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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104화 (104/357)

104화

* * *

절벽을 가득 수놓은 넝쿨들.

거기 의지해 고도를 높였던 용주는 단번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절벽에 들이받은 신드라의 머리는 바로 발아래에 있었다.

보글!

그런 용주를 감싸는 물방울의 군무.

강렬한 폭발에 휘말린 용주는 또 한 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물가가 아닌 곳에서 싸우는데도 이 정도인가?’

두 번의 물수제비 끝이 멈춰선 용주가 곧바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단독 개체의 강함을 비교하긴 애매하지만, 개인적으로 칸보단 이쪽이 상대하기 더 까다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녀석의 색이 많이 옅어졌어. 지쳤다는 소리야.’

물과 관련된 공격을 쏟아낼수록 놈의 푸른빛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흡수할 물이 없는 지형에서 놈이 힘을 보충할 수단은 없었다.

바로 그때.

위쪽에서 무언가가 신드라의 날개 위로 떨어졌다.

가죽을 보호하던 수막을 단숨에 찢은 칼날은 날개에 선명한 세로 선을 그었다.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네. 좀 거들어줄까?”

서윤이 히죽 웃어 보였다.

“좋을 대로. 어차피 이형 결정체 같은 걸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 말은 이형 결정체가 걸려 있으면 못 끼어들게 할 거라는 소리?”

“글쎄…. 어떨까나?”

“흥! 이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아무한테나 그런 기회를 주는 게 아니니까.”

입술을 핥은 서윤이 왼손을 눈에 가져갔다.

“블러디 아이.”

잔잔하게 퍼져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

푸른빛을 띠던 서윤의 눈동자는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푸우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신드라는 물대포를 쏟아냈다.

분수처럼 퍼진 물방울이 땅을 적셨고, 물에 닿은 신드라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갔다.

이전에 용주가 상대했던 카멜레온형 몬스터와도 비슷한 감이 있었지만, 투명해지는 원리 자체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내가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지?”

빗방울을 뚫고 달린 서윤이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서윤의 검을 따라 물과 피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피를 흘린 이상. 내 눈을 피할 순 없어.”

옆구리에 기다란 상처를 입은 신드라는 다시금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왜? 놀랐어? 이제 부탁할 마음이 좀 생겨?”

용주와 나란히 선 서윤이 입꼬리를 올렸다.

놀라거나 당황한 눈동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확실히 자신을 봤었다.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되는 거냐?”

용주가 눈치를 주었다.

“저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

회색빛이 된 신드라는 낮게 날아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빛이 남아 있는 건 가슴 위쪽뿐.

그나마 있던 범위도 실시간으로 좁아지고 있었다.

사라진다기보단 푸른빛이 머리 쪽으로 모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뭐야, 저건? 지난 전투에선 저런 동작은 없었는데?!”

“…마음 단단히 먹어라. 뭔가 오니까.”

순간, 신드라의 입에서 한 점의 물 알갱이가 떨어졌다.

지면에 떨어진 알갱이는 순식간에 지면을 뒤틀었고, 고요했던 평야엔 소용돌이가 일었다.

몰아치던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신드라가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산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지면은 소용돌이 모양 그대로 깎여 있었다.

“꾸르릉?”

주변을 둘러보던 신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없던 황금색 구체가 지면에 처박혀 있었다.

시체로 보이는 사람 옆에.

“어이. 무사하냐?”

몸을 일으킨 용주가 물었다.

황금알처럼 갈라진 구체안에는 서윤이 들어 있었다.

흠뻑 젖은 용주와 달리, 서윤은 거의 젖지 않은 상태였다.

“그…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놀란 서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용돌이가 발목을 치기 시작했을 때 높은 곳으로 대피하기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었다.

딱히 다른 방법을 찾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몸으로 다 버틸 수밖에 없다고 각오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

허공에 선 같은 게 생기더니 무언가가 채워졌고,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벽을 두드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바로 중심이 무너졌고, 위아래가 뒤집히고 또 뒤집혔다.

“괜찮은 거야? 어디 대친 데는? 물 먹은 건 괜찮아?!”

자신을 감쌌던 게 용주가 했던 것임은 확실했다.

