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갈기갈기 찢어주마.”
지면을 디딘 서윤은 곧장 거리를 좁혔다.
서윤뿐만이 아니었다.
이안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일제히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네 사람의 검과 한 사람의 손톱.
바람을 가른 그들의 무기는 이안의 목숨을 노렸다.
그리고.
“!”
바람을 가르던 그들의 무기는 일제히 멈춰 섰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이안의 빈자리는 또 다른 이안이 차지하고 있었다.
“워워~ 다들 진정해. 나라고, 나.”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안이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와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건 용주.
용주의 손톱은 이안과 불과 몇 센티미터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서 있었다.
“이안?!”
“이거 무서운데. 다들 눈빛이 살아 있어. 이안이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하핫! 물론 나 말고!”
이안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말에 웃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혹시 속임수?! 우릴 방심시키려는 그런?!”
주원이 다시금 검을 겨눴다.
게임 같은 데서 종종 본 기억이 있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모습을 바꾸는 용의 모습을.
“하하핫! 그거 그럴듯한데. 재밌는 발상이야. 역시 우리 주원 헌터는 재밌다니까.”
이안이 어깨를 들썩였다.
“미안,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이안한테 그런 기능을 넣어뒀다면 더 재밌는 상황이 나왔을 텐데.”
“그럼… 진짜인 거예요?”
“아, 그렇다니까. 이렇게 하면 믿어주려나?”
오른손을 들어 보인 이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작은 손짓이 만든 변화는 눈치 못 채기 힘들 정도로 크고 직관적이었다.
일대에 있던 산호초와 나무들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점점 퍼져 나가는 모양새로.
“뭐… 뭐야?!”
“풍경이… 지워지고 있어.”
놀란 서윤과 예나가 이야기했다.
“너희가 보는 이 풍경, 그리고 너희가 봤던 그 풍경들. 실재하지 않는 몬스터들…. 어떤 원리로 생겨난 건지 궁금하지 않아?”
흩어진 입자들이 한순간 이안의 손으로 빨려들어 왔다.
형태 없던 입자들은 하나의 작은 큐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거야 강당에 있던 그 장치들 때문 아니에요?”
주원이 대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
“반이요?”
“그래. 너희가 본 장치는 일종의 보조 기구일 뿐이거든.”
“보조 기구?”
“내가 구현한 공간을 투영할 반사판 겸, 외부에서 제삼자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기구.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의 기능이 더 커. 그게 없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꽤 강했거든.”
“공간을 구현하다니…. 그런 게 정말 가능한 거예요?”
예나가 놀란 눈동자를 깜빡였다.
“지금 너희 눈으로 보고 있잖아. 그게 가능하다는 걸.”
이안의 손을 떠난 큐브는 만들어진 순서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사라졌던 풍경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특정 공간과 생명체들을 구현할 수 있는 스킬이라고?’
A급 헌터인 형만이 사용했던 스킬은 원소 중 하나인 불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능력이었다.
하지만 S급 헌터의 능력은 상식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정말 무서운 건 이게 그의 능력의 전부일 리 없다는 것.
‘이게 S급 헌터란 건가….’
벽이 높단 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화 된 벽은 높아도 너무 높았다.
‘잠깐만. 스킬로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것도 어쩌면 비슷한 원리일 수도 있단 건가?’
퀘스트 게이트.
그곳 역시도 현실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두 공간은 엄연히 달랐다.
시간의 흐름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고, 레벨이나 기타 능력치가 오르거나 하는 부분, 골드와 아이템이라는 부분 등등도 달랐다.
시전자가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시전자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 가정을 하게 된다면, 녀석의 힘은 S급 헌터에 필적한다는 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죽음 직전에 있는 자신을 살려낸 건 S급 의료 헌터나 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테니까.
녀석의 정체나 목적에 대해선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비밀의 방에 대해서도, 계승자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네가 말했던 대로 날 벼려내다 보면… 배신자의 왕좌에서 널 만날 때가 되면, 나도 너나 녀석이 있는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거냐?’
