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뭐… 뭐야.”
“재앙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혼란 속에 몇몇 리자드맨들이 입을 열었다.
흩날린 모래 먼지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재앙의 실루엣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동그란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빙빙 돌던 재앙은 태양을 향해 몸을 곧게 세웠다.
그리고.
그걸 마지막으로 이내 쓰러져 버렸다.
“재앙이….”
“쓰러졌어?”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리자드맨들의 술렁거림에 노병이 눈을 떴다.
색 바랜 그의 눈동자에 보이는 건 재앙의 옆구리를 찢고 나오는 조그마한 무언가의 실루엣이었다.
< 돌발 퀘스트 - ‘모래 먼지의 재앙’을 클리어했습니다. >
▷ 재앙 ‘모래 먼지의 타라하칸’을 쓰러뜨렸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놋쇠 지팡이 -모래의 재앙’을 획득했습니다.
▶ 대항력이 1 상승했습니다.
▶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 무호흡 (Lv.1)
- MP 소모량 10
- 생명 유지에 필요한 요소 중 ‘호흡’이란 요소를 잠시 동안 배제시킵니다.
▷ ‘재생’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6 → Lv.7)
“젠장…. 환영식 한번 거하구만.”
모래 벌레의 옆구리를 찢고 나온 용주가 살과 가죽 일부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었다.
주된 상처의 원인은 놈의 식도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이빨들.
사후 강직의 효과로 그나마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초반에 생긴 상처 자체를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었다.
“맛도… 모래를 먹는 거나 다름없고.”
부패한 이빨을 드러낸 용주는 녀석의 유해 한 점을 더 삼켰다.
빠른 회복을 위해선 참아야 할 일이었다.
녀석의 배 속에서 날뛰는 동안 용주의 앞엔 한 가지 메시지가 나타났었다.
▷ 재앙 ‘타라하칸’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선 7 이상의 대항력이 필요합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대항력은 9.
덕분에 이렇게 뚫고 나올 수 있었지만, 지난번과 비교한다면 요구치가 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차이는 또 있었다.
이번엔 수비가 아닌 공격에 대항력이 요구되었고, 사전에 미리 공지되지도 않았다.
지난번이 튜토리얼의 성격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대항력이란 수치.
챙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챙겨두지 않으면 분명 언젠가 피를 보는 상황이 올 게 분명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네. 덕분에 새로운 스킬도 하나 생겼고, 대항력이 하나 올라갔고 말이야.’
워낙 정신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전화위복이었다.
스킬과 항마력.
양쪽 다 거를 타선이 없는 최상의 보상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돌발 퀘스트라니, 이런 것도 있는 거였냐.’
사이드 퀘스트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 또 가지를 달리하는 퀘스트였다.
‘근데 여긴 어디지? 어디까지 끌려온 거야.’
용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녀석이 일으킨 모래 먼지 때문에 시야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모래 벌레의 몸속으로 돌아간 용주는 모래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나왔었지.’
막간의 시간을 이용한 용주는 아까 얻었던 아이템을 확인했다.
▷ ‘놋쇠 지팡이 -모래의 재앙’
- 타라하칸의 힘을 빌어 모래의 재앙을 일으킨다.
- 모래의 재앙 : 통제 불가능한 모래 벌레 무리를 소환한다.
- 모래 벌레는 놋쇠 지팡이를 중심으로 반경 700m까지 활동할 수 있다.
- 한 번 사용한 지팡이는 회수할 수 없으며, 재앙이 끝난 지팡이는 소멸한다.
‘통제 불가능한 벌레무리라…. 확실히 이건 재앙이라 불릴 만하군.’
아이템의 내용을 확인한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파리, 그리고 메뚜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10대 재앙만 봐도 곤충에 의한 재앙만 3개가 포함되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공포가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모래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용주의 눈에 보이는 건 사방에 널려 있는 철 우리들이었다.
‘그렇다는 건 여긴 아까 봤던 그 캠프란 건가?’
캠프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엔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그나마 유력한 해석은 자신이 배 속에 삼켜져 있는 동안 정규군이 신속하게 철수를 결정했다는 것.
