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 *
“아~ 이거 완전 쫄딱 젖었네.”
간신히 찾은 동굴 안으로 들어온 주원이 물기를 대충 털어 냈다.
동굴은 입구에서부터 끝이 보일 정도로 깊지 않았다.
“그래도 비 피할 곳을 찾아서 다행이야. 버티도 비 더 안 맞아서 좋대.”
“그러게. 난 어디 큰 나무 아래에서 대충 나뭇잎 덮고 있으려고 했는데.”
“오빠, 그거 비 피하는 거 맞지?”
“아! 그럼! 그냥 있는 것보다 체온 유지도 훨씬 잘 된다고. 산에서 수련할 때 종종 쓰던 방법이야.”
“산에서 수련이라니……. 오빤 그런 것도 했었나 보네.”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굉장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 해볼 생각도, 할 필요도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하긴, 스킬 없이도 그런 걸 날려댈 수 있으려면 평범한 방법으론 어림도 없겠지.
“뭐, 그렇지. 벌레도 잡아먹고, 개구리도 뜯어 먹고, 힘들긴 했어도 나름 재미있었어.”
어깨를 들썩인 주원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저기, 예나야.”
“응? 왜?”
“혹시 추워?”
주원의 표정이 변한 이유는 예나 때문이었다.
예나의 팔과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니,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예나가 팔을 저었다.
“괜찮기는. 그러다 감기 걸린다고.”
자기 옷을 벗어주려던 주원이 순간 멈칫했다.
다 젖은 옷을 줘봤자 크게 도움이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체온을 지키려면 젖은 옷은 벗는 게 상책이긴 한데……. 이런 곳에서라면 무리겠지. 그럼 남은 방법은…….’
뒤로 돌아선 주원이 동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오, 오빠?! 어디가?!”
당황한 예나가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멀어지는 주원의 뒷모습.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주는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용주 오빠? 오빤 어디 가려고?!”
“따라간다. 나중에 미아 찾기 하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미아?”
“넌 이런 폭우 속에서 저 녀석이 제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아……. 그건…….”
“알았으면 기다리고 있어. 양말은 벗어두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한 용주는 주원을 따라갔다.
혼자 남은 예나는 버티를 꼭 끌어안았다.
“이야~ 하마터면 못 돌아올 뻔했네. 어디가 어딘지, 원.”
동굴로 돌아온 주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간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발자국이며 뭐며 빗물 때문에 다 지워진 덕분에 하마터면 완전히 길을 잃을 뻔했던 주원이었다.
용주가 뒤따라오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됐었겠지.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뭘 가져온 거야?”
예나가 물었다.
주원의 품에는 풀이랑 나뭇가지 등이 들어 있었다.
“뭐긴. 불 피울 준비물들이지.”
“불? 그렇지만 그렇게 쫄딱 젖었는데?”
주원이 가져온 것 중 비를 피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불을 피우려면 바짝 마른 부싯깃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다.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오빠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자리를 잡고 앉은 주원은 ‘보 드릴’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상대적으로 두꺼운 나무토막을 잘라 홈을 만들었고, 긴 가지는 깎아 끝을 둥글게 만들었다.
신발끈을 풀어 활대에 묶은 주원은 마지막으로 옷 속에 넣어두었던 새집을 꺼냈다.
새집은 다른 것들에 비해 거의 젖어 있지 않았다.
자세를 고쳐 잡은 주원은 열심히 활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활질은 멈추지 않고, 반복, 반복 또 반복되었다.
불씨가 만들어진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예나는 몇 번이고 주원을 말렸지만, 주원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젖은 나무에서 불씨를 만들어 냈다.
새집을 부싯깃으로 삼은 주원은 오므린 새집을 후후 불었다.
화르륵!
마침내 피어오른 붉은 불길.
나뭇가지를 국화꽃처럼 깎아낸 주원은 조심스럽게 장작을 넣었다.
물을 먹고 있어 길들이는 데 애를 먹었지만, 결과는 또 성공.
작은 모닥불을 만들어 낸 주원은 불 주변에 남은 장작들을 널어놓았다.
“후~ 됐다! 예나야 가까이 와서 앉아. 따뜻해.”
주원이 흘린 땀을 닦아냈다.
고생을 하긴 했지만, 결과가 좋으니 만족이었다.
“진짜로 만들었네.”
놀란 표정으로 다가온 예나가 쪼그리고 앉았다.
이 불…….
엄청 조그맣고 볼품없는 주제에 너무너무 따뜻했다.
“내가 알아서 한댔잖아.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응. 따뜻해.”
예나가 모닥불로 손을 뻗었다.
“그나저나 비 엄청나게 쏟아지네요. 오늘 안에는 안 그칠 셈인가 본데요.”
웃통을 벗은 주원이 모닥불에 옷을 말렸다.
예나는 조금 불편한 듯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는 걸로 하는 게 좋겠지. 땅 상태가 이래서야 더 탐사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빨리’에 초점을 둘 필요는 없으니까.”
용주가 대답했다.
“빨리에 초점? 그건 무슨 소리래요?”
“용주 오빠 말은 ‘이안’이라는 몬스터를 꼭 오늘내일 내로 처리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야. 이 시험은 딱히 시간제한이 있는 게 아니잖아. 안전이 제일이라고.”
예나의 부연 설명에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른 새벽.
그치지 않을 것만 같던 빗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용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나는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용주 형? 어디 가시게요. 더 눈 좀 붙이시지.”
보초를 서고 있던 주원이 이야기했다.
지금은 주원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바로 전까지 보초를 서고 있던 이는 용주였다.
예나를 뺀 두 사람이 몰래 결정한 사항이었다.
용주가 잠든 시간은 길어 봐야 2시간 남짓.
