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오빠! 살아 있어?!!”
아래를 내려다본 예나가 외쳤다.
비스듬하게 날아간 주원은 부유석 끝에 간신히 멈춰 서 있었다.
“어~! 어떻게든 살아는 있는 것 같아.”
몸을 일으킨 주원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금만 더 속도가 붙었더라면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을 게 분명했다.
“괜찮소이까?”
다른 사람들이 도착한 건 그때쯤이었다.
주원의 상태를 확인한 용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길 뛰어내릴 생각을 하다니, 용감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원.”
서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것 외에 선택지가 없던 상황이니 그렇게 했겠지만, 애초에 그 상황을 만든 것 자체가 큰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저 녀석 어떻게 구할 거야? 내려가면 우리도 못 올라올 것 같은데.”
서윤의 눈에 딱히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몇 개의 부유석이 더 있었지만, 길이라 할 수 있는 곳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고구마 아저씨. 어떻게 안 될까요?”
예나가 물었다.
스킬을 발동한 그의 신체 능력이라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했다.
“음…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시도를 해봐야겠지.”
“뭐?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서윤이 놀라 물었다.
“최대한 평행선을 그리는 높이에서 뛰는 수도 있소.”
“아니, 어쨌거나 뒤가 없는 건 똑같잖아.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위험이 있다고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않소.”
“아니, 그러니까 조금만 침착해져 보라니까? 여긴 카오스 게이트잖아. 카오스 게이트가 클리어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
“아!”
서윤의 물음에 예나가 반응했다.
게이트 클리어가 불러오는 게이트 내부의 변화.
그거라면 주원을 무사히 꺼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동안은 혼자 있어야겠지만, 그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은데.”
서윤이 용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제일 위험 부담 없는 방법이긴 하지.”
“그럼. 결정….”
“저것만 없다면 말이야.”
용주의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중앙 루트에서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의 비행체들이 보였다.
“저건….”
“언노운?!”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부유형 언노운들이었다.
고도를 낮춘 그들은 곧장 주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설마 녀석을 보고 달려온 거야?!”
언노운들의 표적은 너무도 명확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고립된 주원을 타깃으로 잡은 게 분명했다.
주원이 있는 부유석은 기껏해야 대여섯 발자국 정도 움직일 수 있는 사이즈.
사방에서 포위 공격을 해온다면, 주원에게 승산은 많지 않아 보였다.
제아무리 장판파의 장비라도 다리 자체가 무너지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내가 가겠네.”
“아니, 너흰 저쪽을 좀 상대해줬으면 하는데, 이쪽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금화의 말을 가로챈 용주가 반대편을 가리켰다.
반대편 통로를 따라 안드로이드형 언노운들이 추가로 도착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서윤이 물었다.
“그래.”
충분한 도약 거리까지 물러난 용주는 곧장 속도를 높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약한 용주.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공간 균열의 반지를 사용한 용주는 더욱더 먼 곳까지 이동했다.
‘물어뜯기!’
부패하며 뜯겨 나가는 용주의 피부.
스킬을 중첩해서 사용한 용주는 언노운을 낚아챘다.
촤악!
그와 동시에 흩뿌려지는 언노운의 피.
강하하는 언노운 무리의 꼬리를 잡은 용주는 놈을 왼쪽으로 끌어당겼다.
‘뒤쪽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없나 보군.’
언노운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가시지 않는 식욕’으로 공격력이 상승한 용주의 계속되는 공격에 결국 방향이 틀어졌다.
추락하는 언노운은 옆에 있던 다른 언노운과 충돌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용주는 다른 언노운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키이잉!
불청객의 난입에 일부 언노운들이 타깃을 돌렸다.
용주를 에워싼 언노운들.
동그란 몸체 상부에 달린 눈으로 모여드는 푸른빛은 일순간 섬광이 되어 사출되었다.
순식간에 벌집이 된 언노운은 나락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한발 늦었어.’
마침맞게 돌아온 반지의 쿨타임.