용주의 손톱 끝이 가슴에 닿았다.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거부권 없는 퀘스트를 극복해 내며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길의 끝에 있을 놈과 만날 때가 오면 자신은 분명 지금과는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계승자.
뭘 계승시키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이름 붙이지 않았는가.
“이번 시험, 실은 내가 낸 의견이었거든. 그래서 오랜만에 팔 걷고 힘 좀 썼지. 어땠어? 시험은 재밌었어?”
주변을 빙 둘러본 이안이 물었다.
“재밌냐고 물어도, 우린 아직 이안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것 같은데.”
붉은 눈동자의 서윤이 이야기했다.
“천만에. 너희가 입힌 피해는 이안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했어. 뿔이 부러진 게 결정타였지. 하핫! 내 말로 이런 말 하니까 되게 웃기네.”
자신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던 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E급…. 여기 이런 보석들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네. 길드도 참 딱딱하다니까. 원리 원칙만 앞세우다 보니 이런 원석들을 발굴도 못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은….”
“우리가 3차 시험을 통과한 것이오?”
“물론! 당연히 합격이지. 축하해 주려고 한발 먼저 움직인 거라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이안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축 합격’이라고 적혀 있는 두 개의 깃발이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 3차 시험을 합격한 사람은 총 몇 명일까요?”
깃발을 흔든 이안이 물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여기 있는 5명에 플러스 알파겠지, 뭐.”
서윤이 까칠하게 대답했다.
“하하. 땡! 예리한 추리였지만, 아쉽게도 오답이랍니다.”
“뭐?!”
“정답은….”
이안의 손짓과 함께 모든 풍경이 지워져 나갔다.
이질감을 느낀 용주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다이어리 역시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다섯 사람이 있는 곳은 처음 둥근 원을 그렸던 강당.
강당에 있는 사람은.
이안을 포함한 여섯 사람뿐이었다.
“다섯 명. 3차 시험의 최종 합격자는 여기 있는 다섯이 전부랍니다.”
“…….”
이안의 활기찬 목소리에 다섯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응? 반응들이 왜 그래? 하나도 안 기쁘단 반응이네.”
혼자 파티용 폭죽을 터트린 이안이 물었다.
“아니. 안 기쁜 건 아닌데요, 저희 말곤 생존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게 좀 실감이 안 나서요.”
“네가 한창 흥 낼 때 나타나서 그런 거잖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시간에 그렇게 뿅 하고 나타나서 다 망쳐놓고는, 기분을 어떻게 내란 건데.”
주원과 서윤이 각각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서윤의 눈동자는 다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하핫! 나름 엄청 고심한 서프라이즈였는데, 역효과라니. 이거 충격이네.”
이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합격자가 다섯 명뿐이란 건 사실이야. 그리고 이 다섯 명이 바로 슈퍼스타-H의 최종 합격자! 당분간 호흡을 맞출 팀이지.”
“!”
이안의 한마디에 또 한 번 시선이 오갔다.
“3차 시험이 최종이라고?”
“빙고.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되어 있었어. 몇 명이 남든, 몇 팀이 나오든 이걸로 마지막! 그런 느낌이었는데… 딱 한 팀밖에 안 남았네. 출제자 겸 감독관 입장으로 아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용주의 물음에 답한 이안은 소매에서 꺼낸 폭죽 하나를 더 터트렸다.
머리 위로 떨어진 색종이를 집은 용주는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뭔가 의도치 않게 분위기를 망친 것 같은데, 그럼 이거면 어떨까?”
“이거라뇨?”
주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내가 지금까지의 시험을 보면서 쭉 생각하고 막 결정한 건데, 팀 H가 D급 임무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그건 어떤 의미야? 이제 와서 딴소리하면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서윤이 날 선 눈빛을 보냈다.
