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 죄송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주원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흥!”
콧방귀를 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남은 도시락을 챙긴 그녀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치잇! 저 언니는 어른답지 못하네. 그치, 버티?”
소녀의 뒷모습에 예나가 혓바닥을 내밀었다.
한마디도 안 하고 조용히 있더니만, 갑자기 왜 폭발하고 난리인지, 원.
“혼자만 사과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주원 씨. 같이 해야 했는데.”
윤현이 이야기했다.
“아! 아니에요. 실제로 제가 제일 큰 소리로 많이 떠들었는걸요.”
“근데 저 언니 누구예요?”
예나가 물었다.
“이름은 ‘서윤’. 실력과는 별개로 평판이 그리 좋진 않더군요.”
“음, 오빠는 모르는 게 없나 보네요. 아까 주원 오빠랑 제 이름도 한 번에 맞췄잖아요.”
“하하! 아닙니다. 전 그냥 2차 시험이 끝나고 합격한 분들에 대한 조사를 좀 해봤을 뿐인걸요.”
“조사?”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길게 설명할 만큼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 식사하시죠. 식겠습니다.”
윤현이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조사라……. 그럼 혹시 조커 형에 대해서도 뭔가 알아낸 거 있어요? 이 형, 완전 수수께끼거든요.”
주원이 조커를 가리키며 물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본인 앞에서 그런 걸 물으면 실례가 아닐까 싶은걸요.”
“아…… 그런가? 아하하하! 죄송해요, 형.”
머리를 긁적인 주원이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용주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딱히 배고프다고 느끼진 않았는데, 막상 음식을 앞에 두니 허기가 졌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요 며칠 사이에 먹은 거라곤, 리자드맨들의 입맛에 맞춰진 음식들이랑 리자드맨, 그리고 모래 벌레가 전부였으니까.
“젓가락이라면 여기 있소.”
젓가락을 찾는 용주에게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복식 호흡의 주인은 아까 봤던 갑옷의 사내였다.
“아…… 그래. 고맙다.”
“저, 아까부터 궁금했었는데, 혹시 그거 코스프레예요?”
주원이 물었다.
2차 시험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저런 옷을 입은 사람은 없던 것 같은데 말이다.
“허허, 아니라오. 이건 결연한 의지를 담은 전투복. 여기까지 온 이상 전력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오.”
“그러니까 코스프레…….”
“의지를 담은 전투복! 그거 멋진데요! 멋져요! 그 의지 저도 한번 느껴봐도 될까요?”
예나의 이야기를 가로챈 주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주원은 그가 잠시 내려놓은 투구를 보고 있었다.
“음…… 좋소. 어디 한번 느껴보시게나.”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투구를 건넸다.
“와, 감사합니……. 윽!”
기쁘게 투구를 받아들었던 주원의 손이 아래로 푹 꺼졌다.
이 투구.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허허헛! 왜 그런가? 내 의지가 벌써부터 힘에 부치는가?”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라고요.”
주원이 투구를 썼다.
착용감은 보기보다 괜찮긴 했는데, 목에 자극이 올 정도의 무게감은 이걸 오래 쓰고 있기 부담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감은?”
“아! 엄청나네요. 음! 여기 담긴 의지 잘 느꼈습니다.”
주원이 급하게 투구를 돌려주었다.
“허헛! 그런가? 그거 알아주니 기쁘구만.”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사내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고금화’씨는 갑옷을 입는 걸로도 유명하십니다. 무늬만 흉내 낸 게 아닌 실제 갑옷이죠.”
“고구마?”
윤현의 부연 설명에 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고구마라니.
뭔가 굉장히 무성의한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허허! 그런 오해 많이 듣지만 아니라오. 고. 금. 화. 밝을 금자에 불 화자를 사용한다오.”
도시락 뚜껑을 덮은 금화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소이다. 든든히 먹고, 다들 제 실력 발휘하길 빌겠소.”
투구를 눌러 쓴 금화는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가 걸을 때마다 나던 철 미늘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나저나 연예인이랑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될 줄 몰랐어요.”
남은 도시락을 비우던 주원이 이야기했다.
“그런가요?”
“네! 뭐랄까, 연예인들은 더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막 거리도 두고, 매니저나 보디가드들도 있고.”
“연예인 윤현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전 헌터 윤현이니까요. 지금의 전 여러분들과 같은 한 사람의 시험 참가자일 뿐입니다.”
“와~ 뭔가 엄청 근사한 말이네요. 연예인은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빛이 나는 건가?”
“하핫! 과찬입니다. 부끄럽네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A급 헌터 앞에서도 엄청 당당했었죠? 사람들이 막 와~ 했었잖아요.”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말이죠.”
냅킨을 꺼낸 윤현이 입가를 닦았다.
“음……. 그것도 멋지네요. 음! 멋져요!”
주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보다 금발 소년, 차가운 눈의 소년이 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지 않았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커가 장미꽃 한 송이를 만들어 보였다.
“아, 맞다, 그렇지! 완전 깜빡하고 있었다!”
손뼉을 부딪친 주원이 두 눈을 반짝였다.
“용주 형, 용주 형!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용주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3차 시험, 용주 형은 어떤 거일 거라고 예상해요?”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건데? 그건 감독관한테나 물어보라고.”
목소리를 낸 용주가 흠칫했다.
무의식적으로 원래 말투를 사용해버렸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분명 생각해 두신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네? 네?”
“…….”
“저도 용주 씨 의견을 듣고 싶군요.”
윤현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지난번 시험에서도 감독관들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대단한 혜안이시더군요. 뭐라도 좋으니 참고하고 싶습니다.”
“…….”
용주의 시선이 예나를 향했다.
