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뭐…?”
서윤이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내가 필요하다니…. 미… 미쳤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대사가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말 그대로의 의미다. 네가 가진 정보가 나한텐 필요하거든.”
용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서윤이 어떻게 해석했을지는 몰라도, 방금 했던 그 말엔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는 없었다.
“뭐? 정보?”
“그래. 네가 만났던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 이곳의 지리와 지형에 대한 정보, 그리고….”
용주가 한 호흡을 삼켰다.
“저 위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한 정보.”
“…….”
서윤의 어깨에 또 한 번 통증이 스쳤다.
윤현.
그때 녀석의 표정이 다시금 보이는 것 같았다.
“하! 웃기지 마.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일종의 비즈니스지. 이미 경험한 위험을 답습하는 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니까.”
“비즈니스? 너한테만 일방적으로 좋은 걸 넌 비즈니스라고 부르나 보지? 하! 바보 아니야?”
“일방적?”
“그래. 나한텐 아무것도 없잖아.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뭐 하러 여기 왔는지도 몰라. 내가 아는 거라곤 네가 윤현 그 자식이랑 아는 사이란 것뿐이라고.”
서윤이 폭발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그런 내가 왜 너랑 비즈니스를 해야 해?! 웃기지 말라고!”
상당한 감정이 실린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던 용주는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윤현…. 널 배신한 건 녀석인 모양이지?”
“뭐?! 그걸 어떻게….”
서윤이 말을 더듬었다.
“확신은 없었다. 그냥 몇 가지 단서들로 미루어 짐작해본 것뿐.”
“단서라고?”
“그래. 넌 방금 윤현을 그 자식이라고 불렀지. 그건 아마 녀석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트러블이 있었다는 증거겠지. 네가 날 경계한 것도 그 연장선일 거고.”
“…겨우 그런 걸로 그렇게 생각했단 거야? 겨우 말 한마디로?”
“아니, 난 처음부터 네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눈이 전에 봤을 때랑은 느낌이 달랐으니까.”
“눈이라고?”
서윤이 자신의 눈 밑을 짚었다.
“우… 웃기지 마! 겨우 스치듯이 한 번 본 걸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알 수 있다. 그런 눈을 한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적 있는 거야? 예를 들면 믿었던 사람에게라든가.”
간신히 입을 뗀 서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떨렸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용주가 대답을 대충 얼버무렸다.
“알아야 대처할 수 있는 건 몬스터뿐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 너처럼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알고 대처하는 게 모르고 대처하는 것보단 낫겠지.”
용주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다지 길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람….”
혼잣말을 중얼거린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흥! 말은 잘하네.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너였으면 분명 형편없이 당해서 지금쯤 탈락했을걸? 다른 녀석들처럼 이용이나 당하다가 말이야.”
“뭐, 그러냐.”
“그래! 그렇다고! 100%! 아니 200%야!”
“뭐, 네 말대로 난 그 일을 직접 경험해 보진 못했지. 그렇다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
“만약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만에 하나 네 가정이 맞았다고 한다면… 그건 윤현의 뜻대로 판이 더 흘러간다는 뜻이겠지. 넌 그러길 바라나 보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용주가 물었다.
“아니. 절대로 싫어. 자상한 척, 리더인 척, 현명한 척, 완전 최악이라고.”
서윤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이쪽에 협력하는 게 너한테도 남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
잠시 망설이던 서윤의 검이 점점 아래를 향했다.
바위 결을 따라 미끄러진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알았어. 내가 졌어. 항복이라고.”
검을 내려놓은 서윤이 손바닥을 보였다.
“너 이름이 뭐더라? 아까 들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이용주.”
“그래. 이용주. 그런 이름이었지. 실력은 몰라도 말 하난 기가 막히게 잘하네. 생긴 건 무슨 동네 양아치처럼 생겨서.”
“그거 미안하게 됐군.”
“뭐, 됐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너, 윤현이랑은 무슨 관계냐?”
“오늘 처음 이야기 나눠 본 사이지. 너랑 내 관계처럼.”
“그래? 그런 것치고는 엄청 자연스럽게 섞여들던데.”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 하나 섞여 있어서 말이야. 불가항력이었지.”
“흐음.”
서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근데 내가 협력해주면, 윤현 그 자식한테 한 방 먹여줄 자신은 있는 거야?”
“예를 들면?”
“면상을 후려갈기는 거지. 주먹으로다가.”
“간단명료하고 직설적인 방법이구만.”
