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내가 알아낸 정보는 대충 이 정도야. 아! 귀를 찢는 굉음을 한 번 내지르긴 했는데, 원인은 잘 모르겠어. 나랑 일대일로 싸울 땐 한 번도 그러지 않았었거든.”
마지막에 얻었던 한 조각의 퍼즐까지 내려놓은 서윤에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운 정보 수집력인데, 아가씨? 다시 봤다고. 밤샘 피로가 싹 달아나는 느낌이야.”
가볍게 손뼉을 부딪친 조커가 이야기했다.
“아니, 뭐 이 정도는….”
“굉장해요! 진짜 끝내준다니까요?! 저였으면, 봤어도 제대로 설명 못 했을 거예요!”
해맑게 웃어 보인 주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거 자랑은 아니지 않을까, 오빠?”
당당한 주원의 태도에 예나가 핀잔을 놓았다.
“에에, 왜? 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그래서 더 문제인 거라고, 이 오빠야. 왜 그렇게 당당한 건데! 조금 정도는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좀 그래라!”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 금화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래도 정보의 질과 양에 있어선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네. 서윤 양이 해주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가 겪었을 위험이었으니까.”
“다… 당연하지! 내가 언제 자부심 없이 이야기했다고! 어떻게 얻은 정보인데!”
팔짱을 낀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가지고 있던 카드는 전부 보였는데.”
“예열이 끝나 공격이 강화되면, 지형을 옮겨 예열을 초기화한다. 기본적인 전투 방법은 일단 그런 식으로 짜봐야겠지.”
용주가 대답했다.
“일차적으로 노리는 곳은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뿔. 예열 결과가 확인되지 않은 산호초 지대는 되도록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용주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하나 더. 아까 서윤이 말했던 굉음은 아마 이번 전투에선 마주치지 않을 거다.”
“흐흠, 근거는?”
조커가 물었다.
“내가 그걸 마주한 건 총 두 번. 두 번 모두 공중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아마 공중을 나는 무언가를 무력화하는 기술이라고 추측된다.”
검지에 이어 중지까지 펼친 용주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런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남은 건 적절한 지형으로 녀석을 유인하는 것뿐이구만. 되도록 산호초 지대가 인접하지 않은 곳으로.”
금화가 어깨 근육을 풀었다.
“그런 곳이라면 내가 알아. 내가 녀석과 마주친 곳이 딱 그런 곳이었으니까.”
서윤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근데 뭔가 엄청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네요. 번개에 불에 기타 등등까지. 대체 어떤 개체가 모티브가 된 걸까요?”
주원이 물었다.
그렇게 다양하고 굉장한 능력을 가진 언노운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여러 종류의 특징을 동시에 투영해 놓은 거겠지. 시험의 최종 보스답게.”
용주가 대답했다.
“어쩌면 C급 언노운을 전제로 설계한 개체일 수도 있다. D급 게이트라면 충분히 만날 수 있는 녀석이니까.”
“음… 그것도 그렇네요.”
“적이 C급이 아니라 B급이라도 떨어져 줄 생각 없잖아. 안 그래, 소년?”
용주에게 다가간 조커가 어깨동무했다.
“당연하지.”
용주는 그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 * *
“아, 뭔가 긴장되네.”
주원이 심호흡을 했다.
숲에 둘러싸인 평야엔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빠, 또 막 그렇게 소리 지르고 하면 안 돼. 우리 역할은 기습이란 거 잊지 말라고.”
예나가 우려의 목소리를 담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평야와 인접한 숲속.
평야에 있는 건 서윤과 용주 두 사람뿐이었다.
조커와 금화는 반대편 숲속에 매복해 있기로 했다.
“에이,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설마 그러려고.”
“제발 그러길 바라. 오빨 오빠로 봐서 하는 소리니까.”
예나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
두 사람이 변화를 인지한 건 그와 동시였다.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쉬이이익!
바람에 따라 숲이 흔들리고, 풀들이 눕고, 나뭇잎이 흩날렸다.
