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 녀석 엄청 단단하잖아?”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끼고 돈 주원이 숲을 가로질렀다.
“다리에 상처를 내서 못 뛰게 하려고 했는데, 난감……. 으왁?!”
외마디 비명을 지른 주원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원인은 흙이 파헤쳐지며 튀어나온 나무뿌리.
황당할 정도로 허무한 이유로 넘어진 주원의 머리 위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콰앙!
숲을 때리는 거대한 소리.
쏟아지는 흙더미를 맞는 주원의 시선이 옆쪽을 향했다.
녀석의 발에 깔리기 바로 직전, 자신을 거칠게 낚아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손길의 주인은.
“용주 형!”
다름 아닌 용주였다.
“와, 완전 나이스 타이밍! 덕분에 살았다고요!”
주원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미소를 지을 여유까지 있는 걸 보니,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다.
주원을 내려놓은 용주는 녀석을 주시했다.
목을 길게 뺀 녀석은 자신을 기준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잠깐만……. 저 모습 분명 어디선가…….’
녀석의 기이한 행동 패턴에 용주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머리와 하반신이 유독 단단했던 언노운.
그러면서 땅을 내리찍어 진동을 만들고, 머리를 늘였다 줄였다 했던 언노운.
용주의 기억 속에 분명 남아 있었다.
저 녀석의 특징을 쏙 빼닮은 언노운이.
“갑자기 저 혼자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 흐읍!”
용주는 거칠게 주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터벅!
발걸음을 옮긴 몬스터는 한 걸음 한 걸음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용주가 있는 곳은 이제 녀석의 머리 바로 아래.
앞발을 움직여 지면을 크게 훑은 몬스터는 방향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빠들 괜찮아?!”
몬스터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기다린 예나가 물었다.
용주는 그제야 주원을 놓아주었다.
“아……. 응! 보다시피 멀쩡해! 완전 퍼펙트 주원이라고!”
주원이 괜찮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해 보였다.
“그래 보이네. 오빠들 가만히 있길래 난 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고.”
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주 오빠,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거야?”
“맞아! 저도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갑작스러운 일의 연속이라 엄청 놀랐다고요.”
주원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확신은 없었다. 단지 녀석의 생김새와 행동 패턴을 보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시험해 봤을 뿐.”
“시험?”
“그래. 녀석이 그랬지. 여기 있는 몬스터들은 D급 언노운들의 특징을 살려 만든 거라고.”
“음……. 그랬었지. 아! 설마?!”
예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주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응? 설마라니, 나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주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 방금 그 이야기 듣고도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응. 없는데.”
주원이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하아~ 알았어, 쉽게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용주 오빠 말은 오빠가 알고 있는 D급 개체 중에 저 녀석의 모티브가 됐던 녀석이 있었단 이야기야.”
“아~ 아!!”
주원이 그제야 손 방아를 찧었다.
“녀석은 소리에 반응한다. 시각은 존재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얼굴에 눈이 없었던 것 같네. 그런 것치곤 내 위치를 엄청 정확히 짚어내긴 하던데.”
“조용히 움직여도 들킬 판에 오빠가 그렇게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대니 그렇지.”
예나가 핀잔을 놓았다.
소리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성대 대결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머리와 하반신은 단단한 갑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옆구리와 등 쪽은 그렇지 않았다. 녀석의 생김새도 마찬가지. 상체 쪽 위주로 노렸다면, 아마 더 많은 데미지를 줄 수 있었을 거다.”
“음……. 그렇구나.”
“근데 오빠, 왜 전투를 피하는 선택을 한 거야? 공격해서 쓰러뜨린다는 선택지도 있었잖아.”
예나가 물었다.
“말했잖아. 시험해 본 거였다고.”
가지고 있던 다이어리 중 하나를 꺼낸 용주가 이야기했다.
“자, 받아.”
“응? 이게 뭔데요?”
