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 *
카오스 게이트 내부로 들어온 용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쪽을 향했다.
지금까지 접해 왔던 카오스 게이트와는 내부가 확연히 달랐다.
밀폐된 통로나 동굴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붉은색을 띤 하늘이 보였고, 조각조각 떠다니는 돌들이 보였다.
돌의 크기는 완전 제각각이었는데, 큰 건 학교 운동장만 한 것도 있었다.
포탈이 있는 곳을 지점으로 나뉜 길은 크게 세 갈래.
평지로 시작된 길은 부유석들을 따라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뭐람?”
뒤따라 들어온 주원이 감탄을 표했다.
“영화에서 나올 법한 그런 모습 같지 않아? 부서진 세계. 막 그런 거.”
“그렇게 감탄할 때야? 여기 C급 게이트라고.”
예나가 핀잔을 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나 역시도 신기하단 생각은 하고 있었다.
집사에게 이 이야기 해주면 분명 놀라겠지.
“C급 언노운…. 잘할 수 있겠지? 그치, 버티야?”
예나가 버티를 끌어안았다.
여기 있는 건 D급도 아닌 C급 언노운.
긴장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잘할 수 있고말고. 긴장하지 마.”
“응?”
누군가의 목소리에 예나가 고개를 돌렸다.
버티를 대신해 목소리를 낸 금화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C급 게이트에 긴장한 사람은 당연히 예나뿐만이 아니었다.
금화도 용주도 평소보다 훨씬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는 이는 두 사람.
“우와~ 저거 막 움직이는데? 어디까지 가려나.”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주원과.
“저 녀석들, 벌써 저기까지 갔잖아?”
풍경보다 사람에 집중하고 있는 서윤이었다.
왼쪽 루트를 선택한 C급 헌터들은 벌써 저만치 올라가 있었다.
“보아하니, 언노운도 게이트 보스도 위로 올라가면서 상대해야 하는 구조인 것 같구려.”
언노운의 모습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보통의 게이트와 달리 다른 그룹의 위치와 현재 상황 같은 부분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처럼 보였다.
언노운이 나타난다면, 이쪽에서도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될 테지.
“그러고 보니, 이번엔 정찰조도 따로 없었대? 딱히 정보 받은 게 없었던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혹시 어때?”
서윤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갑자기라 여력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C급 헌터들의 합류도 어제 급하게 결정된 것 같던데.”
주원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두 게이트가 충돌하기 전에는 부유형 개체가 관측되었었다고 하더군. 지금은 거기에 뭔가가 더 얹혀 있겠지.”
용주가 대답했다.
“부유형? 그게 어떻게 생긴 거야?”
예나가 물었다.
“음 그러니까 풍선이나 귀신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타입이야. 나도 그렇게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내가 만나본 것들은 그랬어.”
주원이 귀신 흉내를 내보였다.
“뭐야? 근데 그 이야기 어디서 들은 거야?”
“평범하게 길드를 통해 전해 들었다만.”
“뭐야? 왜 똑같은 연락 받았는데, 정보량이 달라.”
서윤이 꿍한 표정을 지었다.
“나만 못 들은 게 아니니 그쪽 스피커가 유독 성능이 좋은 건가? 엄청 성실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나 보네.”
“뭐… 그렇지.”
쌍둥이 자매 중 가영 쪽이라면 대답이 조금 망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인 나영 쪽이라면 큰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럼 슬슬 우리도 루트를 정해 보세나. 왼쪽 루트는 저들이 선수를 쳤으니, 남은 선택지는 두 개구려.”
“난 오른쪽 루트에 한 표. 저 녀석들이랑 되도록 멀리 있고 싶어. 목소리만 들려도 짜증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 같거든.”
서윤이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다른 의견은?”
“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나도 상관없어. 버티도 상관없대.”
주원과 예나가 대답했다.
“그럼 결정 났군.”
검을 뽑아 든 용주가 앞장섰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서로 다른 몇 개의 돌들이 이어진 길을 걷던 예나가 물었다.