이윽고 떨어지는 검은 형체.
소리 하나 없이 내려앉은 이안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는 게 영 기분 나쁘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보지?”
서윤이 불쾌함을 표했다.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선공권을 가져간 서윤은 곧장 공격에 들어갔다.
가로로 휘두른 놈의 발톱에 올라탄 서윤은 그대로 팔을 타고 올랐다.
쿠구구궁!!
왼쪽 어깨를 땅에 붙인 이안은 그대로 지면을 갈아엎었고, 위협을 감지한 서윤은 충돌 직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우측으로 파고든 용주는 이안의 옆구리를 노렸다.
쿵!
순간적으로 날개를 펼친 이안은 지면을 차며 날아올랐고, 엄청난 힘과 속도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놈의 발톱과 발톱 사이 공간으로 몸을 던지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용주는 네 발로 땅을 긁으며 멈춰 섰다.
“…….”
서윤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용주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어졌다.
좌우에서 동시에 이어지는 두 사람의 합격.
우측 앞발과 꼬리를 이용해 전혀 다른 두 방향을 공격한 이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노리고 있는 건 공중으로 퍼 올린 용주.
“위험…!”
시야 끝에 걸친 풍경에 서윤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
거꾸로 뒤집힌 풍경을 보고 있던 용주는 왼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용주의 손엔 지난번에 착용했던 ‘공간 균열의 반지’가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쉬익!
놈의 이빨에 찢기기 직전 점멸을 사용한 용주는 검을 휘둘렀다.
일순간 변화한 풍경 속엔 이안의 뿔이 있었다.
“크앙!”
뿔에 생채기가 난 이안은 그대로 용주를 들이받았다.
반동에 날아간 용주의 모습은 수풀 너머로 사라졌고, 그대로 도약한 이안은 숲을 갈아엎었다.
일직선상의 숲을 초토화한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쑥대밭이 된 지면엔 산산이 부서진 붉은 결정이 떨어져 있었다.
부러진 손톱을 털어낸 용주는 다시 한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때.
챙!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 한 자루의 검이 이안의 왼쪽 눈동자에 수직으로 꽂혔다.
단단한 표층에 막혀 꿰뚫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안을 움찔하게 만드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 차례가 먼저네. 가자, 버티!”
하늘 높이 던져진 하나의 곰 인형.
순식간에 크기를 키운 버티는 이안의 등짝에 떨어졌다.
날카로운 손톱을 번뜩인 버티는 비늘을 찢고 살을 도륙했고, 고통에 발버둥 치던 이안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월영식 – 적(赤).”
선명한 붉은 선이 하늘을 수놓은 건 그와 거의 동시.
버티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 이안의 날개가 가로로 길게 찢겨 나갔다.
뒤집힌 채 추락하는 이안.
허공을 가로지를 예나의 검은 이안의 뿔을 돌려 깎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주원은 추락한 이안의 뿔을 길게 베어 냈다.
“누워서 재롱이라도 부리는 거야?! 귀엽네!”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든 서윤은 왼쪽 뒷다리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서윤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받았던 건 돌려줘야겠지?!”
톱질을 시작한 서윤의 얼굴로 피와 비늘이 튀었다.
비늘에 찢긴 상처에서 흐른 피를 핥는 서윤의 표정은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지지직!
세 사람과 함께 거칠게 이안을 몰아치던 용주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상처 난 뿔 사이에선 스파크가 튀었고, 이내 한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생각한 것보다 빠른데….’
어림짐작이긴 하지만, 서윤이 말해줬던 예열 예상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 시간이었다.
‘뿔에 타격을 입으면, 예열 시간이 더 단축되거나 하는 건가?’
“자리를 옮긴다! 뛰어!”
전조를 감지한 용주가 외쳤다.
“어… 그러니까 황야 지대가 어디더라?!”
“저쪽이라고, 바보 오빠야! 모르면 그냥 따라오기만 해!”
버티에 올라탄 예나가 소리쳤다.
