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전장을 가로지르는 용주의 눈에 또 다른 바실리스크 무리가 보였다.
중심부에서 한참이나 전방으로 나온 장소였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
“입만 살았구나! 패배자 주제에! 재앙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죽여주마!”
교전 중인 바실리스크는 크게 2종류였다.
하나는 모드락이 이끄는 반란군과 테논이 파견한 지원군이 합류된 병력.
다른 하나는 그를 사로잡았던 라스락이 이끄는 정규군 소속의 병력.
전장에는 바실리스크와 리자드맨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기습은 실패인 모양이고….’
모드락에게 주었던 임무는 정규군 소속 바실리스크들을 사전에 제압하는 것이었다.
200의 병력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할당했지만, 성공률이 높은 임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들이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파죽지세로 전장을 돌파해도 거기 도달했을 즘에는 적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기 충분할 거다.
그렇기에 그에게 기대한 본질적인 역할은 시선을 분산해 테논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는 데에 있었다.
테논의 병력은 이미 합류해 있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감시의 언덕으로 향했다는 증거였다.
‘바실리스크의 숫자는 역시 이쪽이 압도적인가.’
전장에 배치된 바실리스크의 규모 중 이 부대에 속한 바실리스크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하지만 숫자에선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용주에겐 있었다.
힌트는 직접 눈으로 본 바실리스크 사육장.
당연히 모든 사육장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한 동에 사육되는 바실리스크의 숫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동 수에 곱하면 그게 곧 바실리스크의 총 숫자.
자신들이 차지한 200이란 숫자는 사육장이 모두 차 있다고 가정해도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렇기에 용주는 예상할 수 있었다.
이곳의 바실리스크가 아무리 많아 봤자 자신들에게 미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실리스크가 더 나타났다! 적의 지원군이다!!”
“라스락 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
“원거리에서 기수들을 노려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 내야 한다!”
전장을 지휘하는 적장은 안면이 있는 자였다.
용주라고 해도 멀리서 한 번 봤을 뿐인 리자드드맨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무장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이 감시의 언덕 남서쪽으로 향했다는 테논의 정보도 있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 무리는 바실리스크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바실리스크를 운용하고 있단 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군 전사자의 바실리스크에 올라탔거나.
적을 살해하고 바실리스크를 빼앗았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외부 부대인 저자가 타 부대들까지 지휘하고 있단 것.
이곳의 지휘 체계가 완벽하게 무너졌다는 방증이었다.
“속도를 높여라! 망루를 무너뜨려!”
붉은 갈기의 목소리를 빌린 용주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괴물이 나타났다!”
“화살을 겨눠라! 녀석을 쓰러뜨려!”
무리를 이끈 용주는 가장 먼저 전장에 난입했다.
용주가 가장 먼저 노린 건 궁병들이 배치된 망루.
궁수들이 겨눈 화살은 용주의 몸 여기저기에 직격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내진 못했다.
그나마 만든 상처 역시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저 녀석, 망루를 수직으로!”
“평지처럼 달리고 있잖아?!”
“히이익?!”
나무 골자로 이루어진 망루를 수직으로 타고 오른 용주는 그대로 궁수들을 도륙했다.
가장 먼저 궁수들을 노린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의 공격이 우리 쪽 바실리스크 기수들을 가장 손쉽게 무력화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쿠구궁!!
용주의 명령을 받은 바실리스크 기수들은 다른 망루들을 들이받았다.
“으아악!”
“무너져! 떨어진다고!!”
“기울어진다! 꽉 잡아!”
바실리스크의 힘과 단단함은 망루의 들보를 손쉽게 부수었고, 충격에 날아간 궁병들이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하나의 망루를 무력화한 용주는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하늘을 가른 용주는 적진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여길 들어오다니! 멍청한 녀석!”
“죽어라!”
네 방향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참격.
모든 적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은 용주는 모든 참격에 정확히 대응했다.
이전 붉은 갈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적들의 움직임은.
느렸다.
‘뱀파이어 군주의 보주랑은 또 다른 느낌의 강함이군, 이건.’
수십의 병력을 순식간에 도륙한 용주는 바실리스크의 꼬리를 붙잡았다.
뱀파이어 군주의 보주를 사용했을 때는 비유하자면 무한한 마나를 가진 마법사 같았다.
그에 반해 붉은 갈기는 신체 능력에 올인한 광전사 같은 느낌.
어떤 상처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고,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 않는 폭주 기관차 같은 느낌이었다.
“으아악!”
오로지 힘만으로 거구의 괴수를 들어 올린 용주는 바실리스크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 기수는 진작 날아갔고, 주변에서 용주를 노리던 적들 역시 회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같은 갑옷,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리자드맨들 사이에서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적과 아군이 뒤섞이는 전장에선 말이다.
그렇기에 용주는 미리 한 가지 손을 써두었다.
그건 바로 갑옷에 새겨둔 특정한 상처.
무기고를 탈취한 용주는 재무장한 리자드맨들의 갑옷에 손톱자국을 새겨놓았다.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은 전부 적.
그게 아니라면 그걸 이용해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었다.
‘간다.’
회전력을 최대로 끌어 올린 용주는 바실리스크를 집어 던졌다.
투포환처럼 날아간 바실리스크는 이내 한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바실리스크 기수는 그 자리에서 즉사.
목숨을 잃은 자는 적의 지휘를 맡고 있던 라스락이었다.
뿌우우!!
전투가 한창인 그때.
언덕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나팔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리자드맨 하나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용주의 시선이 기슭을 향했다.
