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안녕하세요. 용주 씨. 저 은정이에요.
최근 잠잠하시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연락드려 봤어요.
제가 말해 놓고도 저도 이상하네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건 알아요.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용주 씨잖아요.
잠잠하니 오히려 또 걱정되고 그러네요.]
‘다쳤을 땐 다쳤다고 걱정이더만, 안 오니까 또 그거대로 걱정이라니. 하여튼 걱정도 많다니까.’
용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또래 중에 소식이 없다고 의사에게 개인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그래도 고맙긴 하네.’
은정이 앞에 있었다면 분명 딴소리를 했을 것이다.
지원금이 덜 나와서 아쉬웠냐느니 하는 뭐 그런 소리였겠지.
‘녀석이라면 쓰려나?’
은정의 스케줄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었다.
갔을 땐 대부분 있었고, 근무가 아닌 시간에도 자신이 왔다 하면 은정이 나왔었다.
하지만 용주가 병원을 찾아간 날짜는 불규칙적이었다.
근무 날이 있다면, 상식적으로 비번인 날도 있지 않겠는가.
만에 하나 내일이 그날이라면 그녀도 좋은 후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세를 진 걸로 치면, 이쪽만큼 많이 진 사람도 없겠지.
띡-.
통화 버튼 위에서 몇 번을 망설이던 용주가 끝내 버튼을 눌렀다.
30초 이상 이어지던 통화 대기음은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여보세요? 용주 씨?”
조금 당황한 듯한 은정의 목소리였다.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은데, 귀신이 건 전화로라도 보인 거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전화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해봐야 읽고 마시겠거나 싶었는데….”
확실히 그게 자신다운 반응이긴 했다.
은정이 그렇게 연락을 했을 때도 읽고 말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행동은 자신답지.
아니, 헌터인 이용주답지 못했다.
“뭐, 그러냐. 살아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연락해 봤다.”
“살아 있는지 궁금해하다니, 말이 뭐 그래요?”
“그럼 아닌가?”
“아니, 맞기는 한데, 어감이 좀 그렇잖아요. 안부를 물었다든가, 걱정을 했다든가. 그런 예쁜 말들도 있잖아요.”
추궁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용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핸드폰 너머에 있을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연락이 닿은 김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묻고 싶은 거? 그래요. 말씀해 보세요.”
“내일 시간 있냐?”
“시간…?!”
놀란 은정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내일 모처럼 비번이긴 한데, 갑자기 왜요? 당황스럽게.”
“아니, 실은 내일까지 써야 하는 놀이공원 티켓이 들어와서 말이야. 괜찮으면….”
“용주 씨…. 설마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용주의 말을 가로챈 은정이 이야기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용주가 손을 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을 끝까지….”
“같이 놀이공원 가자는 거잖아요. 그렇죠?”
용주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러니까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 같이 갈 사람 있으면 같이 갔다 오라고 하려고 한 거였다. 나한텐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언성을 높였던 용주는 액정을 바라보았다.
통화 종료가 된 것도 아닌데 은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하핫,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어요. 용주 씨가 저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침묵을 깬 은정이 웃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저도 딱히 같이 갈만한 사람이 안 떠오르네요. 하도 일에 잡혀 살아서 말이에요.”
“그래? 그럼….”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용주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말한 은정이 말을 이어갔다.
“그 티켓 제가 두 장 다 받은 걸로 할게요. 그리고 저랑 같이 갈 사람은… 용주 씨 당신이에요.”
“뭐…?!”
“용주 씨가 절 초대하지 않겠다면, 제가 용주 씨를 초대하겠다고요. 어때요? 저도 용주 씨도 친구 없는 건 매한가지일 것 같은데.”
“아니. ‘어때요’라고 말해도….”
“왜요? 싫어요?”
몰아치는 은정의 물음에 용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럼 뭐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요? 저랑 가는 게 그냥 싫으신 거예요?”
“…….”
은정의 물음에 용주가 난색을 표했다.
뭐라 말하기가 참 곤란했다.
“뭐예요? 말하던 사람 어디 갔어요?”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그럼요. 어서 약속 시간 잡아봐요. 제가 맞출 테니까.”
“…하아~ 내일 오전 10시. 병원 앞에서 보는 걸로.”