어떤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용주의 몸 상태.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일어난 것이 심상치 않은 것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구체 안쪽에서 들었던 소리는 마치 성난 바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아래로,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절망적인 느낌이었다.

“뭐… 그럭저럭.”

용주가 앞머리를 대충 쓸어 올렸다.

‘황금률’로 서윤을 격리함과 동시에 물살은 급속도로 빨라졌다.

용주는 그 속에서 두 가지 스킬을 사용했다.

하나는 사후강직.

다른 하나는 무호흡이었다.

덕분에 외부와 내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뭐? 그게 끝?!”

“…….”

서윤을 놔둔 용주는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신드라가 약해진 지금이 끝을 볼 타이밍.

녀석이 도주하기라도 하면 전투가 늘어져 버린다.

* * *

“꾸릉~ 푸우우!”

마지막 숨을 내쉰 신드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붉은색을 띠던 서윤의 눈엔 다시금 푸른빛이 감돌았다.

“드디어 끝났네. 어떤 놈이 모티브가 됐는진 몰라도, 카오스 게이트에선 절대 만나기 싫은 타입인데.”

검을 집어넣은 서윤이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난리를 치는 놈을 좁고 밀폐된 곳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벌써 뒷골이 뻐근했다.

“상처는 좀 어때? 마지막에 그거, 제대로 긁힌 것 같던데.”

용주에게 다가간 서윤이 물었다.

용주의 몸 곳곳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팔목에 생긴 상처가 가장 최근에 생긴 상처였다.

“문제없다. 전투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야.”

“그런 상처로 잘도 그런 말 하네. 손 이리 줘봐.”

서윤이 용주의 팔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상처가 찌릿했었는지, 용주의 미간이 순간 꿈틀거렸었다.

“문제없다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해주겠다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돼!”

옷의 소매 부분을 부욱 찢어낸 서윤이 용주의 상처를 꾹 눌렀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 그리고 더럽다고 하면 용서 안 할 거야. 한 대 패버릴 거라고.”

서윤이 먼저 선수를 쳤다.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윤현, 그 녀석은 어떻게 됐지?”

침묵을 깬 용주가 물었다.

“재수가 옴 붙었는지 이상한 데 떨어졌더라고. 밖에서 데려갔어.”

“…그러냐.”

용주가 눈동자를 굴렸다.

“신경 쓰이지?”

서윤이 물었다.

“별로.”

“거짓말이네.”

“무슨 근거로.”

“그냥 감. 그게 근거.”

“그런 건 보통 근거라고 안 하지 않나?”

“흥! 남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서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뭔가 나쁜 일을 시킨 느낌이네.”

윤현의 얼굴은 용주가 시원하게 패줬다.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주고 싶던 것도 건네줬다.

속이 뻥 뚫리도록 시원하긴 했다.

시원하긴 한데, 동시에 뭔가 미안하기도 했다.

윤현이 아닌 용주에게 말이다.

왠지 나쁜 것만 다 떠넘긴 것 같아서.

“녀석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이거… 비즈니스였잖아.”

“내가 움직인 건 순전히 내 판단에 의해서였다. 거기에 무슨 결과가 따라오든 그건 내가 책임질 일이지.”

“…….”

고개를 숙인 서윤이 매듭을 지었다.

왠지.

얼굴을 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짓고 있을 표정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 *

“이게 다 무슨 난리래?”

약속했던 장소에 도착한 예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용주 오빠가 괜찮을 거라고 해서 믿어주긴 했는데,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평야는 모 만화의 팽이경기장이 떠오르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전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치열했던 모양이다.

“예나야, 저기 봐봐. 저기!”

함께 온 주원이 소용돌이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그곳엔 하얀 용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용주와 서윤이 함께 있었다.

“용주 형!!”

경사면을 타고 내려온 주원이 손을 흔들었다.

깜짝 놀란 서윤은 서둘러 용주에게서 멀어졌다.

“괜찮아요? 아, 완전 난리잖아요! 팔도, 다리도 상처투성이…!”

주원이 안타까움을 표했다.

“예나한테 이야기는 대강 들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한테도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미안하겐 생각하고 있다.”