“흥! 원래 그런 방법이 제일 통쾌한 법이라고. 아무튼 자신 있는 거지?”
“명분이 생기면, 못할 것도 없지. 뭐 그런 식이라곤 장담 못 하지만 말이야.”
윤현과 아직까지 접촉한 적은 없지만, 윤현이 살아 있다면 녀석은 높은 확률로 자신들에게 접근해 올 것이다.
리더를 자처해서 팀을 꾸렸던 녀석이 꼬리 내리고 어디 짱박혀 있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전철을 밟을 생각은 없었다.
녀석이 자신들을 이용해 먹겠다면, 이쪽도 그에 맞게 움직여 줘야겠지.
“명분이라, 애매하게 이야기하네. 날 가지고 놀았다고!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그건 네가 팰 이유. 내가 녀석을 팰 이유론 부족해.”
“뭐야, 그게? 아까랑 뭔가 말이 다르지 않아?
“어디가 말이지?”
“아니, 정확히 어디라고 콕 집어내긴 애매하긴 한데….”
서윤이 끝을 얼버무렸다.
말만 하면 다 해줄 것처럼 그러더니만, 막상 뚜껑에 손을 얹으니 영 미적지근하지 않은가.
“음…. 그럼 그 명분은 어떻게 만들 건데? 이래서야 비즈니스가 안 되잖아.”
“그거야 너한테 달린 일이지.”
“뭐야, 그게. 내 쪽이 완전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
“그래서 안 할 거라고?”
용주가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에휴. 헌터 안 했으면, 딱 사기꾼이구만, 사기꾼.”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대신 꼭 생각해 내라고. 명분이란 걸.”
“노력해 보지.”
“좋아.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으려나. 그래. 네가 물어봤던 순서대로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지? 몬스터, 지형, 전투.”
“편할 대로.”
호흡을 가다듬은 서윤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결코 짧지 않았고, 그중에는 서윤의 감정이 격하게 반응하는 포인트들이 존재했다.
“여기까지면 대충 이야기는 다 한 거 같은데. 아!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 진짜.”
이야기를 끝마친 서윤이 성질을 부렸다.
“이렇게 스트레스받을 때, 달달한 디저트라도 하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케이크나, 사탕이나 마카롱이나 뭐 그런 거.”
‘사탕?’
그녀의 말에 용주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 시늉을 해보였다.
다시금 밖으로 나온 용주의 손에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사탕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뭐야? 이게? 땅콩사탕? 지금 나한테 주는 거야?”
서윤이 어이없단 듯 물었다.
용주는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 내가 달달한 거 먹고 싶댔지, 언제 이런 거 먹고 싶댔어? 무슨 아저씨도 아니고. 완전 최악.”
돌아온 반응에 용주는 다시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아니! 잠깐만! 생각이 바뀌었어.”
잔뜩 콧대를 높였던 서윤이 급하게 용주의 손을 붙잡았다.
“그거라도 먹을래. 없는 것보단 낫겠지.”
고개를 돌린 서윤이 소심하게 사탕을 까먹었다.
“흠흠! 그래서 어때? 도움이 좀 된 것 같아? 명분은?”
“그래. 덕분에 대략적인 구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윤현한테 뒤통수 맞기만 해봐. 진짜 그냥 가만 안 있을 거니까.”
“그래. 그때 가선 원하는 만큼 맞아주지. 책임지고 말이야.”
“…….”
서윤이 또 한 번 시선을 피했다.
지이잉!
바로 그때.
한 통의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낸 용주는 짧은 통화를 마쳤다.
“전화? 뭐야? 여기 전화도 되는 거였어?”
서윤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어이없게도 그렇더군.”
“그래서? 뭐래? 택배 전화 같은 건 아닐 테고.”
“윤현이 왔다는군. 나랑 함께 있던 헌터들에게.”
“…….”
서윤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돌아가야지.”
“그럼 나는?”
“여기 있어라. 금방 다시 돌아올 테니까.”
“뭐?”
“생각해 둔 무대가 있거든. 필요한 배역은 뽑고, 불필요한 배역은 퇴장시켜야지.”
뒤돌아 걷던 용주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네가 해줘야 할 배역도 있으니, 상처 덧나지 않게 잘 추스르고 있으라고.”
“뭐?!”
놀란 서윤을 놔둔 용주는 그대로 독수리에 올라탔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는 하얀 돌과 산호로 만든 글자가 보였다.
* * *
“아! 용주 형!”
둥근 원을 그리며 내려온 독수리.