“주원 오빠가 발견 못 하고 간 거 용주 오빠가 주운 거야. 오빤 어떻게 그것도 못 보고 갔어?”
예나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발견을 못 해? 그럼 내가 처음 있던 곳에 이게 있었단 거야?”
“응. 그렇다니까.”
“어…… 이상하네. 내 거 아닌데, 저거. 아! 혹시 날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함정 같은 건가? 어둠을 틈타 나에게 누명을……!”
“여기 범인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이 오빠야. 혼자 뭐 추리 게임 해? 다른 미션 받았어?”
예나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 전체로 보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예나의 웃음이었다.
“참가한 인원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물건이다. 자신들이 본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나타나지.”
“몬스터에 대한 정보?”
다이어리를 받아 든 주원이 안쪽을 살펴보았다.
“오~ 뭐야! 완전 잘 그렸어!”
페이지 중간엔 방금 봤던 몬스터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몬스터 ‘점프킹’.
정면은 물론이고, 측면의 보습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주원 오빠랑 합류하는 것까지도 오케이. 다음에 어떻게 할지가 문제네.”
예나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몬스터 하나를 더 발견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늘어난 정보가 없었다.
‘전체가 한 팀이면 집사……. 아니, 조커랑 합류하는 게 제일 믿음직스럽긴 한데,’
그렇게 생각했던 예나는 생각을 덮었다.
먼저 집사를 찾는다는 생각은 현명한 선택일진 몰라도, 고르고 싶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숲 전체의 모습이라도 한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제일 수상했던 그 나무쪽도 슬쩍 봐보고.”
“나무?”
주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숲 중앙에 엄청나게 큰 나무가 하나 있어. ‘이안’이라는 몬스터는 아마 거기 있지 않을까 싶어.”
“오, 그렇구나. 근데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아니면 무리지 않을까?”
“나도 알고 있다고. 그래서 말했잖아. ‘좋을 텐데’라고.”
“음~ 아! 나 갑자기 좋은 생각 났어!”
생각에 잠겼던 주원이 번뜩하며 이야기했다.
“응? 뭔데? 오빠가 그러니까 왠지 불안한데…….”
“예나 네 검은 막 하늘도 날고 할 수 있잖아?!”
“응, 그렇긴 한데.”
“그리고 버티도 네 말을 알아듣잖아? 그렇지?”
“아, 뭐 비슷하지.”
“좋아! 그럼 버티를 네 검에 태워서 올려보내는 거야! 검이랑 버티가 공중정찰을 하고 와서 여기 그림으로 그리면 오케이! 어때? 완전 괜찮지 않아?”
주원이 웃어 보였다.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그런 미소였다.
“완전 괜찮지 않거든?!!”
그리고 그런 주원의 얼굴에 예나의 침방울이 튀었다.
“아니, 왜? 완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버티를 태운다는 것 자체부터 일단 실격! 그리고 팬도 연필도 없는데 버티가 수첩에 어떻게 그려!”
“수첩이 안 되면 바닥에 그리면 되지! 나뭇가지나 돌멩이 하나만 있어도 그릴 수 있다고.”
“안 돼. 그 의견은 무조건 기각이야! 애초에 그렇게 무한정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응? 안 되는 거였어?”
“당연하잖아. 이게 무슨 근두운도 아니고.”
뾰로통한 표정이 된 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아쉽네. 완전 나이스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아쉬움을 표한 주원이 시선을 옮겼다.
용주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혹시 용주 형이라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형, 혹시 뭐 굉장한 그런 거 없어요?”
“……아쉽게도 하늘을 나는 스킬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말이지.”
용주가 검을 집어넣었다.
공중에서 정찰하자는 의견에는 용주도 찬성이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방법이라면, 예나가 보았다는 하늘을 나는 녀석으로 어떻게 해보는 건데…….’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포획에 성공한다고 해도 길들일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예나가 봤던 몬스터처럼 녀석에게 잡혀가는 쪽도 좋은 선택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거 외에 다른 방법은…….’
