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놀라운 이야기네. 믿기 힘들 만큼.”
수지가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그렇겠지. 누가 그런 이야기 하면, 나라도 안 믿을 테니까.”
“그래도 믿어. 거짓 없는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그러셔.”
“그래도 그 사람에게 조금은 감사해야겠네.”
“감사? 뭐가 말이냐?”
“내 가족을 살려준 거.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넌 거기서 죽었을 거란 소리잖아. 그 방과 그 사람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만큼은 감사해야겠지.”
“뭐, 그러냐. 아무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용주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제 그 방법이란 거에 대해 들려주실까?”
“아… 그거. 이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수지가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수지의 손안엔 사파이어처럼 생긴 작은 보석이 있었다.
“이건…….”
“이형 워프 장치. 이형 결정체를 가공해 만든 소모품이야.”
“이형 워프 장치? 들어본 적 없는 물건인데.”
이형 결정체를 가공해 만든 소모품이라면 용주도 제법 알고 있었다.
이형 신호탄이 그 대표적인 사례고 말이다.
하지만 저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겠지. A급 이상의 상위 헌터가 아니면 좀처럼 접할 수 없는 물건이니까.”
“아, 그러셔?”
“이건 보통 게이트의 긴급 지원을 위해 사용되는 물건이야. 나도 그 때문에 가지고 있는 거고. 주요 기능은 서로 다른 두 지점의 연결. 일회용이긴 하지만, 헬기나 비행기랑은 비교할 수도 없을 속도로 이동할 수 있어.”
“무슨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네.”
공간과 공간의 연결.
적어도 용주에게 그건 낯선 일은 아니었다.
실존하는 두 지역을 연결하는 거라면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편이라고 봐야겠지.
퀘스트 게이트라고 이름 붙인 그 괴상망측한 공간은 시간의 흐름조차 현실과는 달랐으니 말이다.
“맞아. 그렇지만 사실. 그리고 이게 내가 생각한 해결책.”
수지의 손이 용주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사용하는 물건이지, 이건?”
“사용 방법 간단. 원하는 곳을 생각하고 던지기만 하면 끝. 원래라면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필요로 하지만….”
수지가 손을 한 번 움켜쥐었다.
이형 워프 장치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럴 필요 없어. 내 마나를 넣어뒀으니까.”
손을 뻗은 수지가 용주에게 이형 워프 장치를 건넸다.
“그래…. 고맙다.”
“천만에.”
“그런데 이런 걸 막 넘겨도 되는 거냐? 나중에 문책당하거나 하는 건….”
“남 걱정할 여유는 있나 보네?”
“…그냥 피차 나중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진 않는 건가 싶은 거다. 발목이 잡히면 이리저리 피곤해질 테니까.”
용주가 시선을 피하며 이야기했다.
“게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누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힘들어할 거 아니야. 가족이라면서.”
용주가 속삭이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후훗, 자상하네.”
한동안 무표정하게 서 있던 수지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혀를 찬 용주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찮을 거야.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 그러냐. 칫! 이거 괜히 손해만 본 기분이구만.”
용주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할 이야기 끝났으니 이만 가자. 역까진 바래다줄 테니까.”
“응.”
뒷짐을 쥔 수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지의 얼굴엔 아직까지 미소가 묻어 있었다.
* * *
“자, 여기 회수한 이형 결정체.”
엔틱풍의 어두운 실내로 들어온 사내가 자루 하나를 내려놓았다.
사내의 얼굴엔 역병 의사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양이 상당히 적네.”
후드를 머리끝까지 눌러 쓴 여인이 대답했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난 1g도 안 빼돌리고 탈탈 털어놓은 거라고.”
“당연히 그러시겠지. 장난치다가 머리가 날아가고 싶진 않을 테니까.”
“보스는? 안에 있어?”
“오늘은 일이 있다고 했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칫! 또 골방에 틀어박혔나 보지? 재미없게.”
성질을 잔뜩 부린 사내가 가면을 벗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사내의 이름은 ‘프라이드’.
조직 내에선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보스는 이 많은 이형 결정체를 가지고 뭘 하는 거야? 혹시 알고 있는 거 있어?”
소파에 드러누운 프라이드가 물었다.
“일부는 이형 워프 장치 제작에 활용되고 있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양이 너무 많잖아. 보스는 따박따박 전 물량 다 쓰는데.”