반란군의 잔당은 기동력이나 기타 다른 요소를 이유로 버려두고 간 거겠지.
용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철 우리로 다가갔다.
모래에 반쯤 파묻힌 상태로 방치된 철 우리엔 열 명 남짓한 리자드맨들이 들어 있었다.
생존자는 없었다.
‘대충 어떤 그림이었을지 짐작은 가는군.’
사망 사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였다.
하나는 공포에 의한 쇼크사.
다른 하나는 전신 골절에 의한 골절사.
전자 쪽이 차라리 고통 없이 가는 선택지였겠지.
시신들의 상태를 살핀 용주는 진원지 바깥쪽으로 점점 이동했다.
이윽고 마주한 첫 번째 생존 신호.
용주의 시야에 걸린 건 철 우리를 흔들고 있는 리자드맨이었다.
“곤란해 보이는군, 붉은 돌격대. 도움이 필요한가?”
철 우리로 다가간 용주가 물었다.
“너… 넌 뭐야?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자물쇠를 따고 있던 리자드맨이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병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용주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여… 영감님?”
“재앙의 중심에서 재앙을 삼키는 자가 나타날 때, 세상은 변화할지니. 수금과 비파로 구원자를 맞아들여라.”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구원자에 대한 구절이다.”
“구원자…?”
“넌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재앙을 삼키는 자의 모습을. 이분이 바로 구원자시다.”
노병의 한마디에 리자드맨들 사이에 큰 술렁거림이 일었다.
‘재앙…. 그 모래 벌레가 여기선 그렇게 불리고 있는 건가?’
용주는 눈썹을 기울였다.
그건 분명 자신이 한 일이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와전되어 있었다.
‘전화위복이라고, 어찌 됐든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닌 것 같으니, 그걸로 됐나?’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들리지 않았나 보지?”
용주가 다시 한번 물었다.
재앙이니, 구원자니 그런 건 알 바 아니었지만, 상황을 그냥 흐름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용주였다.
“구원자시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저흴 꺼내주십시오.”
손톱을 세운 용주는 자물쇠를 빗겨 그었다.
부서진 고리는 다물고 있던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모두를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살아남은 반란군들을 모두 규합한 노병이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은 반란군의 규모는 대략 300.
그중에는 부상병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 이 부대의 지휘를 맡은 테논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저흰 어느 쪽으로든 끝장이 났을 겁니다.”
“감사 인사라면 됐다. 그보다 너흰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저흰 폭풍 수호대의 보급로를 끊기 위한 별동대였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기습을 당해 제압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깁니다.”
‘그렇다는 건 감시의 언덕 쪽의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인가.’
“참고로 여기 있던 폭풍 수호대의 이동 경로는?”
“진행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감시의 언덕 남서쪽으로 향했을 겁니다.”
용주가 테논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계획했던 일을 최대한 빨리 실행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구원자시여.”
용주의 시선을 살피던 테논이 자세를 낮추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희 리자드맨들은 동족끼리 칼을 겨누며 전쟁 중입니다. 혼란을 진정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께서 오심을 압니다. 부디 저희와 함께해주십시오.”
테논이 자세를 낮추자 놀라운 장관이 펼쳐졌다.
그를 따라 리자드맨들이 자세를 낮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 물결은 빠르게 뒤쪽으로 퍼져 나갔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리자드맨들이 테논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만 고개를 들어라. 이런 데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용주의 이야기에 테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다. 함께할 테냐?”
“물론입니다.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잠깐!”
테논의 대답이 한창인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그의 목소리를 잘라 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물쇠를 따고 있던 그 리자드맨.
“난 전해 내려오는 구절이니, 구원자니 그런 건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
“우릴 구해준 대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누군지도 모를 네 명령에 따를 의무는 없지.”
“모드락! 그게 무슨 망언이냐!”
테논이 버럭 화를 냈다.
“영감님은 영감님께서 옳다고 믿으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전쟁을 계속 이어갈 테니.”
모드락의 걸음을 옮기자, 일부 리자드맨들이 그를 쫓았다.
테논의 뜻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머지 무리였다.
