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숲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나무 외에 버섯이나, 넝쿨 식물, 각종 식용 식물과 꽃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몬스터의 흔적은 아직까진 발견하지 못한 용주였다.
‘이거, 실제로 먹을 수도 있는 건가?’
호기심이 발동한 용주는 산딸기 하나를 땄다.
미각은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맛도 느껴져.’
생각해 보면 용주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2차 시험에서 물어뜯기를 사용했을 때.
그 역한 맛이 입속으로 들어왔었으니 말이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 원…….’
부스럭…….
용주가 곧장 소리에 반응했다.
용주의 시선이 끝난 곳에는 청설모 한 마리가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뭐야, 그냥 동물인가……? 음?’
수풀을 헤친 용주는 청설모가 오른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이건…….’
수풀에 가려졌던 공간에는 무언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분명 이쪽 방향으로 왔는데…….’
수풀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던 용주는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까지 이어지던 발자국이 갑자기 뚝 끊겨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어지는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 그늘이 대부분 사라진 조그마한 평야에 보이는 거라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뿐.
‘혹시 날개라도 달린 생명체인 건가?’
자신이 쫓아온 발자국의 주인이 두 발로 걷는 생명체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발자국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대략적인 크기 정도는 추론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생김새까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고개를 든 용주는 좀 더 높고 먼 곳으로 시야를 넓혔다.
멀리 다른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정도의 크기였다.
“와아~ 버티, 저기 봐봐. 용주 오빠야~.”
하늘을 올려다보던 용주에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예나.
버티를 끌어안은 예나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행히 오빠랑은 가까운 곳에 떨어졌나 보네.”
몸을 일으킨 예나가 용주에게 다가왔다.
“너 언제부터 거기 숨어 있던 거냐?”
“음……. 막 오래되지는 않았어. 한 10분쯤 됐나?”
“10분? 그럼 혹시 여길 지나간 이상한 생명체를 봤다든가?”
“응! 나랑 버티랑 똑똑히 봤어. 그래서 여기 숨어 있었던 거라구!”
예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떻게 생긴 녀석이었냐?”
“음……. 용주 오빠가 온 곳은 분명 저쪽 방향이었지?”
예나가 용주가 있던 숲 쪽을 가리켰다.
“뭐, 그렇지.”
“그럼 오빠가 찾던 건 조그마한 쪽이네. 그쪽이라면 아르마딜로처럼 생겼었어. 엄청나게 커다란.”
“조그마한 쪽? 그럼 여기 있던 몬스터는 한 마리가 아니었단 거냐?”
“응! 처음엔 아르마딜로처럼 생긴 몬스터만 나타났었는데, 그다음에 머리 위로 엄청나게 큰 그림자가 지나가더라고, 그래서 봤더니, 그것보다 훨씬, 훨씬 큰 빨간색 용이 아르마딜로를 낚아채 가 버렸어.”
“용?”
“응. 뱀처럼 기다란 용 말고, 날개 달린 공룡 같은 용 있잖아. 그런 게 막 쌩하고 저쪽으로 날아갔어.”
“아르마딜로에 용이라…….”
용주의 시선이 버티에게서 멈췄다.
곰 인형 버티의 품엔 어디선가 본 물건이 들려 있었다.
“너 그건?”
다이어리를 가리킨 용주가 물었다.
자신이 주웠던 것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아, 시작한 곳에 같이 떨어져 있었어. 아무것도 안 적힌 백지던데.”
다이어리를 펼친 예나가 페이지를 몇 장 넘겼다.
그런데.
“어라?”
뭔가 이상했다.
페이지 중 한 장이 백지가 아니었다.
그려져 있는 건.
아까 예나가 봤던 아르마딜로를 닮은 몬스터였다.
“뭐지? 아까 봤을 땐 분명 이런 거 없었는데? 진짜야!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
당황한 예나가 소리쳤다.
이래서야 자기가 거짓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 그랬겠지.”
용주가 주머니에서 꺼낸 똑같은 다이어리를 펼쳐 보였다.
용주의 다이어리는 아직도 모두 백지 상태였다.
“어라? 오빠도 가지고 있네?”