“너무 빠른 것 같은데? 내가 전에 싸웠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용주에게 바짝 붙은 서윤이 이야기했다.
“뿔에 타격이 가해지면 더 빨리 예열되는 그런 거겠지. 저번엔 뿔을 긁지 못했잖아.”
“그렇긴 한데, 그럼 곤란한 거 아니야? 저 뿔 완전히 잘라 내려면 고생 꽤나 할 것 같은데.”
서윤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안에게 깔리기 직전인 주원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월영식’이랬던가? 아까 저 녀석이 쓴 스킬 위력이 엄청나던데, 그거 맞추면 한 번에 잘라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위력적인 기술인 건 맞지만, 본인도 컨트롤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것 같더군. 말처럼 쉽진 않을 거다.”
“그럼….”
“걱정하지 마라. 이쪽에도 아직 숨겨둔 카드들이 있으니.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서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그건 윤현도 한 번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 말과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윤현이 자신에게 많은 걸 요구했던 것과 달리, 용주는 그걸 자신이 감당하고 있었다.
* * *
“우왁! 우와악!!”
평야를 가로지른 주원은 비탈길을 굴러떨어졌다.
지면에 생긴 붉은 원을 따라선 붉은 번개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네. 바싹 통구이가 될 뻔했다고, 오빠.”
떨어지는 주원을 받아낸 예나가 웃어 보였다.
물론, 주원을 받아낸 건 예나가 아닌 버티 쪽이었다.
“그럼 이걸로 예열 초기화. 제로부터 다시 시작이네.”
서윤이 뺨을 닦아냈다.
뒤따라온 이안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린 용주는 두 지형의 경계면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의 시야 사각.
금화를 발판삼아 뛰어오른 조커는 지팡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지팡이에서 피어오른 수십 개의 풍선.
공중을 걷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조커는 짧은 쇼를 끝마쳤다.
빠악!!
둥글게 퍼져 나가는 충격과 바람.
조커의 일격에 가격당한 이안의 뿔에 심하게 금이 갔다.
크게 비틀거린 이안은 조커를 후려갈겼고, 발바닥에 정면으로 가격당한 조커는 그대로 지면에 내다 꽂혔다.
“조커 형! 괜찮아요?!”
놀란 주원이 외쳤다.
“아아, 멀쩡해. 이것도 다 쇼의 일부였다고. 놀랐지?”
충격에 생겨난 크레이터에서 일어난 조커가 고개를 까딱였다.
‘힘 조절을 조금 잘못했나?’
이안을 올려다본 조커가 지팡이를 돌렸다.
‘퇴장하기 전에 아예 부러뜨려 놓을 생각이었는데, 꽤 튼튼하네. D급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년의 말이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인데? C급… 아니, B급 정도인가.’
이안이라는 저 몬스터.
확실히 다른 개체들과는 설계부터가 달랐다.
“크앙! 크아앙!!”
심대한 타격을 입은 이안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붉게 물든 이안의 비늘은 예열 단계가 전부 스킵되었단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거 안 좋은데?”
“숲으로 돌아간다! 뛰어!”
달리는 와중에도 용주의 시선은 이안을 향해 있었다.
붉은 화염을 떨어뜨린 이안은 비탈길을 겨누고 있었다.
‘그렇겐 안 되지.’
45골드를 추가로 지불한 용주는 황금률의 효과를 사용했다.
꽃잎처럼 그려지는 세 겹의 황금 방패.
불길에 직격당한 방패는 하나하나 부서져 나갔다.
‘이걸로 다시 초기화. 다음번에 큰 거 한 방이면 부러뜨릴 수도….’
숲 지대로 돌아온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창공을 가른 이안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지…?’
이안의 모습에 불길함이 스쳤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검게 돌아와 있어야 할 이안의 모습이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거… 뭔가 이상한데?”
서윤의 외침과 동시에 한 구의 화염탄이 작렬했다.
한데 모여 있던 헌터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어째서?’
땅을 구른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설마 두 개 지대만으론 연속해서 초기화되지 않는 건가?’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