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쉬이잉!!
게이트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한기가 느껴졌다.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밤의 어둠과는 조금 다르단 느낌을 받았다.
검은색이 아닌 회색의 어두움.
이건 기상 악화로 폭설이 내릴 때의 빛깔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 선이면 어떻게든 되겠는데.’
용주가 패딩에 붙은 모자를 눌러썼다.
입김이 나오긴 했지만, 추위의 정도는 다행히 걱정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패딩이나 장갑 같은 기본적인 방한용품 덕이란 생각도 들었다.
평소대로의 복장이었다면, 분명 이런 반응이 아니었겠지.
‘근데 뭐지? 뭔가 숨 쉬는 게 답답한데….’
처음엔 그저 갑작스러운 기온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답답함이 정말 그것 때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건 헌터 시험의 1차 과제 때 느꼈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산소량이 희박한 바로 그 느낌과.
‘여기가 그 정도로 높은 고지대란 건가?’
혹한의 산지.
이름대로라면 뭐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긴 했다.
돌풍을 동반한 눈보라가 치고 있었기에, 보이는 건 많지 않았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시야의 반경은 100m 남짓.
그 안에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저 하얀 눈뿐.
‘그래서 시험이란 놈은 언제 오는 거냐. 뭘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려달라고.’
▶ 12번의 시련을 이겨내십시오.
▷ 첫 번째 시련.
- 얼음 폭풍에서 살아남으십시오.
용주의 생각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메시지가 나타났다.
‘얼음 폭풍? 폭풍이라면 지금 이걸 말하는 건가?’
언제까지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이잉!! 슈우우웅!!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읏…!”
불어오던 바람이 갑자기 성난 돌풍이 되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원래 불던 바람도 잔잔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것에 비하면 그건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었다.
‘입으로 방정을 떤 것도 아닌데 너무하는 거 아니냐?’
변화가 생긴 건 바람의 세기뿐만이 아니었다.
피부를 톡톡 건드리던 눈송이가 얼음 알갱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알갱이의 크기는 크진 않았지만, 그런 게 수십, 수백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주르륵….
피부를 베어 낼 만큼 날카로운 알갱이들이 종종 섞여 있었다.
‘문자 그대로 쉽게 생각했다가 피를 보는구만.’
뺨에 난 상처를 닦아낸 용주는 폭풍을 뚫고 걷기 시작했다.
눈으로 확인한 건 없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걸어도 걸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얼음 폭풍에 둘러싸인 용주가 걸음을 멈췄다.
1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발견하면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고 했는데….’
특정 지형이나 구조물.
아니.
그런 거창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나무 정도만 발견해도 지금보단 상황이 나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쌓인 눈 때문에 생각한 것 이상으로 체력 소모가 심했다.
이쯤 되면 걷는 게 오히려 독이 된다고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제자리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나.’
바닥에 무릎을 붙인 용주는 눈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들은 적 있었다.
눈 속에 굴을 파는 게 가능하다고.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체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생각보다 쉽진 않겠는걸….’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폭풍에 얼어붙은 눈은 맘처럼 파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들어갈 수 있겠어.’
굴의 구조는 안쪽이 넓은 호리병 형태.
굴의 입구는 최대한 작게 만들었다.
‘그 전에….’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두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하나는 폭발 화살.
다른 하나는 바실리스크의 꼬리였다.
‘살을 덮은 갑주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거북이 요리 중엔 거북이를 등 껍데기째로 조리하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껍데기가 불길을 막아줘 살코기가 탈 염려가 없다고.
여기서 불을 피울 순 없었지만, 폭발을 일으킬 순 있었다.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조리가 될지도 모르지.
‘충분히 평평한 지형이니 이 정도로 눈사태가 나진 않을 거야.’
충분한 거리를 벌린 용주는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바짝 탄 바실리스크의 갑피는 조금의 힘만으로도 쉽게 부서졌고, 안쪽의 살은 야들야들하게 익어 있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바실리스크 고기를 다 먹은 용주는 머리부터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굴의 크기는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있을 정도.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이제 남은 건….’
바깥의 눈을 끌어온 용주는 다시금 입구를 막았다.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폭풍도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버티는 것.
추위와 시간.
이 두 가지가 현재 용주의 적이었다.
▷ 얼음 폭풍이 지나갔습니다. 첫 번째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 1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 얼어붙은 피부
- 패시브
- 냉기에 대한 저항이 증가하며, 피해가 감소한다.
- 동상에 의한 통증을 줄여준다.
메시지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뒤.
쌓아놓았던 눈 벽을 허문 용주는 다시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발은 가장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 정도로 돌아가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내긴 했네.’
엄청난 강적을 상대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첫 시련만으로도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이 상당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그 압박감 속에 손발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 공포는 아마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스킬이 생긴 건 좋은데… 이왕 생길 거 조금만 빨리 생겨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독, 화염, 그다음에 생긴 건 냉기에 대한 저항이었다.
크건 작건 이번 퀘스트 내내 유용하게 사용될 게 분명했다.
다만, 조금만 더 빨리 발현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욕심도 들었다.
제법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건 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밖으로 나온 용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주가 있던 굴을 주변으로 12마리의 늑대가 서 있었다.
실제 늑대는 아니었다.
저건 얼음으로 만들어진 늑대 조각.
시야에 제약이 상당했지만, 저 거리에 저런 게 있었다면, 분명 발견했었을 텐데….
용주는 저 조각들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했었다.
‘이건 또 뭐고?’
중심이 되는 지점엔 얼음으로 만들어진 석판이 하나 있었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석판엔 12개의 문양이 두 줄로 배치되어 있었다.
▷ 두 번째 시련.
- 12마리 얼음 늑대를 모두 쓰러뜨리십시오.
