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으아! 으아아악!!!”
자신의 왼손을 확인한 테서락이 끔찍한 괴성을 질렀다.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다, 구원자!”
이성을 잃은 테서락은 무작정 돌진해왔다.
아까와 같은 움직임은 없었다.
정면에서 테서락을 맞이한 용주는 집요하게 놈의 왼쪽을 파고들었다.
테서락의 왼팔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공격도, 방어도, 위치를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
챙!
완벽하게 놈의 뒤를 잡은 용주는 급하게 돌아서는 테서락의 검을 쳐냈다.
포물선을 그린 검은 폭풍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다.
끝이 왔음을 직감한 용주는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촤악!
그대로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으아악!!”
테서락의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쳤다.
테서락은 벗어나기 위해 날뛰었지만, 용주는 그보다 한층 더 집요했다.
오른손만으론 용주를 떼어낼 수 없었다.
꼬리로 용주를 휘어 감은 테서락은 힘으로 용주를 떼어내려 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용주의 이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올 뿐이었다.
“죽어! 구원자든 재앙이든! 죽으라고! 나는! 나는…!”
증오가 담긴 외침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고통이 점차 사라졌고, 의식이 흐려졌다.
▶ ‘폭풍 수호대 총사령관 테서락’을 쓰러뜨렸습니다.
▷ 폭풍 수호대 전체가 ‘전의 상실’ 상태가 됩니다.
- ‘전의 상실’ 상태가 된 병사들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지 못합니다.
- ‘전의 상실’상태가 된 사령관은 무조건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185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모래벼림 황금보검’을 획득했습니다.
▷ ‘공간 균열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 ‘검은 태양의 제단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 ‘물어뜯기’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4→ Lv.5)
▷ ‘시체 뜯어먹기’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3 → Lv.4)
▷ ‘사후 강직’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3 → Lv.4)
“이걸로 빚은 갚은 거다.”
폭풍 수호대의 총사령관 테서락.
그의 피와 살을 좀 더 취한 용주는 그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흘러내린 테서락의 육체는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용주가 발동한 아이템들은 아직도 발동 중이었다.
어둠이 짙었고, 소용돌이가 몰아쳤으며, 모래 벌레들이 사방에서 날뛰고 있었다.
왼쪽 손목을 붙잡은 용주는 손목을 움직였다.
아까보단 상태가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는 게 급선무야.’
아이템 확인을 뒤로 미룬 용주는 코도 쪽으로 이동했다.
용주의 손엔 원통형의, 황금 갑옷의 파편 일부가 들려 있었다.
남은 코도의 HP는 약 10%.
상처투성이의 코도는 이동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했다고 봐도 좋았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고생 많았다.”
코도의 안장 위에 ‘소형 토네이도 유지 장치’를 내려놓은 용주는 코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육로를 이용한 탈출에는 모래 벌레와의 사투가 필연적이었다.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몇 마리나 만나게 될지.
어떤 형태로 만나게 될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코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이상 그 선택지가 그다지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땅이 아니라면 하늘을 통해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럼 가보자고.’
용주는 가지고 온 황금 조각으로 목과 머리를 감쌌다.
왼손으론 안면을.
오른손으론 뒷목을 덮은 갑주를 붙잡은 용주는 그대로 폭풍을 향해 달려나갔다.
휘이익!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바람이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웠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상처가 생겨났다.
모래가 긁고, 돌이 할퀴고, 철이 베었다.
‘사후 강직.’
피해를 최소화한 용주는 불편한 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임계점에 다다른 몸은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폭풍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휘익!
폭풍 끝에서 내던져진 용주는 그대로 모래사막 위로 날아갔다.
콰앙!!
그런데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는 모래와 부딪힌 소리와는 한창 동떨어진 소리였다.
“뭐야?! 대체 뭐가 배에 부딪힌 거야!”
“뭔가 떨어졌어!”
“설마 투석기야? 이제 와서?!”
“아니,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가서 확인해 보자!”
선체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을 확인하기 위해 리자드맨들이 몰려들었다.
갑판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갑판 아래로 내려간 이들은 파손의 흔적을 쭈욱 따라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선체의 가장 최하층.
배의 척추라고도 할 수 있는 용골은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요… 용골이!”
“세상에, 아예 배를 관통했잖아?! 대체 뭐가 떨어졌길래.”
허겁지겁 달려온 리자드맨들이 용골 아래를 불로 비췄다.
배 아래에는 아직도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모래에 반쯤 파묻힌 용주가 들어 있었다.
* * *
태양의 요새가 무너지고 반나절이란 시간이 흘렀다.
용주가 사용했던 아이템들의 효과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태양의 요새와 그 주변 다섯 요새는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황량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자력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들을 제외하곤 생존자는 없었다고 한다.
테서락이 쓰러졌음에도 퀘스트 완료 알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포탈 역시도 활성화되지 않았고 말이다.
용주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규군들의 항복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은 건 아마 그 때문일 테니 말이다.
추가적인 전투는 필요 없었다.
‘전의 상실’ 상태에 빠진 정규군은 백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태양의 요새가 멸망하는 걸 지켜본 이들은 자진해서 항복 의사를 밝혀오기도 했다.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지난번 전투에서 얻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모래벼림 황금보검
- 붉은 사막의 모래 속에서 벼려졌다는 전설의 검
- 공격력 : 55
- 착용 가능 레벨 : 33
- 요구 능력치 :힘 66, 민첩 66, 체력 66, 지능 66.
