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 *
“정지! 멈추십시오! 이곳은 통제구역입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속.
오와 열을 맞춰 이동하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막아선 리자드맨이 외쳤다.
무장 상태로 보아 상당히 계급이 높아 보이는 자였다.
그의 앞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정규군 소속의 무장을 하고 있었고, 적대감 또한 보이지 않았다.
선두를 포함한 몇몇 병사들은 정규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었으며, 그 당당함엔 기개가 넘쳐흘렀다.
부대의 규모는 대략 200명 남짓.
살아남은 반란군 중 부상병과 최소 방어 인력을 제외한 병력이었지만, 그가 알 리가 만무했다.
“무슨 권리로 우릴 막아서는 거냐.”
아이언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사내는 감히 장군감이라고 할 만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성대를 긁는 야수의 목소리의 주인이었으며, 먹잇감을 찾는 포식자의 눈을 가진 남자였다.
갑주 아래로 보이는 사내의 꼬리는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투구 위로는 두 개의 뿔이 솟아나 있었으며, 꼬리에는 비늘이 아닌 털이 자라나 있었다.
“우린 총사령관 테서락 님의 긴급한 전언을 받고 이곳에 왔다. 길을 비켜라.”
사내가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사내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병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선봉에 서 있는 이 거구의 괴수는 다름 아닌 용주였다.
용주가 지금 이 모습을 하고 있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침투를 위해선 용주 역시도 모습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누가 봐도 다른 외모를 가진 용주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얼굴을 가리는 건 크게 문제 될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규군의 무장 중엔 얼굴을 덮는 아이언마스크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의 장구를 직접 착용했을 때 몇 가지 문제점이 용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점은 두상이었다.
리자드맨은 뱀처럼 타원형의 두상을 가지고 있었다.
투구와 마스크 역시 그에 맞춰 제작되어 있었다.
인간의 두상을 가진 용주로선 앞을 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
차선책으로 용주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붉은 갈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최선이라곤 할 수 없었다.
리자드맨이 파충류라면, 붉은 갈기는 포유류 쪽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전신을 갑옷과 망토로 덮어도 똑같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둘은 눈동자의 모양도 크게 달랐다.
리자드맨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반면, 붉은 갈기는 염소처럼 가로로 찢어진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위장을 했다고 해도 눈에 띄는 존재에서 눈에 덜 띄는 존재가 된 것뿐이었다.
“^*&$%^.”
문제점은 또 있었다.
붉은 갈기로 변화하자 리자드맨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변화하며 지능 스탯이 떨어진 탓이었다.
덕분에 추가로 지능 스탯을 찍어주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용주가 이 방법을 택한 건 이 역할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테논과 모드락.
지금 만난 이들 중에선 그 둘이 가장 낫긴 했지만, 이번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될 이 일을 맡길 정도로 신뢰가 쌓인 사이는 아니었다.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해야만 했다.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일을 남한테 맡길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테서락 님의 전언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설마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건 아니겠지?”
“전령은 없었습니다. 다른 곳으로라도 전령이 왔었다면 분명 전달됐었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반란 분자 녀석들에게 전령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군.”
“살해? 이 일대의 반란 분자들은 모두 토벌을 완료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봐, 전장이랑 동떨어진 이런 곳에 처박혀 있어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나 본데, 전쟁이란 건 언제나 예상 못 한 변수의 연속이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전쟁이 끝난 이후뿐이라고.”
용주가 몰아치듯 이야기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반응이었기에, 대처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이.”
용주의 이야기에 병사는 다른 병사를 불러들였다.
초소를 지키고 있는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가서, 상부에 보고해. 확인이 필요하다.”
“지금 내 말을 못 알아먹은 거냐?!!”
확인을 요청하려는 병사의 이야기에 용주가 벼락같이 화를 냈다.
“전쟁이 한창이다. 감시의 언덕에 있던 반란 분자 녀석들이 바실리스크를 동원해 날뛰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보급을 차단하는 반란 분자들이 각지에서 활동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병력의 사기는 떨어지고, 보급품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테서락 님께선 특단의 결단을 내리셨다.”
거칠게 걸어 나간 용주가 전령을 자처했던 자를 밀어 넘어뜨렸다.
“동원 가능한 바실리스크를 모두 동원해 적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이 이상 우리의 시간을 지체시킨다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자신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용주가 손 모양 그대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상대방의 언행과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겠단 제스처였다.
“…….”
보초를 선 리자드맨은 용주를 비롯한 병사들의 모습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지게 될 게 분명했다.
꼬리가 잘려도 단단히 잘리겠지.
“……길을 열어드려라. 바실리스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려. 다른 부대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적절히 상황을 설명해 드려라. 일 늘어지게 만들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보초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리케이드가 열렸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뒤따라오던 테논과 모드락은 용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용주의 말대로 자신들은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 * *
사막의 풍경을 한참을 더 따라 들어가자, 또 다른 풍경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커다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초목 지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주위론 바실리스크 사육장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오아시스 주변은 밤임에도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무장하지 않은 리자드맨들의 모습도 보였다.
얇은 천과 조금은 더러워 보이는 가죽을 걸친 그들은 분주하게 건초더미를 운반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초소가 몇 개나 더 있었다.
이곳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말해주는 부분이었다.
