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도망가는 선택지도 있다. 우리가 시간을 벌어보겠다.”
팔짱을 끼고 있던 켄타우로스가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비장함이 느껴졌다.
“맞아. 바깥 세계로 가면 저들도 더는 널 추격하지 못할 거야.”
물병을 안고 있던 소년이 의견을 더했다.
“다들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그렇지만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설녀가 고개를 저었다.
“베히모스 때문에?”
천칭을 들고 있던 여인이 물었다.
“네.”
여인의 목소리 뒤로 거대한 생명체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고래의 초음파 같은 소리.
소리가 크진 않았다.
소리의 진원지가 그만큼 멀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소리는 분지 안쪽에서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제가 베히모스의 온도를 낮춰주지 않으면, 베히모스는 저 아래로 추락하고 말 거예요.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날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베히모스도 살아남지 못하겠죠.”
“피하지 않는다면, 맞서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이빨을 드러낸 사자가 앞발을 굴렀다.
“괜찮겠어? 지난번에 만났던 드워프들은 이상한 힘을 사용하던데.”
“불과 빛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지.”
쌍둥이 소년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녀석들이 왜 우릴 제거하려고 하는 거지? 우리가 뭘 어쨌다고.”
옆걸음을 한 게가 집게를 부딪쳤다.
“드워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어. 마녀를 불로 태워 죽여야 한대.”
“마녀의 하수인들도 모두 정화해야 한댔어. 그러면 영원한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낙원이 찾아올 거랬어.”
밤하늘을 헤엄치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대답했다.
“새로운 낙원?! 대체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설녀가 사라지면 남는 건 종말뿐이야. 베히모스와 함께 전부 끝장나는 거라고!”
발을 구른 황소가 별자리로 만들어진 도끼를 휘둘렀다.
“대주교님의 말씀이라고 그랬었어.”
“성전이라고 그랬었어.”
두 마리의 물고기가 태극 문양을 그리며 자리를 바꾸었다.
“성전? 저들에게 생긴 종교가 그럼 이 일의 발단이란 건가?”
기둥 사이로 성전 안쪽을 바라보던 전갈이 물었다.
황도 12궁 중 가장 거대한 덩치를 보유하고 있는 그였다.
“아마 그렇겠지. 젠장! 놈들이 베히모스의 살을 파고 몸속으로 들어갔을 때 손을 썼어야 했어. 거기 수도원이니 뭐니 만들 때 싹을 잘랐어야 했다고!”
분노를 표한 양이 뒷발을 휘갈겼다.
그의 뿔 한쪽은 무언가에 잘려 나가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라. 이거 정말 힘든 결정이네.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야.”
그 옆자리를 지키던 염소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위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산 전체를 조여 오는 드워프들의 소리.
그들의 전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가…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분명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 진실을 알면 그들도 이해해 줄 거예요.”
설녀의 그 말을 끝으로 풍경이 또 한 번 변화했다.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여기저기서 부딪치고 있는 드워프들과 황도 12궁.
빛과 어둠이 부딪치며 별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들 중엔 용주에게도 낯이 익은 4기사단의 모습도 있었다.
‘역시나 설득은 실패했나 보군.’
설녀의 그 말의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용주는 알고 있었다.
더 미래인 이곳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성전을 완수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용주가 본능적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가드를 올린 용주의 눈동자에 비치는 건 검을 그대로 통과하는 철퇴.
용주를 그대로 통과한 드워프는 신전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이게 여기서 있던 마지막 전투였단 건가.’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수적 열세에 있는 황도 12궁이었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드워프들을 앞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드워프들을 죽이지 못했다.
않은 것도 맞았지만, 못한 것도 맞았다.
협상에 나섰던 설녀가 녀석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알 수 없는 글자들에 포박된 채로.
“당장 그녀를 놔줘!”
“종교재판관님!”
폭주하듯 돌진하는 사자궁.
그의 돌진에 수많은 드워프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가 노리는 건 설녀를 구속하고 있는 여성 드워프.
사제복을 걸친 그녀는 메이스 대신 지팡이를 짚은 유일한 드워프였다.
“하늘은 무너지고 영원한 겨울은 끝날 것입니다.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십시오.”
맹수의 발톱은 그녀의 앞을 지키던 4기사단에게 저지당했다.
“이 영원한 겨울을 그저 자연의 섭리라고만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마녀의 저주였죠. 거짓을 가려주던 장막은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대주교님의 말씀대로.”
사자궁을 감싼 빛의 군무가 일순간 재갈이 되었다.
“우리의 성전이 우릴 낙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빛을 발하는 메이스와 철퇴.
“안 돼!!”
4기사단은 그를 자비 없이 조각냈다.
팽팽하게 보이던 전선은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 돼. 제발 그만해! 제발 죽이지 마!”
믿기 힘든 현실 속에 설녀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도망가…. 제발 부탁이야!”
그동안 함께해 왔던 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만둘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 하나만 끝내면 되잖아. 날 죽여. 더 이상 내 친구들을 빼앗지 말아줘.”
“당신의 마지막 운명은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최후가 곧 낙원의 문을 열어줄 겁니다.”
균형이 깨진 전투가 끝난 건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더 이상 살아 있는 황도 12궁은 없었다.
“흑… 흐흑….”
흐느끼는 설녀를 잡아끈 종교재판관은 이곳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포박은 끝끝내 풀어지지 않았다.