“아마, 30명 전원에게 같은 방식으로 전달됐을 거다. 참가자에게 나눠주는 지급품 같은 거겠지.”
“지급품?”
“아마 자신들이 본 몬스터의 외형과 이름, 기본적인 특징 등이 기록되는 거겠지. 네가 본 녀석이 여기 나타난 것처럼.”
용주가 몬스터의 이름 부분을 짚었다.
아르마딜로를 닮은 몬스터의 이름은 ‘알디나브’.
예나의 말대로 아르마딜로와 유사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지만, 손톱과 갑피는 그보다 더 진화한 느낌이었다.
“음……. 왜 그런 기능을 넣어준 걸까?”
“글쎄. 아마 정보를 더 쉽게 공유하기 위함이 아닐까?”
“정보 공유?”
“그래. 기본적인 몬스터의 정보가 있으면, 대화를 주고받기도 훨씬 편할 테니까. 작전을 세우는 데도 참고할 수 있겠지.”
“그냥 자기가 기껏 만든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다른 의견을 중얼거린 예나가 흠칫 놀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외엔 소와 새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려줘?”
“아니! 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서! 왜 그런 거 있잖아. 내가 힘들게 만들었는데 다 보고 가! 스킵은 없으니까! 이런 느낌?”
버티로 얼굴을 가린 예나가 두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 보였다.
“히힛!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해줘. 그럴 리가 없지. 무슨 주원 오빠도 아니고.”
순간적으로 또 본심이 튀어나와 버린 예나가 자신의 입을 가렸다.
조금 편해졌다고, 필터링 없이 이야기가 막 나와 버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오빠 괜찮아?”
주제를 돌린 예나가 물었다.
“괜찮냐니, 뭐가?”
“재수 없는……. 아니, 그 윤현인가 하는 사람이 오빠 아이디어 홀라당 가로채 버렸잖아. 솔직히 나도 엄청 화났었단 말이야. 아이돌이 그래도 되는 거야?”
예나가 아까 봤던 용주의 눈빛을 떠올렸다.
이해는 갔다.
몰래몰래 뒤통수를 친 것도 아니고, 대놓고 면상에서 콧등을 후려갈겼으니 말이다.
자기가 같은 일을 당했더라도, 아마 표정 관리가 쉽진 않았을 거다.
“딱히 신경 안 쓴다. 관심도 없고.”
“거짓말. 아까 오빠 표정 봤다고, 진짜 진짜 화난 거 겨우겨우 참고 있는 얼굴이었어.”
“…….”
뾰로통한 예나의 표정에 용주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까 윤현이 뭐라 중얼거렸는지는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
S급 헌터.
이안의 등장에 여러 생각과 감정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나가 그렇게 봤다면, 자신의 표정은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솔직히 표정 관리를 하겠단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보였다면 오히려 잘된 거려나?’
하지만 같은 결괏값을 보고도 예나의 추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당연하겠지.
예나가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론 그게 제일 합리적인 도출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차라리 그편이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진실을 숨겨둘 그럴듯한 가림막이 있단 소리니 말이다.
“뭐…… 그래. 그래도 지금은 진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해 줘서 고맙다.”
“고맙긴, 뭘. 오빠답지 않게.”
“…….”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할 거야?”
용주의 시선을 쫓아 움직인 예나가 고개를 들었다.
“음……. 일단은 좀 더 정보를 모으는 쪽으로 가야겠지. 우리가 접해왔던 카오스 게이트와는 여러모로 다르니까.”
“역시 그렇겠지? 그럼 우선 주원 오빠부터 찾으러 가볼까?”
“이주원? 어디 있는지 아는 거냐?”
용주가 역으로 물었다.
“음……. 아는 건 아닌데, 어느 방향으로 가면 만날 수 있겠다는 느낌 정도는 가지고 있어”
“느낌?”
“응. 오빠가 온 곳이 저쪽이었잖아.”
“그랬지.”
“그리고 내가 온 곳이 저쪽 방향이었거든?”
예나가 좀 더 바다와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
“혹시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용주 오빠라면 금방 눈치챌 것 같은데.”
“방향이라고…….”
두 지점을 번갈아 보던 용주가 턱을 짚었다.
‘잠깐만.’
그리고.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이안을 중심으로 만들었던 원.