용주와 눈을 마주친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버티의 손을 움직여 주원을 가리켰다.
“시험 내용을 듣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 내용도 듣지 않은 채로 추측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네가 뭘 들었든 지금 상황과는 관계없어.”
“역시 예상대로 냉철하고 합리적이시군요.”
윤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막연한 추측뿐이죠. 하지만 그걸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네 생각은 어떻지?”
“1차 테스트는 개인전, 2차 테스트는 3인 1조의 협동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대규모의 협동이 필요한 미션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용주 씨 차례군요.”
윤현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뭐…… 비슷한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구성만으론 실전에서의 기량을 테스트하기엔 미흡한 부분이 많지.”
“적어도 소년네 팀의 경우는 예외라고 생각하는데, 소년.”
조커가 끼어들었다.
“……이번 시험은 아마 실제 카오스 게이트와 비슷한 환경에서 가짜 언노운을 상대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1차, 2차 시험에서 보여준 길드의 그 기술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
조커의 말을 무시한 용주가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멋진 추론이네요. 확실히 그런 시험이 나와도 이상하진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흰 모두 아군이란 말이네요. 든든한데요.”
“글쎄, 모두가 아군이라고 해도 모두가 합격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어떤 식으로든 걸러지게 되겠지.”
“…….”
“물론, 전부가 떨어지는 선택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 걸려줄 생각은 없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난 살아남을 거니까.”
“그거 멋지군요.”
* * *
“3차 시험은 뭐가 나오려나?”
“벌써부터 막 두근거려.”
“3차 시험이 끝이려나? 아니면 뒤로 더 있으려나?”
30명 전원이 모인 강당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인원들은 주로 2차 시험에 같은 조를 했던 사람들 위주로 모여 있었다.
용주의 곁엔 주원과 예나가 있었다.
딱히 용주가 함께하려던 건 아니었고, 그냥 두 사람이 용주를 따라왔다.
2시 정각이 되자 출입구가 모두 봉쇄되었다.
웅성거림은 빠르게 잦아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단, 용주를 포함한 몇 명만 빼고.
‘이 녀석…….’
무대가 아닌 강당 중앙을 향한 용주의 눈빛이 크게 요동쳤다.
그곳엔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긴 중년의 남성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적어도 인지가 따라갈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용주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이 사내는…….
소름 끼칠 만큼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들 어딜 그렇게 보고 있을까나? 연예인이라도 온대?”
“연예인은 무슨. 1차, 2차 시험 때 벌써 잊어버린…….”
한심하다는 듯이 대답하던 헌터가 뒤로 나자빠졌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곳에 사람이 서 있었다.
그것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한 인물이.
“저 사람 설마…….”
“이안이다. S급 헌터인 이안이라고!!”
“이안이라고? 진짜야?!”
“이안이라면, ‘무(無)의 헌터’ 이안? 실패한 임무도, 대적할 적도 없다는 완전무결의 헌터?”
S급 헌터 이안의 등장에 강당의 공기가 바뀌었다.
A급 헌터만 해도 어마어마했는데, S급 헌터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우리 친구들, 많이 놀란 모양이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핫!”
이안의 눈동자가 정확히 몇 명을 짚어냈다.
“대인께서 3차 시험의 감독이십니까?”
금화가 물었다.
“그럼. 기획부터 진행까지 이번 3차 시험은 내 주관이지.”
“S급 헌터가 기획을?”
“대체 어떤 시험이길래…….”
이안의 한마디에 벌써 불안해하는 헌터들이 생겨났다.
“하핫! 벌써 그렇게 긴장들 하지 마. 너희 중에 몇 명은 이미 내가 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니까.”
“이안 헌터님의 시험을요?”
“그래. 2차 시험 중에 내가 기획했던 과제가 하나 있었어. 누가 내가 낸 시험을 통과했는지는 물론 비밀이지.”
“그런…….”
“뭐, 그 이야기는 그쯤이면 될 것 같고. 다들 날 잘 아는 것 같은데, 정식으로 소개는 해야겠지? 난 이안, 그냥 옆집 아저씨처럼 편하게 생각해.”
“…….”
헌터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E급 헌터가 S급 헌터를 옆집 아저씨처럼 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응? 분위기가 왜 이래?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이안 헌터님.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헌터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남들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윤현이 이야기했다.
“여기 모인 전원은 E급 헌터입니다. 계급 사회로 비유하자면 천민이나 마찬가지죠. S급 헌터인 헌터님은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천민이 어찌 왕을 눈앞에 두고 옆집 아저씨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오…….”
“역시 윤현이야.”
윤현의 현란한 말솜씨에 작은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다.
“합리적? 우리 윤현 헌터는 정말 그게 합리적인 비유라고 생각하나요?”
“물론입니다.”
“그런가?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내 생각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표정을 숨긴 이안이 조금 자리를 옮겼다.
“그럼 슬슬 준비한 대본을 읽어보도록 할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이안은 두 번 접은 메모장 한 장을 꺼냈다.
“아~ 1차, 2차 시험을 거치며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역량을 끌어내면 3차 시험도 충분히 합격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준비해온 대본을 펼친 이안이 글을 읽어나갔다.
마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은 톤과 분위기였다.
“대충 이런 느낌?”
어깨를 들썩인 이안이 쪽지를 집어 던졌다.
“대충 이런 느낌이라고 하셔도…….”
“아직 서론밖에 못 들은 것 같은데요.”
헌터들이 난감함을 표했다.
“그야 서론만 적어왔으니까. 여기서부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멀뚱멀뚱 눈을 깜빡인 몇몇 헌터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유분방한 이안의 성격은 그들이 생각하던 S급 헌터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