▷ 사이드 퀘스트 - 얼어붙은 별의 길.
- 12마리 얼음 늑대를 자리 역순으로 제거하십시오.
용주가 석판을 확인하자 다음 시련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깨어난 조각상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그들은 곧장 용주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 정도는 줘도 되는 거 아니냐?’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얼음 발톱.
머리를 지나는 두 개의 공격은 움직여 피하고 오른쪽 사이드에서 치고 들어오는 두 개의 공격은 칼날로 받아낸 용주였지만, 그걸로 모든 공격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왼쪽 팔과 어깨.
오른쪽 종아리와 왼쪽 허벅지.
첫 교전 만에 입은 상처는 벌써 4개.
흘러내린 피는 하얀 눈밭을 적시고 있었다.
‘자리도 그렇고, 타이밍도 그렇고, 영 좋진 않은데.’
손과 발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의 기능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반응 속도는 엉망.
게다가 눈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까지 있었다.
덕분에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공격까지도 허용하고 말았다.
호흡 역시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공기가 희박하단 게 느낌만이 아니었는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호흡이 빠르게 거칠어졌다.
‘이대로면 계속 갉아먹힐 거야.’
움직임이 회복되는 속도와 HP가 깎여 나가는 속도.
둘을 비교하면 후자가 더 우위에 있었다.
‘어차피 잃어버릴 HP라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얻은 두 가지 스킬.
그거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스팀팩!’
스킬을 발동하자 많은 양의 HP가 한 번에 줄어들었다.
단번에 시야가 선명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흘러나오던 피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통증 부위의 고통이 완화되었다.
무뎌졌던 손발의 감각도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감각은….’
왼쪽 종아리와 오른쪽 어깨.
전혀 다른 두 지점을 향한 동시 공격을 한 번의 움직임으로 피해 낸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템이 떠올랐다.
질풍의 보석.
몸이 가벼운 이 느낌은 질풍의 효과를 받았을 때와 닮아 있었다.
‘좋아. 그럼 다음.’
스팀팩의 효과를 체감한 용주는 빠르게 두 걸음 물러났다.
‘인스네어!’
곧장 이어지는 다음 스킬.
효과 자체만 보면 지난번 상대했던 부유형 게이트 보스가 떠올랐다.
녀석이 만들어 내던 가스 지대가 딱 이 텍스트에 부합하니까.
이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건지는 아직까지 미지수였다.
전개되는 위치도, 전개되는 범위도 아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써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
‘뭐지?’
스킬을 발동한 용주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MP가 줄어든 걸로 봐서 스킬이 발동된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거다 싶은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일단 날 기준으로 즉발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을 하면서도 용주의 몸과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건….’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한 가지 변화.
왼손 주위에 초록빛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달처럼.
‘이걸 맞추면 되는 건가?’
반딧불이의 빛처럼 작고 동그란 구체.
직감이 시키는 대로 빛을 움켜쥔 용주는 눈앞에 있는 적에게 빛을 적중시켰다.
슈우웅!
그와 동시에 형성되는 초록 가스 지대.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한 지대 안에서 늑대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좋아. 지금이라면….’
뒤통수를 노렸던 공격을 흘려보낸 용주는 곧장 반격에 나섰다.
‘아니, 잠깐만…!’
칼날이 목을 꿰뚫기 직전.
용주는 급하게 공격을 포기했다.
완벽한 기회를 포기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사이드 퀘스트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사이드 퀘스트 보상엔 분명 대항력이 붙어 있을 거야.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순 없지.’
대항력을 얻을 수 있을 때 얻어 두는 게 훗날 있을 피를 대비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자리 역순으로 제거하라. 분명 그런 퀘스트였지.’
자리의 역순.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용주는 알고 있지 못했다.
‘뭐지? 자리의 역순이란 게 대체 뭐냐고?’
공격의 기회를 또 한 번 포기한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다 할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깨어난 순서나 움직인 순서.
혹은 처음 배치되어 있던 위치의 시계 순이 아닐까 하는 게 지금까지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었다.
게다가 그게 정답이라면 극악의 확률을 뚫고 찍어 맞추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이미 이렇게 섞여 버린 이상 그걸 판별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리적인 자리 말고 뭔가 다른 의미가 있다면?’
힌트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것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혹은 눈앞에 두고도 인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12….’
용주의 머릿속에 그 숫자가 맴돌았다.
시련의 개수는 12개.
그리고 늑대들의 숫자 역시도 12마리였다.
‘만약 숫자에 뭔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12는 예로부터 많은 의미를 가졌던 숫자라고 알고 있었다.
1년은 12달.
동양의 십이지신.
원탁의 열두 기사.
올림푸스의 12신.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그 모든 게 12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잠깐만, 12라면 하나 더 있잖아.’
용주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얼음 석판이 떠올랐다.
거기 그려져 있던 그림도 분명 12개였다.
그리고 거긴.
분명한 순서가 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가설을 세운 용주는 검증을 위해 움직였다.
만약 그게 맞다면 녀석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표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빙고.’
그리고 용주는 발견할 수 있었다.
늑대의 뒷목에 새겨져 있는 마크를.
오메가 모양과 닮은 특별한 기호를.
자리를 옮긴 용주는 다시 한번 석판을 확인했다.
방금 확인한 기호는 7번째 마크.
제거해야 할 순서로는 6번째로 제거해야 할 놈이란 소리였다.
‘그럼 남은 건….’
12개의 마크를 역순으로 파악한 용주는 제거 순위를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건 H의 필기체 같은 기호를 가진 녀석.
지금 옆구리를 스쳐 간 이 녀석은 아니었다.
자기 손가락을 벤 용주는 교차하는 늑대의 몸에 숫자를 새겼다.
4.
이게 녀석이 쓰러질 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