한숨을 내쉰 용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장난은 아닌 모양이다.
“병원 앞? 왜 하필 거기예요? 저 쉬는 날까지 출근길 걷기 싫은데요.”
용주의 장소 선정에 은정이 불만을 표했다.
“그럼 뭐 어떡해. 난 네가 사는 곳도 모르는데.”
“음… 그럼 부천역 광장에서 보는 걸로 해요. 어때요?”
“그래. 그럼 그러는 걸로 하지.”
“그럼 내일 봐요. 제발 어디 다쳐서 오시지 마시고요.”
통화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용주는 또 한 번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흐름대로 가다 보니까, 상황이 여기까지 와 있었다.
이제 와서 되돌리려 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놀이공원…인가.’
아쿠아리움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가본 기억은 있었다.
어느 놀이공원이었는지 까진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실내와 실외가 나뉜, 꽤 큰 규모의 놀이공원이었던 것 같다.
‘이거 완전히 말려들었군.’
침대로 돌아간 용주는 다시 대자로 뻗어 버렸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은정의 페이스에 100% 말려들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오전 9시 45분.
용주가 바라본 핸드폰에 적혀 있는 숫자였다.
‘아직 안 온 건가?’
광장에 도착한 용주는 맞은편에 보이는 패스트푸드점을 향해 걸었다.
광장은 상당히 조용했다.
전날 버려진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긴 했지만 말이다.
패스트푸드점 앞에 있는 화단에 걸터앉은 용주는 공간 균열의 반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남은 균열의 저주는 약 31%.
몇 번 사용한 것만으로 1%가 줄어 있었다.
‘그래도 한 번에 1%씩 줄어드는 건 아닌 모양이네.’
그 밖에 다른 아이템들을 한 번 더 훑어본 용주는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9시 55분.
약속 시각은 이제 코앞이었다.
‘남부, 북부로 갈린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용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정이 건 거였다.
아무래도 조금 늦는다는 그런 말을 하려는 모양이다.
“전화 받았다.”
“용주 씨, 오른쪽 봐봐요. 오른쪽.”
“오른쪽?”
“네! 그 중고서점 있는 방향이요.”
용주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그녀가 말한 서점 앞에는 하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저 보여요?”
창문이 내려간 운전석에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자리를 옮겼다.
“건강해 보이네요. 안심이에요.”
은정이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조수석에 앉은 용주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차로 올 줄은 몰랐는데.”
사복 차림의 은정을 본 용주가 이야기했다.
루즈핏의 오픈 체크셔츠.
골지티와 청바지.
항상 흰 가운을 입은 모습만 보이던 은정이기에 낯설면서 동시에 잘 어울렸다.
“대중교통도 분위기 있긴 한데, 이런 것도 좋잖아요. 어때요? 폼 좀 나요?”
조수석 등받이에 손을 올린 은정이 후진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평소보다 화장이나 코디에 훨씬 신경 쓴 은정이었다.
“뭐… 그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용주는 차 내부를 살펴보았다.
주행거리를 보아하니 중고차인 모양이다.
“후훗, 그럼 놀이동산 주소나 알려주세요. 네비 찍고 가게.”
“주차요금은 괜찮은 거냐.”
“괜찮아요. 저 그 정도 능력은 되니까.”
“아, 그러냐.”
용주는 놀이동산의 이름과 주소를 말해주었다.
“L-월드.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가보는 것 같네요.”
주소를 입력한 은정이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즐거워 보이는 그녀였다.
“그럼 출발할게요.”
네비의 안내를 받은 은정이 페달을 밟았다.
“용주 씨는 어때요?”
“어떠냐니?”
“놀이공원 마지막으로 가본 거 언제냐구요.”
“글쎄….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렸을 때였긴 한데.”
“그래요? 누구랑 갔었어요? 친구들?”
“가족들이랑.”
“가족들이랑 놀이공원. 그거 엄청 좋은 추억이네요.”
“뭐… 그렇지.”
“용주 씨 어렸을 때도 왠지 지금이랑 똑같았을 것 같아서 웃기네요. 롤러코스터 같은 것도 무표정하게 타고 막 그랬죠? 사진 찍으면 혼자 합성한 것처럼 있고.”