“근데, 오빠. 윤현 그 오빠는 어디 갔어? 한 대 얻어터지고 어디 딴 데로 가 버린 거야?”

예나가 물었다.

서윤은 용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못된 가면을 쓰고 있던 왕자님은 천벌을 받고 말았답니다.”

예나의 물음에 답한 이는 용주가 아니었다.

“지금쯤 아름다운 천사들과 함께 있을 테니, 해피엔딩이죠. 궁금증은 해결이 됐나요, 곰 아가씨?”

똑같은 곳을 향한 네 사람의 시야엔 조커가 있었다.

“윤현 오빠가 천사들이랑 같이 있다니? 탈락했다는 이야기?”

예나가 물었다.

“네. 각본보다 조금 더 비극적으로 끝났죠. 하지만 결과는 같다고 봅니다. 과정의 차이가 조금 있었을 뿐.”

“결과는 같았다고?”

“네. 제가 카드 점을 좀 볼 줄 알거든요.”

손가락을 접은 조커가 카드를 한 장 꺼내 보였다.

하트 Q 카드였다.

“그 소년은 어차피 탈락할 운명, 지금 이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해도, 머지않아 분명 탈락했을 겁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인 조커가 카드를 감추었다.

“조커 형! 형까지 절 속이고! 어떻게 저한테 그럴 수 있어요!”

주원이 불만을 토로했다.

“후후, 원래 그런 건 속는 사람이 잘못한 거라고, 소년?”

“에에? 그런 게 어딨어요!”

“속이는 게 본업인 사람한테 따져봤자 영양가 없다고, 소년.”

조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다들 적성을 잘못 찾은 것 아니오이까. 정말 요만큼의 의심도 못 했다오.”

함께 온 금화가 어깨를 들썩였다.

대사며 말투, 표정까지 워낙 리얼했기에 사실을 듣기 전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실체가 되는 모티브가 있으면 원래 더 리얼한 법이죠. 조금이라도 닮은 배역이 상대라면 더 리얼해지고요.”

조커가 용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렇소이까.”

고개를 끄덕인 금화가 잠시 투구를 벗었다.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왔구려.”

조건인 세 마리는 전부 처리했다.

남은 건 이제 최종 보스인 이안뿐.

“앞으로의 일정을 어떻게 잡든 일단 오늘은 그만 쉬는 게 어떻겠소이까? 남은 해는 이제 얼마 되지 않을 거라오.”

“아!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두우면 유리할 것도 별로 없잖아요.”

주원이 공감을 표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전 찬성입니다.”

“음… 그래요. 꼭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조커와 예나.

두 사람을 지난 금화의 시선이 용주에게 향했다.

용주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결정 났구려. 그럼 아까 황금 새를 두었던 거기로 다시 가는 게 좋겠소. 거기라면 위험이 있다 해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오.”

금화가 앞장서자 조커와 예나가 그 뒤를 따랐다.

주원을 먼저 보낸 용주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계속 거기 있을 거냐?”

뒤를 돌아본 용주가 물었다.

서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 응. 난 거기 일원도 아니니까. 우리 비즈니스 관계도 끝나기도 했고.”

서윤이라고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명백한 외부인.

그래. 용주의 말을 빌리자면 명분이 없었다.

“그러냐. 좋을 대로 해라.”

용주가 다시 뒤로 돌아섰다.

“이건 고맙게 받았다. 나중에 안 돌려줘도 상관없겠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용주가 이야기했다.

용주의 팔에는 서윤이 묶어준 매듭이 그대로 묶여 있었다.

“자… 잠깐! 잠깐만!”

용주가 두어 걸음 멀어졌을 때쯤 서윤이 외쳤다.

“생각해 보니, 역시 조금 더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그것도 돌려받아야 하고, 또… 어… 아, 아무튼!”

손가락을 톡톡 부딪치던 서윤이 버럭 외쳤다.

“그러냐? 뭐 좋을 대로 해라.”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 용주는 가던 걸음을 옮겼다.

용주가 서너 걸음 정도의 차이를 둔 서윤은 손목을 감싸 쥐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마구잡이로 찢은 천 쪼가리를 돌려받겠다니.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그런 억지를 부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무심한 듯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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