길 이외의 공간은 말 그대로 허공이었다.
아래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글쎄…. 버티한테 보고 오라고 해볼까? 예나 칼에 매달리면….”
“그러니까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그런 건 기각이야!”
예나가 주원에게 버럭 화를 냈다.
“호기심은 좋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만 생각하세나.”
금화가 웃어 보였다.
한발 앞서간 용주와 서윤은 위쪽으로 이어지는 부유석을 밟고 있었다.
뚜벅!
계단처럼 이어진 부유석을 타고 오른 용주는 제법 큰 규모의 대지를 눈앞에 두었다.
키이잉!
그와 동시에 날아온 한 발의 붉은 광선.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온 갑작스러운 기습은 용주의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야!!”
가장 가까이 있던 서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한발 물러서며 중심을 다시 잡는 용주의 눈에 언노운들이 보였다.
갯벌을 돌아다니는 게처럼 바닥에 바짝 붙어 이동하는 언노운.
네 개의 다리와 연결된 몸통 중심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놈들이 움직일 때마다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부유형 언노운이 아니야.’
검을 움켜쥔 용주는 전장을 가로질렀다.
사방으로 흩어진 언노운들은 도망가며 계속 거리를 벌렸고, 붉은색을 띤 사출구에선 또다시 광선들이 발사되었다.
‘C급의 일반 개체. 어디 어느 정도인지 봐볼까?’
팔등을 스친 광선을 뚫고 나간 용주는 왼손을 끌어당겼다.
공간 균열의 반지를 이용한 짧은 점멸!
공중으로 위치를 옮긴 용주는 무방비 상태인 언노운의 몸통 위로 떨어졌다.
‘물어뜯기!’
사출구를 꿰뚫린 언노운은 푸른 피를 쏟으며 비틀거렸고, 이빨을 드러낸 용주는 그대로 놈의 중심부를 찢어 씹었다.
어깨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저게 C급 언노운?!”
“안드로이드형 언노운의 일종인가 보구려.”
대검을 뽑아 든 금화가 곧장 전투에 가세했다.
나머지 인원들도 마찬가지.
입구를 중심으로 부채꼴을 이룬 헌터들은 언노운과의 전투에 돌입하고 있었다.
치링!
벼랑 끝으로 도주하는 언노운을 추격한 금화는 놈의 앞발 후려치기를 어깨로 밀쳤다.
‘확실히 E급과는 격이 다르구려. 원거리 타입의 언노운의 힘이 이 정도라니. 하지만…!’
“수라강림!”
강력한 태클에서 이어지는 금화의 올려치기.
스킬을 발동한 금화의 힘은 언노운의 힘과 속도를 압도했다.
큰 상처를 입고 추락하려던 언노운은 앞다리를 간신히 지반에 걸쳐놓았다.
후욱!
그런 언노운을 베어 내는 육중한 대검.
앞다리를 잃은 언노운은 끝이 보이지 않는 차원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잘도 저질러 줬겠다!’
빠른 속도로 언노운을 따라붙은 서윤이 검을 휘둘렀다.
두 눈 새파랗게 뜨고 용주가 부상을 입는 걸 보고 말았다.
“C급 언노운…. C자로 시작하는 놈들은 다 그 모양 그 꼴인가 보지? 치사하고, 비겁하고, 못생기고.”
처음 노린 곳은 왼쪽 다리 마디.
약간의 비틀거림을 놓치지 않은 서윤은 빠르게 네 개의 다리 모두에 상처를 만들었다.
키잉!
몸을 최대한 움츠린 언노운은 사출구를 활짝 개방했다.
코어에 모이는 붉은 기운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받은 건 이자까지 쳐서 돌려줘야겠지?! 내 스트레스까지 더해서!”
하지만 서윤 쪽이 좀 더 빨랐다.
언노운의 상처가 늘어가고, 더 많은 피를 흘릴수록 서윤은 점점 더 녀석을 압도하고 있었다.
“네가 C급이면 다야?! C라고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언노운의 정중앙을 찢은 서윤은 그대로 검을 가로로 뉘었다.