이안의 위치를 저 커다란 나무라고 가정하면, 자신과 예나가 처음 배정받았던 위치는 원을 만들었던 방향과 거의 일치했다.
‘그렇다는 건…….’
용주가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역시 눈치챌 줄 알았다니까.”
* * *
“음……. 흔적도 안 보이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숲속으로 들어온 예나가 이야기했다.
둘이 만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쯤 만날 만도 한데 말이다.
“혹시 뭔가 있었는데, 놓친 걸까? 아니면 우리가 오다가 방향이 틀어졌나?”
밀림은 살아 있는 미로나 마찬가지였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 정도는 간혹 있었지만, 어딜 가도 비슷한 풍경뿐이었다.
“아니, 녀석은 분명 여기 있었다.”
자세를 낮췄던 용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무슨 근거로?”
“이거.”
용주가 다이어리 한 권을 보였다.
“다이어리? 다이어리가 왜?”
“이렇게 하면 이해가 빠르려나?”
용주가 또 다른 다이어리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어?”
“이제 알겠지? 이쪽이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다이어리, 그리고 이쪽이 내가 방금 여기서 발견한 다이어리.”
“그렇다는 건 주원 오빠가 여기 있었단 거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예나의 머릿속에 불길함이 스쳤다.
아까 봤던 커다란 용.
만약 그런 게 주원을 데려갔다면 분명 보통 일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벌써 탈락했을지도…….
“아니, 녀석이 여기서 무언가의 습격을 받았다면, 흔적이 남았을 거다. 여기 그런 건 없어.”
“그럼…… 설마 그것도 못 보고 룰루랄라 가버린 거야?! 그 바보 오빠가?!”
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 그렇다고 봐야겠지.”
다이어리를 펼친 용주는 안쪽을 살펴보았다.
역시 안에 있는 건 백지뿐이었다.
“으……. 주원 오빠답긴 하네. 아주 잘 어울려.”
일자 눈이 된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오빠였으니 말이다.
“뭐,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못 볼 수도 있지. 낯선 환경에서 크고 넓게 보다 보면 발밑은 잘 안 보게 되니까.”
“음……. 그런가?”
“그래도 덕분에 시작 위치는 발견할 수 있었잖아. 일단은 그걸로 만족하자고.”
“응. 그것도 그렇네.”
두 권의 다이어리를 챙긴 용주는 기울어진 채로 자란 나무를 타고 올랐다.
주원이 움직였으니 흔적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풀이 누운 흔적이나, 부러지거나 베인 가지들.
그런 것들 말이다.
* * *
“주원 오빠 멀리도 갔네.”
예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꼬리를 밟을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만나는 건 또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몬스터도 딱히 안 보이는 것 같…….”
쿵!!
예나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뭔가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 사이로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나…… 뭔가 말하면 안 되는 말이라도 해버린 건가?”
예나가 뺨을 긁적였다.
‘해치웠나?’ 급의 금지어를 말해버렸단 예감이 들었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숲을 가로질렀다.
소리는 불규칙적이고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저쪽인가.’
“내리막이다.”
방향을 꺾은 용주는 잔걸음으로 경사면을 빠르게 내려갔다.
아래쪽 숲이 상당히 망가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꾸뤠에엑!!”
몬스터의 것으로 추측되는 울음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끝이 아니었다.
“꾸아아앙~!! 너만 소리 지를 수 있냐!! 나도 지를 수 있다고!!”
세상 떠나가라 맞수를 놓는 주원의 목소리도 같이 확인할 수 있었다.
스릉!
검을 고쳐 잡은 용주의 눈에 전투의 윤곽이 보였다.
몬스터의 크기는 대략 2.5m.
노란색 도마뱀을 닮은 몬스터가 주원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도마뱀의 머리와 다리, 그리고 꼬리엔 바위 같은 갑피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녀석의 상대는 역시나 주원이었다.
주원의 움직임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머리부터 시작해 네 다리를 지나 꼬리까지 도달한 연속 베기는 유려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대미지를 줬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갑피에 일부 상처를 남겼을 뿐.
쿵!!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몬스터는 땅을 흔들었다.
주원이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사이 돌진한 녀석은 또다시 주원을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