

▷ 베히모스의 체내로 진입했습니다. 일곱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7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물속을 한참을 헤엄치던 용주는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왔다.

물속에 잠겨 있던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길었다.

호수의 밑바닥에 도달하는 시간보다 그 이후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탈출할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방법은 공간 균열의 반지를 사용하는 것.

외벽에 바짝 붙은 용주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최대한 길게 점멸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주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안쪽에서 마주한 공간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바닥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양쪽으로 보이는 공간엔 석조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멀쩡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용주가 이 공간을 이질적이라 느낀 건 그 밖에 보이는 풍경들 때문이었다.

천장을 포함해 포장되지 않은 곳을 채우고 있는 건 붉은 고깃덩어리였다.

지금 있는 곳은 베히모스의 체내.

하나하나 꿀렁거리는 세포들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그게 실감됐다.

‘드워프들이 베히모스의 살을 파고 몸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었지.’

과거 회상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엔 분명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게 드워프들이 베히모스의 몸속에 만들어 놓은 통로라는 이야기였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규모가 큰 모양인데.’

복도의 크기만 봐도 이곳의 규모가 절대 작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덟 번째 시련

- 라의 성기사 수도원을 파괴하십시오.

- 설녀의 화형이 끝나면 퀘스트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 아홉 번째 시련

- 설녀의 화형을 저지하십시오.

안쪽으로 진입한 용주의 앞에 두 가지 메시지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2개가 동시에.’

시련 하나와 사이드 퀘스트.

이런 식이 아니라 시련 2개가 동시에 출력된 거였다.

‘뭘 먼저 깨든 내 재량이란 건가.’

나침반을 꺼낸 용주는 방향을 확인했다.

나침반은 저 앞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기사 수도원이라….’

4기사단.

녀석들의 일격이 다시금 떠올랐다.

과거 장면에서 확인한 적들의 전력을 돌이켜보면, 4기사단의 전력은 드워프들 중에서도 최상급 전력이었다.

보통의 다른 드워프들은 그 정도까지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진 못했다.

머릿속에 걸리는 건 두 사람.

대주교라는 인물과 종교재판관이란 인물이었다.

적을 결박시키는 스킬을 사용하던 종교재판관.

그녀는 4기사단보다 높은 지휘에 있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4기사단의 신성한 희생 이상의 위력을 자랑하는 스킬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대주교 역시도 마찬가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그 사람이 이곳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이겠지.

‘어찌 됐든 혼자 전부를 상대해야 하는 건 변함이 없어. 쉽진 않겠는걸.’

적의 수는 과거에서 봤던 그 이상일 것이다.

그걸 하나하나 다 상대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 될 게 분명했다.

‘다른 방식으로 수도원을 파괴할 순 없으려나?’

검을 맞대지 않고 수도원을 파괴하는 방법.

그런 방법이 있다면 사용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건물을 지어놨다고 한들 여긴 베히모스의 몸속.

그 점을 이용하면 검을 맞대지 않고도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건 바로 설녀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

꼭 화형을 당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목숨을 잃으면 퀘스트의 결과는 같아질 것이다.

‘역시 설녀 쪽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어.’

무너진 담벼락을 밟고 오른 용주가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뭐가 됐든 저쪽에 인질이 있는 이상 이쪽이 불리했다.

저쪽이 아직 이쪽의 침투 사실을 모르고 있는 지금이 기회.

설녀에게 인도해줄 나침반까지 있으니 길을 헤맬 이유는 없었다.

* * *

“오늘! 영원한 겨울은 끝나고 낙원이 우릴 찾아올 겁니다! 오늘 우린 이 자리에서 마녀의 최후를 보게 될 겁니다!”

메아리치는 누군가의 외침.

이걸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비슷한 연설이 계속되었다.

“…….”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설녀는 무릎을 바짝 끌어당겼다.

추웠다.

마음속 깊숙한 곳이 시리도록 추웠다.

“혹시 이게 다 꿈은 아닐까? 너무 끔찍해서 깨면 아무것도 기억 안 날 악몽.”

벽을 바라본 설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 꿈이었으면 좋겠단 생각만 벌써 며칠째.

꿈은 깨지 않았다.

“나도 그쪽으로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계속 들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신의 물음에 답해주는 이 역시 아무도 없었다.

“누가 좀 대답해줘. 제발….”

“그거야 녀석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지.”

자신의 절규에 돌아온 목소리에 설녀가 고개를 돌렸다.

마녀의 화형.

드워프들이 말하던 그 시간이 이제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

남성의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붉은 옷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저건 피에 절여져 나온 색깔.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발과 다리 근처에 머물러 있던 설녀의 시선이 조금씩 위쪽으로 향했다.