점멸을 활용해 섬광을 정면 돌파한 용주는 또 다른 언노운을 물어뜯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공중전 속에서 용주는 하나하나 적들을 격파해 나가고 있었다.
‘공중에서 저렇게 싸울 수 있다니. 역시 용주 형이야.’
빗발치는 공격들을 피하던 주원이 검을 고쳐잡았다.
‘나도 파이팅해야지. 침착하는 거야. 명경지수. 명경지수.’
저공비행을 펼치며 다가오는 언노운이 직선거리 안에 있었다.
“월영식 -자(紫)!”
물결치는 세 갈래의 보랏빛.
갈기갈기 찢긴 언노운과 교차한 주원은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월영식 - 적(赤)!”
보랏빛 꽃잎에 이어지는 붉은 파동.
가로로 길게 뻗어 나가는 파동 속에 언노운들의 피와 살이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주원이 있는 부유석보다 아래쪽으로 언노운을 몬 용주는 놈에게 중심을 돌려주었다.
꼬꾸라지던 언노운은 부유석 아래를 지났고, 용주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무언가를 부유석에 부착했다.
‘좋아. 붙였어.’
반지를 힐끔 바라본 용주는 보류해 두었던 치명상을 입혔다.
그와 동시에 위쪽으로 뻗은 용주의 왼손.
부유석을 관통한 용주는 그 위에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 * *
“어찌어찌 다 쓰러뜨리긴 한 것 같네요.”
주원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언노운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살았어요. 형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라고요.”
“뭐, 그러냐.”
“혹시 위쪽에 무슨 일 있어요?”
주원이 세 사람이 있던 곳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언노운이 더 나타났었다.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거겠지.”
“언노운?! 그럼 우리도 얼른 합류해야죠!”
“아서라. 지금 움직여 봤자 상황만 더 복잡해질 뿐이니.”
“음… 그건 그렇지만.”
주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때문에 용주까지 이 무인도 같은 곳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위쪽 전력도 약화되어 버렸고.
자신의 행동 하나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용주 형. 거기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알면 됐다. 반복하지만 않으면 돼.”
주원의 실수는 치명적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실수는 아니었다.
그 작은 부주의함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본인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네! 그럴게요. 근데… 위쪽은 괜찮은 걸까요?”
“3차 시험 때 실력을 보인 녀석들이다. 쉽게 당하진 않을 거다.”
“그렇겠죠? 그럼 저흰 여기서 어떻게 나갈지만 고민하면 되겠네요.”
주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응?’
그리고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길이 원래 여기보다 낮았었나?’
미묘하지만 아까와는 위치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용주 형, 이거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데.”
똑같은 곳을 한참 바라보던 주원이 이야기했다.
저쪽이 낮아지는 게 아니라면, 이쪽이 확실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이렇게만 올라가면, 저 위까지도 닿겠는데요? 나갈 수 있겠어요!”
“그래. 그래야지.”
용주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불규칙하게 떠다니던 부유석이 일정하게 상승하는 원인.
그건 용주가 아까 사용한 아이템 때문이었다.
모래 부유석.
언노운이 부유석 아래를 지날 때.
공중에 뜨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그걸 이 아래에 부착해 두었다.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것치곤 다행히 효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 * *
“살아 돌아온 것까진 좋은데, 아주 기다리다가 날 새겠어. 응?”
두 사람을 기다리던 서윤이 이야기했다.
천천히 올라오던 두 사람은 마침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주원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뭐. 알면 됐어.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서윤이 옆머리를 배배 꼬았다.
이렇게까지 추궁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뭔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빠, 다친 데는 없어? 아까 엄청 요란하게 떨어졌잖아.”
예나가 물었다.
“아, 아주 멀쩡해! 완전 퍼펙트하다고!”
주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래? 거기서 멀쩡한 게 더 신기하긴 한데, 그래도 다행….”
예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주원의 인중을 타고 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 코피 나는데?!”
“어…? 코피?!”
덩달아 놀란 주원이 인중을 닦아 냈다.
“야! 피 나면 고개 이렇게 젖혀! 가만히 보고 있지만 말고! 그래야 빨리 멈출 거 아니야!”