“에이 분위기를 띄우려는데 설마 그러려고. 팀 H의 이름으로 수주받을 게이트는 C급 게이트. 어때? 이 정도면 분위기가 좀 살아나려나?”
“C급 게이트라고요?”
예나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그래. 너희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맞아. 내가 보장할게.”
이안의 난이도를 몰래 더 올린 건 기획하고, 담당했던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
적당히 위험해지면, 난이도를 원래 수준으로 낮출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 모인 멤버들은 보란 듯이 이안을 쓰러뜨려 보였다.
시험 삼아 올려본 이안의 강함은 대략 B급 게이트 보스에 필적하는 수준.
이안이 생각하기에 여기 있는 다섯 모두 D급 정도에 있을 인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시험 내내 유독 눈이 가던 사람이 있었다.
이용주.
좀비 헌터라고 불리는 저 사내가 보인 힘과 순간순간의 판단력.
S급 헌터인 자신도 처음 보는 다양한 능력들과 변수를 만드는 그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
티르의 손의 계측만으론 판별할 수 없는 강함이 그에겐 있었다.
“C급이라니…. 정말 괜찮을까요?”
예나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D급 게이트라면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C급이라고 하니 뭔가 불안감이 앞섰다.
“그럼, 자신감을 가지라고. 길드에서도 지금 내 말을 듣고 있을 거야. 난리난리 치고 있을 누구 얼굴도 보이….”
“잠깐!”
“어이쿠! 이 정도면 호랑이도 한 수 접어야겠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시험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형만이었다.
“아무리 독단적인 성격이라지만,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군.”
형만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이 시험의 목적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럼. D급 게이트에 대한 불안감 해소와 헌터들의 복귀. 이거잖아.”
“알면서도 그러겠단 거냐?”
“음… 그렇지만 역시 D급은 아닌걸. 봐서 알잖아? 아마 같은 생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원칙은 원칙이다.”
“딱딱하게 굴긴. 하긴, 그래야 우리 형만 헌터답긴 하지.”
팔짱을 낀 이안이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 처음 계획대로 팀 H가 D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걸로.”
“…….”
형만이 오른쪽 입술을 실룩였다.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 녀석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거다.
“물론, 그 팀 H는 이 팀 H면서 동시에 아니야. 실제 게이트를 정리하는 건 팀의 여섯 번째 멤버인 바로 나. 내가 클리어하고 처리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잖아. 뒷일은 잘 부탁할게.”
이안이 히죽 웃어 보였다.
“…억지 부리기로 이미 결정했나 보군.”
“그럼. 역시 날 잘 안다니까.”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쉰 형만은 뒤로 돌아섰다.
“전보다는 좀 쓸 만해진 것 같더군, 애송이.”
“…….”
스쳐 지나가는 형만의 나지막한 한마디.
용주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형만은 그대로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자! 그럼 내가 그러기로 했으니, 그러기로 된 거야. 이걸로 정식으로 C급 임무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아! 물론, 당분간은 팀 단위의 임무만 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야.”
“팀 단위의 임무만? 잠깐만! 그런 말이 있었던가?”
서윤이 물었다.
“그럼 있었다고. 메시지에 그렇게 갔었잖아. ‘팀 H’로 분류되고 D급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다고. 아! 이제 C급이구나.”
“…….”
“뭐, 걱정하지 마. 처음에만 그렇단 거지, 끝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C급으로 바뀌었어도 아마 비슷한 흐름대로 갈 거야.”
이안이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튼 다시 한번 합격을 축하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수험생들을 보는 것 같아 좋네.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안 살아난 것 같지만 말이야.”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합격 선물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옆방에 작은 파티를 마련해 뒀어. 바이탈 체크 끝나면 맘껏 양껏 즐기다 가길 바라. C급 게이트에서의 활약, 기대하고 있을게.”
용주를 바라본 이안이 악수를 청했다.
그를 노려보던 용주는 시선을 피했다.
악수는 끝끝내 이뤄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