용주를 반긴 주원이 손을 흔들었다.
주원의 손에는 먹다 만 사슴고기가 들려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등장하실 줄은 몰랐는걸요.”
용주 앞에 선 윤현이 악수를 건넸다.
“여기서 다시 보니 정말 반갑습니다, 용주 씨.”
“그래. 혼자인가 보지?”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요.”
“같이 있던 다른 헌터분들은 전멸하셨대요. 그 신드라라는 몬스터한테.”
주원이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런가? 그거 예상외군. 네가 팀의 리더면 제법 체계적으로 통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강한 몬스터인가 보지?”
“예상하지 못한 여러 변수가 있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윤현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용주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신비한 지형을 하나 발견했다. 산호초에 감싸인 호수에 거대한 파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더군.”
“파란 꽃…. 용주 씨, 그거 설마 안개 골짜기 위에서 발견하신 겁니까?”
“아마 같은 곳을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거기도 안개가 많았으니까.”
“그 파란 꽃이 바로 신드랍니다. 날개를 접으면 그 모양으로 변하는 걸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나 보군요.”
“그런가. 녀석이….”
용주가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이야기했다.
“녀석에 대한 대략적인 건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껜 한 번 이야기드리긴 했는데, 이제부터 제가 차근차근….”
“아니, 정보는 내가 보고 내가 판단할 거다. 그러기 위해 돌아온 거고.”
“어째서죠?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제가 말씀드리는 편이….”
“네 합리성이 이미 실패했으니까. 이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
용주의 말에 윤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뇨. 맞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하셔도 할 말 없죠.”
마른침을 삼킨 윤현이 한발 물러났다.
분하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거기 둘. 올라타라.”
“응? 나?”
예나가 자신을 가리켰다.
용주는 정확히 자신과 조커를 콕콕 집었었다.
“나 왜?”
“자연스러운 소거법의 결과다. 나머지는 정찰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용주의 대답에 주원이 번쩍 손을 들었다.
“윤현 씨는 부상과 컨디션 회복! 금화형은 소리 나는 갑옷 때문! 전 아무 문제 없는데 잘못 소거된 거 같아요!”
“내 생각에는 오빠가 제일 먼저 소거됐을 거 같은데….”
나란히 선 예나가 이야기했다.
“뭐? 왜? 어째서? 말도 안 돼.”
“자업자득. 여태껏 오빠가 한 일들을 생각하라고, 이 오빠야.”
스치듯 지나간 예나가 먼저 독수리에 올라탔다.
“너무 낙담하지 마, 소년.”
조커가 주원에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맘 편히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건 그만큼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믿음직스럽다는 이야기니까.”
“조커 형…. 네! 맘 편히 다녀오세요!”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에 설득돼 버린 주원이었다.
“그래도 제 전투데이터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두 분께선 알고 계실 테니 필요한 순간이 오면 대신 말씀 좀 드려주세요.”
날갯짓을 시작한 독수리를 올려다본 윤현이 이야기했다.
비행을 시작한 독수리는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 *
“오빠, 여기 맞아? 안개 같은 건 전혀 안 보이는데. 호수나 파란 꽃도 안 보이고.”
독수리에서 내린 예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여긴 용주가 말한 곳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 왔다. 이쪽이야.”
앞장선 용주는 두 바위가 만든 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온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이는 부상을 입은 서윤이었다.
“그쪽이 네가 말한 배역들인 모양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이 물었다.
누굴 데려오나 했더니.
아무것도 안 해도 엄청 눈에 띄던 두 사람이지 않은가.
“오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예나가 물었다.
윤현의 이야기론 서윤은 탈락했다고 그랬다.
윤현만큼이나 비호감이라 크게 상관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 건 사과하지. 거기서 두 사람만 빼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정찰을 위한 게 아니었던 거네, 소년? 그럼 어디, 이야기를 들어볼까?”
조커가 물었다.
“윤현에게 이야기는 들었겠지? 신드라에 대해서, 서윤에 대해서.”
“물론, 아주 체계적이고 깔끔하게 전해 들었지.”
“녀석이 한 말에 90%는 분명 사실에 기반한 진실일 거다. 하지만 녀석의 말 중 10% 정도는 사실과 다를 수도 있지.”
“흐흠?”
“녀석이 감춘 것에 대해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비즈니스로 묶인 파트너가 대가로 바랬던 게 있어서 말이야.”
용주와 서윤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비즈니스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배역만 바뀐 똑같은 무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