걱정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잠깐 화장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겠냐?”
동굴에서 빠져나온 용주는 오른쪽 벽면을 끼고 돌았다.
주원이 보초를 서고 있는 지금이라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지.
위험한 상황이 오면 예나도 전투에 합류할 테니.
‘자, 그럼…….’
용주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이걸 어떻게 쓰느냐. 그리고 어느 영역까지 구현이 가능한가. 그걸 테스트해볼 때인가.’
모래벼림 황금보검.
새롭게 얻은 이 검에는 ‘황금률’이라는 특수효과가 달려 있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골드록의 첨예검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전투 중에 효과가 발휘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효과를 발동시키려면 값을 지불해야 했고, 사용법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황금률.’
가장 먼저 스킬을 발동하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이름을 불렀다.
돌아온 건 완전한 무반응.
“황금률.”
그다음으론 입으로 직접 소리를 냈다.
결과는 이번에도 마찬가지.
검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릇……. 그릇이란 걸 연성할 수 있다고 그랬지.’
여기서 말하는 ‘그릇’이란 의미는 아마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것’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일 것이다.
‘영혼을 담는 그릇’을 육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용도와 형태, 크기 등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댔지. 그렇단 건 그런 부분까지 내가 설정해 줘야 한단 거겠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용주는 머릿속에 스케치를 그렸다.
가장 먼저 그린 건 형태.
그 뒤로 크기와 용도 등을 구체화했다.
‘황금률.’
모든 설정을 마친 용주가 다시 한번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자.
▷ 그릇을 연성하기 위해선 ‘40골드’가 필요합니다.
- 연성하시겠습니까?
하나의 메시지가 용주의 앞에 나타났다.
‘오케이. 제대로 오긴 했나 보군.’
용주의 대답은 당연히 YES.
메시지가 사라진 그곳엔 황금으로 만들어진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연성될까 했는데, 이런 식인 건가. 근데 생각보다도 더 비싼데.’
첫 연성은 성공적이었다.
연성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선 연성은 검에서 생겨나거나 자신의 손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꼭 자신과 맞닿아 있지 않은 곳에도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만들어지는 방식이었다.
테두리가 먼저 그려지고 그 속에 색이 채워지며 완성되는 모습이 마치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골드……. 그러니까 금을 매개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그릇이 충분히 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야.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하늘에서 숲 전체를 살펴보면 좋겠다는 예나의 말을 듣고 문득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황금률.’
거대한 새를 만들어 공중에서 숲을 정찰하는 것.
이번 연성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골드가 요구되었다.
소모된 골드는 200골드.
크기와 목적이 달라서 그런지, 값도 전혀 달랐다.
연성이 시작되자 허공에 테두리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건 황금으로 빚은 독수리.
용주 하나 태우기에는 전혀 부담 없는 크기의 황금 독수리였다.
“자, 그럼 어디 가보자고.”
용주가 올라타자 독수리의 두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독수리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
“허억……. 허억…….”
상처투성이의 팔과 다리.
여기저기 남은 선명한 전투의 흔적.
그 속에서 전투를 이어가던 헌터가 무릎을 꿇었다.
“젠장, 뭐야? 이거 정말 깨라고 만든 거 맞아?”
그의 눈앞에는 한 마리의 몬스터가 있었다.
같이 온 동료들을 모두 사라지게 만든 녀석은 여유롭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쌍의 뿔을 가진 검은색 용이.
‘D급 언노운이 모티브라며……!’
D급이라면 지금 모였던 이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토벌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두 마리를 쓰러뜨리기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사냥했던 녀석들과는 격 자체가 달랐다.
숲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
이곳에서 마주한 녀석은…….
“으아아악!!”
* * *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넓네.’
높은 곳으로 올라오자 시험장의 대략적인 윤곽이 보였다.
시험장은 일종의 섬처럼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섬은 절대 아니었다.
‘분명 같은 섬인데…… 구역마다 생태계가 전혀 달라.’
용주를 포함한 세 사람이 있던 지형은 울창한 밀림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환경이 이러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숲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있는가 하면, 황야도 있었고.
산호초로 이루어진 지형 또한 존재했다.
‘이것도 다 의도된 거라고 봐야겠지.’
왜? 라는 의문이 들긴 했다.
굳이 이런 지리적인 부분까지 손을 댈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정을 했다면 분명 필요와 의도가 있었을 거다.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몬스터들의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형을 만들었다.’
시험의 난이도 측면에서 보면 그런 추론도 가능했다.
같은 특징을 가진 몬스터라도 주변 지형과 환경에 따라 상대하기 까다로워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퀘스트 게이트면 또 모를까.
카오스 게이트에서 왜 이런 게 필요했는지에 대해 여전히 물음표가 찍혔다.
적어도 용주가 아는 범위 안에서의 카오스 게이트는 거의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 다양한 조건에서 실력을 테스트하겠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런 추론도 가능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험이고, 감독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편이 변별력을 높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그냥 자기가 만든 몬스터를 더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예나가 했던 추측의 연장선에 있는 가설이었다.
그리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이것 역시도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후욱!!
용주의 생각이 한참이던 그때.
거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의 정체는 날개를 가진 몬스터.
부드러운 유턴을 보인 몬스터는 위협 비행을 이어갔다.
몬스터의 날개엔 여섯 개의 공기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양쪽 날개 뒤쪽에 2개, 앞쪽에 하나씩이었다.
몬스터의 움직임에 따라 공기주머니의 크기는 계속해서 변화했다.
아마 저기 모은 공기를 추진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쉽게 당해줄 수야 없지.’
선회 비행으로 방향을 튼 용주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독수리를 연성할 때 설정한 목적은 정찰.
이런 상황을 대비해 도주에도 강점이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도주에는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