주원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서윤이 강제로 머리를 젖혔다.
“우와악!”
주원의 허리는 활대처럼 휘어 있었다.
“아닐세. 그건 잘못된 대처라네. 고개를 자연스럽게 숙이게나.”
서윤을 진정시킨 금화가 제대로 된 응급처치를 했다.
“오빠가 고생이 많네.”
용주를 바라본 예나가 이야기했다.
C급 언노운과의 첫 전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는 대승이었다.
용주의 전투 장면을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쪽도 빠듯하게 전투가 이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주가 했을 전투에 비하면 이 정도는 쉬운 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두 다리가 땅에 붙어 있다는 안도감은 있었으니 말이다.
“뭐,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 할 줄 알았어. 버티도 오빠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대. 그리고 내가 이 말 하면 오빠는 이러겠지? ‘뭐, 그러냐’라고!”
용주의 흉내를 낸 예나가 히죽 웃어 보였다.
예나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에 용주는 시선을 돌렸다.
“뭐, 그러냐.”
용주의 대답에 예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땐 계속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만,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 * *
“부유형이랑 4족 보행 안드로이드형 개체. 하필 이런 곳에서 원거리 타입을 둘이나 만나다니. 성가시구만.”
또 한 층 위쪽으로 올라간 병규가 이야기했다.
같은 적이라도 이곳에서의 적들의 움직임은 훨씬 더 자유로웠다.
“까다롭긴 하지만, 갑피가 발달한 타입이 아니지 않습니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쓰러뜨리는 데는 문제없죠.”
태영이 대답했다.
언노운과의 교전은 벌써 다섯 차례.
C급 언노운들의 수준은 대략 파악을 완료했다.
전투 난이도는 제법 있는 수준.
언노운 개개인의 힘이나 속도도 D급 개체보다 확실히 상위인 게 느껴졌다.
첫 교전에선 버겁단 느낌까지도 받았었다.
하지만 발악하듯 전투에 임했다.
지금까지 겪어온 전투와 경험을 토대로 분석하고, 사고했다.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병규를 비롯한 C급 헌터들은 자신을 전력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무리엔 있었지만, 외딴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위기에 빠진 헌터들이 발생했고, 태영은 그때마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서포팅하며 나섰다.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마지막까지 태영을 인정하지 않던 병규까지도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E급 녀석들은 별로 안 괜찮지 않을까? 특히 그 호박은.”
“그 말만 벌써 다섯 번째네요. 유독 한 사람한테 집착하시던데, 혹시 관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태영이 안경테에 손을 얹었다.
“뭐?! 내가 그딴 호박한테?! 그럴 리가 있나! 웃기지 말라고!”
“그런가요? 뭐,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습니다.”
태영이 태연하게 넘어갔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로 봐서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관심이 나쁜 방향으로 표현되는 게 문제겠지.
“그러는 너야말로 그 E급들을 너무 믿는 거 아니야? 시험이니 뭐니 합격했다고 해도, E급은 E급이라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도 같은 취급당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뭐, 아니란 말은 못 하지만… 내가 너까진 인정해도 그 녀석들은 아니라고.”
“단순히 그들이 E급 출신이기 때문입니까?”
“뭐, 그렇지.”
“음…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헌터의 강함이란 건 등급만으론 가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늠할 수 없다고?”
“네. 티르의 손이 계측하는 건 순전히 마나뿐.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죠. 마나가 많고 크기에 강하다. 맞는 이야기지만 동시에 맞지 않는 이야기기도 하죠.”
태영이 어깨를 들썩였다.
“뭐,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실은 저도 얼마 전까진 그런 생각 별로 안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에요.”
“음…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네.”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던 병규의 앞에 큰 규모의 평지가 나타났다.
“언노운은 없는 건가?”
“그런 거 같은데요?”
C급 헌터들이 이야기했다.
이렇게 넓은 부지가 나타나면 백이면 백 언노운이 나타났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언노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니까 더 불길한데.’
태영이 사주를 경계했다.
이 침묵이 어딘가 더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