초소를 지날 때마다 보초들이 앞길을 막아섰지만, 추가적으로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대신 설명해주는 가이드도 생겼고, 붉은 갈기의 압도적인 덩치와 카리스마 앞에서 굳이 나서서 책임을 지려는 자도 없었으니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 추가 병력이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용주를 포함한 병력들이 사육장으로 들어서자 한 리자드맨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육장의 총 관리를 맡고 있는, 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자였다.
“바실리스크의 추가 동원이 요청되었다고 합니다. 긴급하게 내려온 전갈이니 곧장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경례를 올린 이가 대신 대답했다.
“받은 전갈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실리스크라면 이미 충분히 동원된 걸로 압니다만.”
“테서락 님으로부터 전령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중간에 살해당한 걸로 추측됩니다. 전장의 상황이 저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거 이상하군요.”
걸음을 옮긴 소장이 용주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제가 오늘 오전에 받은 보고만 해도 전선을 밀었다는 보고였습니다. 오후에 받은 보고에는 재앙의 출현과 게릴라 병력의 토벌 소식. 그리고 보급 물자가 추가로 도착했다는 소식이 있었죠. 긴급한 상황이 있었다면, 제 귀에 이미 들어왔을 겁니다.”
“전황이란 건 초 단위로 변화하는 거다. 오전이 어떻고, 오후가 어쨌든 지금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야.”
당황하지 않은 용주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그렇죠.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없던 일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테서락 총사령관님의 명령을 받고 온 당신들은 왜 그분의 명령서를 제시하지 않는 겁니까?”
소장이 허리춤을 짚었다.
“그게 있었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시간을 허비할 필욘 없었을 겁니다. 쌍방에 말이죠. 괜찮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제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가지고 계시다면 말이죠.”
소장의 눈동자엔 의심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흥! 우린 전령이 도착했음을 전제로 파견된 병력이다. 전시에 이미 전달됐을 메시지를 반복해서 작성하는 건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용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충분히 타당성 있는 이야기군요. 그럼 다음 물음입니다. 당신들은 어디 소속의 군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소장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연한 걸 묻는군. 우린 테서락 총사령관님의 직계 정예병이다.”
“직계 정예병이라…. 그렇군요. 그럼… 우선 마스크를 벗어주시겠습니까?”
“원한다면.”
용주가 아이언마스크를 벗었다.
“세상에 저게 뭐야? 악마?”
“뿔이 투구에 장식된 게 아니었잖아?!”
“그러고 보니, 눈동자도 조금 이상하군요.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붉은 갈기의 얼굴에 정규군 소속의 인원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용주는 재앙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모습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다른 이들과 달리 침착함을 유지한 소장이 이야기했다.
“피차 마찬가지지.”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희 동족처럼 보이진 않는군요. 생애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난 재앙에게 삼켜지고 살아 돌아온 유일한 자니까.”
“……!”
용주의 대답에 소장의 표정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붉은 갈기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올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적들도 그렇게 바보만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때를 대비한 게 바로 이것.
상당량의 진실이 가미된 그럴듯한 거짓말이었다.
“재앙에게서 살아 돌아오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믿고 싶지 않다면, 믿지 않아도 좋다. 허나 나란 존재가 그 증거임은 영원불멸한 진실이다. 재앙에 물든 내 모습을 봐라.”
“말도 안 돼…. 그런 자가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겁니까? 전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테서락 총사령관님을 비롯한 고위 인사 몇 명뿐이다. 이런 긴박한 일이 아니었다면, 네가 내 존재에 대해 아는 일도 영영 없었겠지. 난 우리 군의 최고이자 최악의 악몽이니까!”
힘이 실린 발굽이 지면을 강타하자 거대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붉은 갈기의 효과로 상승된 힘은 용주가 인간의 모습으론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크게 한 번 힘을 과시한 용주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와 우리의 존재가 그렇게 의심된다면, 의심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부디 피와 맞바꾼 네 의심이 가치가 있길 빌어주겠다.”
용주가 뒤를 돌아보자 용주와 함께 온 200여 명의 반란군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전에 이야기됐던 대로였다.
“뭐 하고 있나? 어서 움직이지 않고.”
“…….”
소장의 마음속에 큰 혼란이 일었다.
자신의 의심과 행동은 분명 합리적일 것이다.
결정의 권한을 쥐고 있는 최고 책임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일 것이다.
허나, 그 확신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자의 존재, 이자의 당당함, 이자의 기개.
그 모든 게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인원과 동일한 수의 바실리스크를 준비하겠습니다.”
깊은 고뇌에 빠졌던 소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실리스크 200마리.
그건 동원 가능한 바실리스크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벌써 충분히 지체됐으니, 서둘러라.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다.”
회심의 미소를 삼킨 용주가 이야기했다.
방금 그건 상당히 위험도 높은 도박이었다.
대범하게 움직이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는 했지만, 그건 자기 암시에 더 가까운 이야기였다.
만약 그가 정말로 보고를 기다렸다면, 용주로서도 본색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면 아마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게 됐을 테지.
하지만 도박은 성공했다.
소장의 지시를 받은 리자드맨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사육장의 문이 하나둘 열렸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바위처럼 딱딱하고 가시처럼 날카로운 갑피를 가진 사족보행 생명체.
바실리스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