“그러는 넌 고등학생 때도 그렇게 잔소리가 심했었나 보지?”
“잔소리라뇨. 전 진심으로 용주 씨 걱정돼서 한 소리였다고요.”
볼을 부풀린 은정이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저 이래 봬도 고등학생 때 인기 좀 있었다고요.”
“아, 그러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못지않게 머리도 좋았을 거고, 성격도 발랄하고, 눈으로 보이는 부분에서도 꿇릴 게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라? 용주 씨, 그러고 보니 못 보던 반지를 끼고 계시네요?”
힐끔힐끔 용주를 살피던 은정이 물었다.
“아, 이거 말이냐.”
용주의 왼손을 다시 한번 확인한 은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패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은 왼손 약지.
커플링, 혹은 결혼반지를 주로 끼는 손이었다.
“뭐예요? 그사이에 애인이라도 생긴 거예요?”
장난스럽게 묻긴 했지만, 어째선지 기분이 묘했다.
“애인?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닌데.”
“그럼요?”
“그냥 헌터가 사용하는 물건의 일종이다. 다른 의미는 없어.”
“뭐예요? 그런 거였어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놀랐잖아요. 그런 거면 다른 손가락에 끼시라고요. 사람들 오해하니까.”
“뭐… 누구 보여주려고 낀 것도 아니고, 이 손가락에 제일 잘 맞아서 말이야.”
“그러시면서 실은 뜨끔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전 여자친구 있는 남자를 꼬신 여우가 된 거고요.”
“퍽이나.”
용주의 시큰둥한 반응에 은정이 웃어 보였다.
* * *
“흐흥~ 그럼 뭐부터 타볼까요?”
안내도를 펼친 은정이 물었다.
현재 위치는 실내에 위치한 정문.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은 북적북적했고, 입장과 동시에 어딘가로 뛰어가는 학생들도 보였다.
“그런 건 끌고 온 사람이 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데.”
“끌고 왔다뇨. 누가 보면 강제로 납치해 온 줄 알겠어요.”
“뭐, 아무튼.”
“그럼 우선 실외로 나갈까요? 거기 롤러코스터니 자이로드롭이니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들이 많은 것 같은데. 아! 알라딘의 모험도 오랜만에 타보고 싶네요.”
“그래. 그럼….”
“아니. 잠깐! 그 전에!”
은정이 용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입구에서 사진 한 번 찍고 들어가요.”
스마트폰을 꺼낸 은정이 옆에 찰싹 붙었다.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은정과 달리, 용주의 표정은 영 밋밋했다.
“그럼 이제 진짜….”
“아! 잠깐잠깐!”
다급하게 외친 은정이 이번엔 용주를 어딘가로 끌고 갔다.
머리띠랑 인형 등이 진열되어 있는 매장이었다.
“온 김에 하나씩 하는 거 어때요? 저 고등학생 땐 이런 거 많이 하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은정이 사슴 머리띠 하나를 해보였다.
“그거야 고등학생 때였으니….”
말을 끝마치지 못한 용주가 반걸음 물러났다.
뾰로통해진 은정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뭐예요? 지금 저 나이 먹었다고 놀리는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뭔데요.”
“…….”
용주가 난색을 표했다.
어제부터 어쩐지 계속 말리는 느낌이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용주 씨 거 골라 줄게요. 용주 씨가 제 거 골라줘요. 뭘 골라 주든 서로 벌칙 같은 느낌으로 하고 다니는 거예요.”
“아니, 내가 왜….”
“저 놀린 벌이에요. 그렇게 할 거죠?”
쏘아붙이는 은정의 눈빛에 용주는 한숨을 삼켰다.
이거야 완전 답정너이지 않은가.
“어디 보자~. 용주 씨 건 이거!”
머리띠 하나를 고른 은정이 용주의 머리에 씌웠다.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였다.
“생각한 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데요?”
금세 기분이 풀렸는지 환하게 웃어 보인 은정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용주는 바로 그 옆에 있는 머리띠를 골랐다.
복슬복슬한 고양이 머리띠였다.
“강아지랑 고양이. 맨날 으르렁거리는 게 딱 우리 사이 같네요. 안 그래요?”
고양이 손을 흉내 낸 은정이 할퀴는 시늉을 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뭔가 오늘 하루가 배로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