용주의 시선이 검으로 향했다.
가능성의 영역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한 가지가 더 있기는 했다.
아직 한 번도 시험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음~ 역시 그렇겠죠.”
아쉬움을 표한 주원의 시선이 용주의 시선을 쫓았다.
주원의 눈동자에 들어온 검은 이전에 용주가 사용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라? 그러고 보니, 용주 형! 며칠 사이에 검 새로 장만하셨네요.”
“어? 진짜네?”
예나는 그제야 변화를 인지했다.
훨씬 전부터 같이 있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용주 형의 각오인가요? 완전 잘 어울리는데요?”
주원이 따봉을 날렸다.
어쩐지 아까 들었던 고금화 헌터의 말이 떠오른 주원이었다.
“……그래, 뭐…….”
용주가 앞과 뒤를 다 얼버무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주원의 잘 어울린다는 말은 선뜻 공감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금붙이가 장식된 화려한 검은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뚝!
“응?”
세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이던 그때.
예나의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맑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비?”
예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몬스터와 주원이 한바탕 날뛰어준 덕분에 하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데요?”
손바닥을 앞으로 뻗은 주원이 이야기했다.
“일단 어디 피할 장소라도 찾아보는 게 좋으려나? 오빠들 생각은 어때?”
“음……. 난 찬성, 예나 감기 걸릴라.”
주원이 먼저 손을 들었다.
“그 이야긴 나만 아니었으면 괜찮다는 이야기?”
“아! 아니, 물론 아니지. 아하하핫!”
예나의 앙칼진 눈빛에 주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 * *
“쿠왕! 쿠와아앙!!”
울려 퍼지는 몬스터의 괴성.
불도저처럼 밀려 나가는 산호 숲은 이곳에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이봐. 적당히 했으면 그만 좀 죽으라고!”
일대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서윤이 이를 악물었다.
한쪽이 부러진 뿔에 풍성한 깃털이 달린 꼬리.
턱이 빠진 것처럼 벌어지는 입을 가진 저 생명체는 공룡의 외형을 이리저리 바꾼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기는 물론이고 힘도 괴물.
머리를 몇 번이나 베어 냈음에도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표주박처럼 머리를 둘로 갈라야 죽을 건가 보지? 그러면 뭐…….”
신경질적으로 침을 뱉은 서윤이 속도를 높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도’라기보다는 톱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지네의 다리가 연상되었다.
“죽여 주지!”
멈췄던 다리를 움직인 서윤이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광기 어린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화르르륵!!
그와 동시에 지면과 수평을 그리며 붉은 불기둥이 뻗어 나갔다.
불꽃의 진원지는 몬스터의 입.
불은 일직선상에 있던 모든 식물들을 한 줌 재로 바꿔 버리기에 충분했다.
‘불?!’
서윤의 검은자에 붉은빛이 가득했다.
온몸이 뜨겁다고,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싸우면서 단 한 번도 불을 사용한다는 단서를 준 적이 없었기에 전혀 고려를 하지 않고 있었었다.
‘방심했어…….’
탈락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있었다.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어. 버티면서 뚫고 나가서…….’
“위험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서윤의 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
자신을 덮친 누군가의 체온에 서윤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그는…….
윤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 윤현이 물었다.
“아……. 응.”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늦는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안도의 미소를 지은 윤현이 검을 뽑아 들었다.
“혹시 방해였나요?”
“아니, 천만에. 위험하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이 뺨을 닦아 냈다.
설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것도 이렇게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괜찮다면 힘을 보태고 싶은데……. 어떤가요? 허락해 주실 건가요?”
“그래. 알았어. 특별히 허락해 줄게.”
서윤이 별수 없단 듯이 이야기했다.
“후훗, 그럼 페어 성립이네요.”
윤현의 미소에 서윤이 시선을 피했다.
방금…….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