“전쟁을 이어갈 생각이 있다면, 적어도 무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용주가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했다.
모드락은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자신들의 쓰던 무기와 갑옷은 이미 무장 해제 당했고, 그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 폭풍 수호대의 무기고가 하나 있다. 녀석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해. 어둠을 틈타 공격하면….”
“전멸하겠지. 너희들이.”
“…….”
용주의 한마디에 침묵이 흘렀다.
“복종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럴 권리도 내겐 없고. 다만, 어차피 내다 버릴 목숨이라면, 함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 마침 목적지도 같은 모양이니.”
“그 말은 무기고를 공격할 생각이란 말이냐?”
“그래.”
다시 한번 할퀴기를 사용한 용주는 쇠창살 하나를 잘라 냈다.
양쪽 끝이 비스듬하게 잘린 쇠창살은 마치 죽창을 보는 듯했다.
“볼품없는 무기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거다. 어떤가? 동등한 입장에서 힘을 합쳐보는 건.”
용주가 방금 막 잘라낸 쇠창살을 던졌다.
쇠창살을 받아든 모드락은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미친 소리인 줄은 알지만, 거부하기 힘든 조건이군. 좋다. 함께하도록 하지.”
* * *
“저희가 입수한 정보보다도 경계가 더 삼엄하군요. 쉽진 않겠습니다.”
용주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테논이 이야기했다.
고지에서 내려다본 무기고는 작은 요새나 다름없었다.
눈에 보이는 병력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굳게 닫힌 철문을 통과하는 건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다.
용주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무기고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용주라고 많은 정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무기고의 위치를 알고 있었을 뿐 눈으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무기고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강을 끼고 있었다.
물길이 요새를 관통하는 모양새였다.
물이 그렇게 깨끗해 보이진 않았다.
강의 빛깔은 옅은 황토색.
강을 따라서 식물들을 비롯한 약간의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었다.
‘제대로 무장도 하지 못한 이 병력으로 정면 돌파 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겠군.’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오딘의 눈’이라는 이름의 아이템이었다.
“잠시 집중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군.”
용주가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상병들을 살피며 대기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놀란 표정을 삼킨 테논이 자리를 떴다.
▷ 오딘의 눈을 사용했습니다.
- 오딘의 눈과 사용자의 시야가 공유됩니다.
공중으로 떠오른 오딘의 눈은 곧장 요새의 상공으로 향했다.
오딘의 눈의 시야는 용주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시점임에도 내부 병력들의 배치나 움직임을 확인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점이 있다면, 소리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 정도가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대화가 있다면, 파악하지 못할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 * *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한참을 집중하고 있던 용주는 오른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뗐다.
오딘의 눈으로부터 전해지던 시각 정보가 더 이상 전달되어 오지 않았다.
적발되거나, 요격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속시간이 끝났을 뿐.
아쉬울 건 없었다.
필요한 정보는 이미 충분히 모았으니 말이다.
“일은 다 보신 건지요?”
내려오는 용주를 발견한 테논이 물었다.
“그래. 덕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생겼지.”
“그러셨군요. 하나, 그 전에 괜찮으신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비를 맞은 것처럼 얼굴에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니, 샘처럼 솟아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해 보이는군요.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저희로선 이해하기 힘듭니다.”
노병의 이야기에 용주는 콧등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집중하느라 땀이 이렇게 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리자드맨들은 땀이란 개념 자체를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이건 일이 내 뜻대로 풀리고 있다는 신호다.”
용주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셨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유치원생도 안 속을 거짓말이었지만, 리자드맨들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보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리자드맨은 잠영을 할 줄 아나?”
“잠영이라면 수면 아래로 헤엄치는 것을 말씀하시는 걸 테죠. 물론입니다. 수중 호흡이 가능한 저희에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요새로 침투할 수 있는 경로 중 가장 유용해 보이는 건 역시 물길이었다.
감시망이 가장 적은 루트이기도 하고, 동시에 몸을 숨기기에도 가장 적합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물길은 무기고의 정중앙을 관통하고 있었다.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그곳엔 무기고의 핵심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