- 특수 효과 : ‘황금률’ - 골드를 소모해 ‘그릇’을 연성한다.
: ‘그릇’의 용도와 형태, 크기 등은 사용자에 의해 결정되며, 그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다.
▷ 공간 균열의 반지
- 나와 세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고 알려진 저주의 반지.
- 공간을 움켜쥐어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는 제한이 있으며,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다.
- 반지에 서린 ‘균열의 저주’를 모두 사용하면 능력을 상실한다.
- 균열의 저주 : 32%
▷ 검은 태양의 제단 열쇠
- 태양의 요새 지하에 잠들어 있는 제단으로 통하는 열쇠.
아이템은 크게 세 가지였다.
그중 두 가지는 착용할 수 있는 장비.
나머지 하나는 사용처가 분명한 아이템이었다.
“어이, 구원자. 부탁했던 검은 태양의 제단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선체 내부로 들어온 모드락이 키득거리며 웃어 보였다.
“그래? 생각한 것보단 빠르군.”
“태양의 요새에서 살아나온 녀석 중에 이야기를 주워들은 놈이 있더라고. 심문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래서?”
“태양의 요새 잔해 아래에서 녀석이 말한 입구를 확인했어. 재앙이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멀쩡하던데.”
“그래?”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용주는 보고 있던 인벤토리를 닫았다.
검은 태양의 제단 열쇠.
이건 오로지 이곳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시간이 있을 때 확인해두는 게 상책이겠지.
“성질 하고는. 그렇게 급하게 안 해도 되잖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반나절밖에 안 지났다고. 적당히 쉬고 해가 뜨면 움직이는 게 어때? 아니면 야행성이기라도 한 거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고 말이야.”
“큭! 웃기는 이야기구만. 쉬는 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특히 이렇게 평온한 밤은 더 특별하지.”
“뭐, 부정하진 않지. 그래도 움직이고 싶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그러시다면 그래야겠지요. 수틀려서 재앙이라도 불러내면 제 입장이 어지간히 곤란해지니 말입죠.”
비꼬는 말투를 사용한 모드락이 뒤로 돌아섰다.
“따라와. 입구까진 안내해 줄 테니까.”
“사양하지 않지.”
* * *
“여기야. 바로 요 앞에.”
횃불로 어둠을 밝힌 모드락이 앞쪽을 비추었다.
무너져 내린 잔해 사이로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확실히 이질감이 느껴졌다.
주변 모든 게 부서지는 재앙 속에서 이곳만은 붕괴 하나 없이 멀쩡했으니 말이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자격이 있는 한 사람뿐인 모양이야. 난 당연히 그런 자격 같은 거 안 가지고 있으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 생각인데, 불만 없지?”
“그래. 수고 많았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
“그런 소리 할 거면, 아까처럼 찬물이나 끼얹지 말라고. 분위기 봤으면 좀 끼워주면 어디 덧나? 감사받을 일 한 적 없다느니, 내 목적을 위한 일이었다느니, 그런 시시한 이야기나 하지 말고.”
“뭐… 생각은 해보지.”
“킥! 그래. 그럼 잘 다녀오라고, 구원자 양반.”
횃불로 앞을 밝힌 용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나온 나선형의 벽엔 오래된 벽화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저건…….’
벽화 중엔 유독 눈에 띄는 그림도 있었다.
지면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래 벌레.
그들이 재앙이라 부르던 그것에 대한 그림이었다.
모래 벌레에 대한 그림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래로 깊숙이 내려갈수록 더 많은 기록이 존재했다.
‘모래 벌레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일단 그러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온 용주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어둠만이 머물고 있는 석판엔 열쇠와 똑같은 모양의 홈이 뚫려 있었다.
횃불을 높이 든 용주는 석판의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리자드맨들이 무언가와 맞서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재앙은 아니야…. 그럼 저건 뭐지?’
모래 벌레와는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가로로 긴 타원형의 얼굴을 가진 생명체는 거대한 입과 거기 어울리는 수많은 이빨을 가지고 있었으며, 얼굴 전체에 조그마한 입이 수십, 수백 개 자리 잡고 있었다.
몸통은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대신 지면에서 솟아오른 수많은 촉수가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열쇠를 한 번 더 바라본 용주는 열쇠를 움켜쥐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앞섰지만, 확인해 보고 싶단 생각도 여전했다.
드르르륵!
열쇠가 홈에 들어가자 석판이 회전하며 안쪽에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횃불을 앞세운 용주는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둠만이 머물던 공간에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은은하게 감도는 빛을 살피던 용주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물소리와 함께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
물소리를 따라온 용주는 발걸음을 멈췄다.
앞쪽에 무언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인신 공양에 쓰이는 제단처럼 보였다.
‘피비린내가 났던 건 이것 때문이었나.’
제단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검은색을 띠고 있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 피에 절여져 이런 색을 가지게 된 거겠지.
제단엔 상당히 부패가 진행된 리자드맨의 시신이 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신엔 심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인신 공양이라….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누구에게 제물을 바쳤는가?
거기에 대해 생각하던 용주의 머릿속에 아까 봤던 벽화의 괴물이 떠올랐다.
“크르르르.”
그리고 그런 용주에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용주는 급하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소리가 있었지만, 위치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웃음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