‘아직 뭐가 더 있는 건가?’
이걸로 모든 사건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곳엔 다시 용주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퀘스트 완료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던 용주의 눈앞에서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게 스러진 그곳에서 한 점의 별빛이 떠오른 것이다.
‘저건….’
하나가 아니었다.
떠오른 빛은 모두 12개.
설녀가 있던 자리를 맴돌던 12개의 빛은 원을 그리다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눈처럼 부드럽게 떨어지는 한 송이의 별빛.
그 아래 생겨난 건 용주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설녀의 눈물.
이곳에 없던 하얀 냉기가 지나간 자리에 더 이상 눈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 설녀의 눈물에 기억된 과거의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5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용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단에는 설녀의 눈물이 올라가 있었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모양이다.
‘베히모스, 황도12궁, 설녀, 영원한 겨울, 성전, 종교재판관, 대주교….’
용주가 떠오르는 단어들을 나열했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절대 적지 않았다.
▷ 여섯 번째 시련.
- 잔존하는 황도12궁의 빛을 설녀의 눈물에 담으십시오.
- 설녀의 화형이 끝나면 퀘스트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 사이드 퀘스트 - 별의 무덤
- 황도 12궁이 스러진 역순으로 빛을 모으십시오.
연속해서 나타난 두 개의 메시지.
퀘스트의 미션을 확인한 용주는 설녀의 눈물을 집었다.
‘이렇게 되면 이 이후의 퀘스트도 같은 제한 시간이 걸린단 건가.’
흐름상 설녀를 구하라는 전개가 이어지리라 추측됐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를 구하기 전까진 같은 시간제한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당연히 공유되겠지.
다시 말해 앞선 시련에서 많은 시간을 소요할수록 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꽤 성가신 조건이 걸렸는데.’
몇 시간.
이렇게 단일 시간, 단일 조건으로 붙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녀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마음 졸이며 서두를 수밖에 없는 구조란 셈이었다.
‘사이드 퀘스트도 무조건 깨야 해.’
신성한 희생에 받은 데미지는 지금도 유효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에 움직이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상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이번에는 쓰러진 역순인가.’
지난 사이드 퀘스트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퀘스트였다.
‘한눈팔고 있었다면…. 아니, 한눈을 팔지 않았더라도 맞추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
걸음을 옮긴 용주는 가장 먼저 쌍어궁이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기억이 맞는다면 녀석은 분명 저기서 최후를 맞이했었다.
‘그런데 빛을 어떻게 담으라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
용주의 의문이 해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용주가 걸음을 멈추자 아지랑이처럼 별빛들이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별빛은 은하수가 되어 설녀의 눈물로 흘러들어 갔다.
모여드는 별빛들은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애잔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걸 봐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쌍어궁의 빛이 완전히 흡수되길 기다린 용주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마갈궁, 보병궁, 거해궁.
차례차례 별들을 인도한 용주는 마지막 사자궁 앞에 섰다.
‘이걸로 마지막.’
치열했던 전투였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전투였다.
모든 전투의 결과를.
그것도 순서대로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용주는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순서만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
처절했던 마지막 외침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 잔존하는 모든 빛을 담았습니다. 여섯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설녀의 눈물’에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었습니다.
- 6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황도의 거울’을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사이드 퀘스트 - 별의 무덤을 완료했습니다.
- ‘황도의 거울’의 위력이 증가했습니다.
- HP가 30 회복되었습니다.
- 대항력이 2 상승했습니다.
- ‘별의 노래’를 획득했습니다.
마지막 빛이 흡수되자 두 퀘스트가 동시에 완료되었다.
▷ 설녀의 눈물.
- 설녀가 흘린 눈물이 결정이 되어 생겼다고 전해지는 보석.
- 가지고 있는 자를 혹한의 추위로부터 보호해 준다.
▷ 황도의 거울.
- 밤하늘을 관리한다는 황도 12궁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특수한 거울.
- 황도 12궁의 힘을 일점에 집중시켜 발산합니다.
- 1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별의 노래
- 별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는 악기.
- 별들의 소리엔 심신과 정신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퀘스트가 완료되며 한 가지 아이템이 변화했고, 2가지 아이템이 추가되었다.
레벨도 대항력도 올랐고.
이번에는 HP까지 일부 회복되었다.
고통의 정도가 순간 팍 줄어든 건 그 때문이었다.
온전히 다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불에 그을린 것 같던 상처도 거의 다 회복되어 있었다.
설녀의 눈물에 생긴 변화 덕분인지 매섭게 살을 에던 추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 일곱 번째 시련.
- 베히모스의 체내로 진입하십시오.
- 설녀의 화형이 끝나면 퀘스트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나타난 일곱 번째 시련.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설녀의 눈물에서 한 줄기 오로라가 뻗어 나왔다.
오로라의 끝이 도달한 곳은 용주의 주머니 안.
용주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아까 사용하던 황도의 나침반이었다.
뭔가 바뀌었음을 직감한 용주는 나침반 안쪽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건….’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나침반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분명 이곳이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나침반은 전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방향이라면 분명….’
저기라면 아까 봤던 기억 속에서 설녀가 끌려간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 번 더 길을 안내해주겠다는 거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용주는 나침반을 닫았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가보자고. 녀석이 마녀사냥당하는 건 나도 곤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