“죽어 버려! 개자식아!”
반쯤 찢긴 언노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우왓! 우아아악!”
세 마리의 언노운에 포위당한 주원이 오른발을 튕기며 반 발짝 물러났다.
눈앞과 머리 위를 동시에 스치는 광선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오빠, 까딱 잘못했으면 머리 홀라당 벗겨졌겠는데? 가운데만 이렇게.”
검을 움직인 예나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버티와 검에 쫓긴 언노운은 자연스럽게 한군데로 모여 있었다.
분명 미친 듯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허당 같은 주원의 모습에 조금 긴장이 누그러졌다.
“예나야. 그거 진짜 무서운 소리인지 알지?”
자세를 낮춘 주원은 폭발적으로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세 마리의 다리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는 주원.
“버티!”
중앙으로 쏠린 시야의 사각을 파고든 버티는 오른쪽에 있던 언노운의 다리를 뜯어냈다.
“월영식 - 자(紫)!”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주원의 찌르기.
날카롭게 들어간 주원의 검술은 언노운의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었다.
“주원 오빠, 뒤에!”
예나의 브리핑에 곧장 반응한 주원은 언노운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완전 빠르게 베기!”
코어 아래로 파고든 주원의 참격.
조금의 오차도 없이 같은 곳을 베고 또 베어낸 주원은 놈의 그림자를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면서도 뒤를 돌아섰던 언노운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오빠, 이름이 그게 뭐야. 그것도 검술 이름이야?”
“아니, 그게 뭔가 분위기상 한 마디 외쳐줘야 할 것 같아서. 근데 딱히 생각이 안 나더라고.”
주원이 멋쩍게 이야기했다.
남은 언노운은 하나.
벼랑 끝까지 물러난 언노운은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저 녀석, 떨어져 버린 거야?!”
경계면까지 달려간 주원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키이잉!
그 순간,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빛나는 코어와 눈이 마주친 주원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던졌다.
“주원 오빠!!!”
떨어졌다 생각했던 언노운은.
중력을 거스른 채 부유석에 수직으로 붙어 있었다.
‘돌에 수직으로…!’
주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만 지체했었다면, 미간이 꿰뚫렸을 것이다.
‘이건 진짜 위험한데.’
생각보다 먼저 움직인 몸 덕분에 하나의 위기를 넘기긴 했다.
하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거대한 위협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아래는 끝이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는 나락.
떨어지면 두 번 다시 올라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주원 오빠!”
당황한 주원의 귀에 예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코어를 연 언노운은 다시 한번 붉은빛을 모으고 있었다.
‘저 녀석, 설마….’
놈이 어딜 겨누고 있는지는 애매했다.
하지만 주원이 느끼기에 놈은 위쪽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뛰던 심장이 순간 고요해졌다.
지금 당장 녀석을 처리해야만 했다.
“월영식 - 적(赤)!”
더 높은 곳에서 검기가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부유석과 함께 잘려 나간 언노운은 뒤집힌 채 추락하고 있었다.
‘좋았어!’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잠시 고요해졌던 심장은 다시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고.
빠르게 굴러가는 주원의 눈동자는 다급하기만 했다.
‘침착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호흡을 가다듬은 주원은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주원에게 마침내 하나의 희망이 보였다.
균일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부유석이 몇 개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자신의 추락 궤도와 상당히 유사한 곳에 있었다.
저기 떨어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추락 궤도와 부유석의 방향이 유사할 뿐이라는 것.
일치하지 않는 한 결과에 변함은 없었다.
‘용주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때.
주원의 시선에 예나의 검이 보였다.
예나는 정확히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거야.’
“예나야!”
주원이 있는 힘껏 외쳤다.
그게 최선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이쪽에서 날 공격해줘!”
주원이 허공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예나는 주원의 말대로 검을 움직였다.
챙!!
맞부딪치는 칼날과 칼날.
힘의 반동에 주원의 방향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좋았어!’
뒤를 돌아본 주원이 그대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부유석이 있었다.
무조건 저기 떨어져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