모래 비탈을 타고 엄청난 양의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건….’
용주의 시선을 끄는 건 그 중 선봉에 서 있는 것들이었다.
‘배?’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는 건 아무리 봐도 배였다.
크기나 모양은 저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적이 또 온다!”
“반란군 본대까지 합류하는 거야?! 이런 젠장!”
“안 돼! 글렀어!! 이젠 정말 끝이라고!”
감시의 언덕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병력은 순식간에 전장을 덮쳤다.
전선을 그어놓았던 바리케이드들이 처참하게 짓밟혔고, 배 밑창에 수많은 정규군이 갈려 나갔다.
“크아악!”
“으억!”
이윽고 날아오기 시작하는 무수히 많은 화살.
제대로 된 대응 한 번 해보지 못한 정규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붉은 돌격대! 돌격하라!”
“아군을 공격하지 않게 주의해라! 말했다시피 바실리스크 기수 중 다수는 아군이다.”
“우와아아!!”
배와 땅을 잇는 다리가 내려오자 엄청난 숫자의 반란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말 그대로 하늘을 찔렀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바실리스크와 보병들.
썰물처럼 밀려오는 반란군들에 지휘 체계가 무너진 정규군이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구원자께서 우리와 함께한다! 우린 승리할 것이다!”
반란군 무리를 지휘하는 자들 중엔 용주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노병 테논.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는 바실리스크와 함께 전장으로 돌아왔다.
* * *
지평선 위로 떠 오르기 시작한 태양.
태양이 비치기 시작한 전장엔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전투 중 적의 증원이 한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난입도 전투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쪽이 보유한 전력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물러갔고, 살아남은 정규군 일부도 그들과 함께 도주했다.
전투 동안 용주의 레벨은 크게 올라 있었다.
현재 용주의 레벨은 32.
보상 경험치 없이 순수하게 적을 쓰러뜨려 올린 레벨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반란군 총사령관이 정중하게 자세를 낮췄다.
▷ 세력 내 평판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붉은 돌격대 내 평판도 : ∞ (신앙)
그의 행동과 함께 용주에겐 한 가지 메시지가 나타났다.
적대적이라고 표기되어 있던 평판은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까지 올라가 있었다.
“덕분에 활로로 뚫을 수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승리에 도취되고 싶겠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바실리스크 사육장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겠죠. 지금 당장 대열을 정비하겠습니다.”
“아니.”
이야기를 이어가던 용주의 모습에 큰 변화가 생겼다.
붉은 갈기의 모습을 벗어낸 용주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용주의 변화에도 총사령관의 반응은 생각보단 침착했다.
테논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지금부턴 대열을 정비하고 부상병의 회복과 휴식, 보급에 몰두한다. 남쪽 무기고를 확보해 두었으니, 부족한 물자는 거기서 충당할 수 있을 거다.”
“긴 고립에 다들 지쳤지만, 지금 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부를 게 분명합니다.”
“그래.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후에 있을 전투가 더 치열해지겠지.”
“다 알고 계시면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래. 그보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총사령관 테서락은 어디에 있나?”
불만을 묵살한 용주가 물었다.
상대는 반란군의 총사령관이었다.
하지만 신앙에 가까운 평판 덕분에 그라도 용주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최고 명령권과 결정권을 가진 이는 총사령관이 아닌 용주였다.
“테서락이라면, 이곳 태양의 요새에 있을 겁니다.”
부관을 시켜 금세 전략 지도를 대령한 총사령관이 태양의 요새를 짚었다.
‘역시 그런가.’
지난번 보았던 전략 배치도에서 대규모의 정규군이 밀집된 지역은 3곳이었다.
감시의 언덕 인근.
바실리스크 사육장.
태양의 요새.
태양의 요새는 이곳에서부터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는 건 바실리스크를 비롯한 적들의 최대 전력이 집결할 곳이 거기라는 소리군.”
“높은 확률로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사육장을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력으로 부딪치면 깨부술 수 있을 겁니다.”
각지에 흩어진 반란군을 모두 끌어모아도 정규군의 총병력에는 한없이 모자랐다.
그렇기에 지금이 바로 승부의 분수령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사육장을 치면 수적 우위와 전력적 우위를 점한 채 각개 격파를 노려볼 수 있었다.
“아니, 가게 두어라.”
반복되는 총사령관의 주장에 용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용주의 왼손엔 놋쇠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 * *
“테서락 님! 지금 막 제5 군단과 7군단이 외곽에 집결했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태양의 요새.
정규군의 총사령관실로 들어온 부관이 무릎을 꿇었다.
“적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태양의 요새를 둘러싼 다섯 요새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오늘로 며칠째지?”
“정확히 3일째입니다.”
“께름칙하군. 공성전을 걸어오는 것도 아니고, 보급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지도 않아. 녀석이 그 정도로 엉성하진 않을 텐데.”
“우리의 보급 루트를 전혀 모르는 것 아닐는지요? 함부로 공성전을 벌여오지 못하는 건 이쪽이 보유한 전력이 부담되기 때문일 겁니다.”
“음….”
부관의 추측에 테서락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소장이 보고한 인물에 대한 건 어떻게 됐나?”
사육장의 소장을 문책하는 과정에서 재앙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붉은 털을 가진 괴물에 대한 이야기.
소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 자신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결코 가볍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신경 쓰이는군. 분명 그자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텐데….”
공수가 오히려 역전된 데에는 그자의 존재가 가장 주효했다.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소극적으로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자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미지의 존재가 주는 공포.
지금껏 상대해 본 적 없는 적의 존재가 두려움과 압박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