저 밖에 있는 남성은 드워프와 달랐다.

붉은색 아래로 보이는 남성의 피부는 회색이 아닌 살구색이었다.

“당신은…?”

“네 화형을 바라지 않는 인물.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할 거다.”

손톱을 휘두른 용주는 감옥의 쇠창살을 잘라냈다.

“제 화형을 바라지 않는 인물…? 그렇다면 직접 물어보면 될 거란 건 어떤 의미죠?”

“뭐, 대충 이런 의미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용주가 꺼낸 물건을 던졌다.

설녀의 옆에 떨어진 건 황도의 나침반.

나침반의 침은 정확히 설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날 여기까지 안내해준 물건이다.”

“인도?”

“그래. 이게 가리키고 있던 건 다른 장소였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빛을 흡수하고 나선 방향이 바뀌었지. 황도 12궁. 그렇게 불리던 녀석들의 빛이었다.”

“그게… 그게 정말이에요?!”

설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친구들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뭐, 이왕 일러주는 거 위아래까지 표시해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지.”

용주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나침반은 고저까지는 표시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애를 좀 먹었지.

“아흑…!”

나침반을 향해 손을 뻗었던 설녀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원인은 아마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저 글자들.

저게 족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겠지.

▷ 종교재판관 세크의 ‘빛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선 10 이상의 대항력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거기 닿으면….”

설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주의 손톱이 움직였다.

반듯하게 잘려 나간 글자는 형태를 잃고 흩어졌다.

“끊어…졌어?”

설녀가 놀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절 도와주시는 건가요?”

“근처를 지키던 녀석들은 대강 정리했다. 조용히 처리하긴 했지만,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지. 빨리 뜨지 않으면 일이 더 복잡해질 거다.”

“뜨다니…. 그게 가능할까요?”

나침반에 손을 올린 설녀가 물었다.

여기 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긴 드워프들의 성지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끌려오며 본 이곳의 내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드워프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마 그중 상당수가 지금 저 바깥에 있겠지.

모두의 눈을 피해 달아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녀석들이 만든 길로 움직이면 쉽진 않겠지. 그러니 다른 길로 움직일 생각이다.”

“다른 길?”

“그래. 여기서만 만들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길이지.”

설녀와 함께 감옥을 빠져나온 용주는 수도원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

위쪽이 아직 조용한 걸로 봐서 설녀가 사라진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완전 막다른 곳인데요. 정말로 이런 곳에 길이 있는 건가요?”

사방을 두리번거린 설녀가 물었다.

도저히 탈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 길이라면 있다. 바로 여기에.”

정확한 규격대로 맞춰진 수많은 타일들.

그중 하나에 발을 올린 용주가 대답했다.

타일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여 길게 잘려 있었다.

그리고.

그 홈을 채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피였다.

“설마… 베히모스의 살을 뚫으면서 여기까지 오셨던 거예요?”

놀란 설녀가 물었다.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래. 정확한 자리를 찾는 데 애 좀 먹었지.”

베히모스의 살을 파내며 이동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아이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도의 나침반과 리자드맨의 비늘.

전자가 없었다면, 방향을 잡지 못했을 거고.

후자가 없었다면, 상처를 타고 차오르는 피에 잠겨 허우적거렸겠지.

그래도 이게 최선이란 생각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시설.

아니, 이 정도 규모의 내상을 입고도 괜찮은 베히모스라면, 개미가 좀 더 갉아낸 것 정도론 티도 안 날 테고.

무엇보다 드워프들이 만들어둔 길로 움직였었다가는 이미 오래전에 발각됐을 테니까.

“그럼 설마 나가는 것도?”

불안을 감지한 설녀가 물었다.

용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히모스의 피와 살을 헤집고 움직인다니,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적어도 네 친구들은 그렇게 믿고 있겠지.”

용주의 한마디에 설녀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해볼게요. 아니! 꼭 해낼게요!”

나침반을 움켜쥔 설녀는 피의 샘에 손을 올렸다.

까드드득!

그녀의 손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핏물.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설녀는 얼음 표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붉은 얼음은 일순간 고운 눈 알갱이가 되어 소복이 쌓였다.

‘깨뜨리는 게 아니라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렸잖아?’

“베히모스의 상처 부위를 얼음으로 얇게 덮었어요. 얼음이랑 살 사이에 피로 채운 공간을 남겨뒀으니 세포가 다치진 않았을 거예요. 가요! 지금이라면 피가 상처에 고이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용주가 먼저 앞장섰다.

고기를 썰 듯 일일이 살을 도려내며 만들었던 비밀 통로.

끈적거리는 피와 축축한 살의 감촉만이 가득했던 그 비좁은 틈은.

붉은 수정 동굴처럼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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