“그 궁금증의 출처가 어딘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봤는지?”
“아, 알았어. 괜한 호기심 가지지 말라는 거지? 알고 있다고. 더 안 물을게.”
프라이드가 손을 쉬쉬 저었다.
“‘러스트’는?”
“몰라. 어디서 혼자 행복이라도 찾고 있나 보지.”
프라이드가 귀찮음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그래? 일은 좀 어땠어? 충분히 즐거웠어?”
“나름. 그래도 만족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좀 더 센 놈이랑 붙어보고 싶어. 좀 더 강한 놈이랑 피가 튀는 살육전을!”
프라이드가 송곳니를 보이며 히죽거렸다.
그의 표정에선 살기와 광기가 흘러넘쳤다.
“……그래? 그거 잘됐네.”
보따리를 푼 여인은 이형 결정체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 * *
솨아아~! 솨아아~!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모래사장.
끝없이 펼쳐진 파란 바다를 보고 있던 용주는 자판기에 다가갔다.
‘수정과…… 없네.’
아쉬운 대로 탄산음료 한 캔을 뽑은 용주는 주차장 돌계단에 걸터앉았다.
‘예은이가 알면 아주 기겁하겠구만.’
시험 당일.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다고 한다면, 시험을 포기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뭐… 물론, 시험을 포기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지만.
캔을 비운 용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게이트 개방은 이제 금방이었다.
‘그나저나 사막이랑은 영 연이 없어 보이는 장소구만. 이번은.’
서바이벌을 펼쳤던 자기장의 땅은 노량진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인상이었다.
반면, 붉은 사막이란 이름과 이 푸른 바다는 영 매칭이 되지 않는단 느낌이 들었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긴 하지.’
용주는 수지에게서 받은 이형 워프 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
그 밖에 주변을 채우던 소리들은 어느 한 시점을 계기로 적막을 감추어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모래사장을 밟았다.
모든 시간이 멈추어 버린 그곳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균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또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건 아니겠지?’
포탈 앞에 선 용주가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번 같은 경험은 죽어도 사양하고 싶었다.
게이트 내부로 들어선 용주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두 발은 지면에 붙어 있었다.
다만, 기도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은 좀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런 걸로 안심할 수 있다니, 나도 점점 이상해지는 건가.’
자조 섞인 생각을 삼킨 용주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용주가 있는 곳은 거대한 토벽집 내부였다.
‘외양간? 마구간? 기본 틀 자체는 그런 사육 시설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크기는 대체….’
거인국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사이즈였다.
뭔가 엄청 거대한 동물을 사육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나 싶긴 한데….
건물 자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루와 천장 여기저기가 삐걱거렸고, 욕조만 한 물통은 말라 있었으며, 오래된 배설물들도 치워지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세를 낮춘 용주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건물 크기에 비해 창은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유리로 된 창은 달려 있지 않았다.
대신, 점토로 만들어진 문이 각 창마다 달려 있었다.
‘붉은 사막이라…. 확실히 제대로 오긴 했군.’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이었다.
한쪽 지평선만은 바다가 보였기에, 자신이 보던 현실의 풍경과 묘하게 닮았단 느낌이 들기도 했다.
▶ 다음 두 개의 세력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 폭풍 수호대.
- 정규군.
- 세력 규모 : 우세.
- 무기 규모 : 많음.
- 훈련 정도 : 높음.
- 보급 정도 : 안정적.
- 퀘스트 클리어 보수 : 없거나 적음.
▷ 붉은 돌격대.
- 반란군.
- 세력 규모 : 열세.
- 무기 규모 : 적음.
- 훈련 정도 : 낮음.
- 보급 정도 : 불투명.
- 퀘스트 클리어 보수 : 많음.
바깥 풍경을 확인한 용주의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게 퀘스트에서 언급되어 있던 분쟁 중인 두 세력인 모양이다.
‘두 세력의 전력차가 생각보다 크잖아.’
한눈에 봐도 두 세력 간의 전력차가 상당했다.
어딜 선택하느냐에 대한 선택권은 확실히 자신에게 있었다.
폭풍 수호대라는 이름을 가진 정규군의 편에 선다면, 훨씬 쉽게 퀘스트를 정리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다만.
‘보상이 마음에 걸리는데.’
그렇게 되면 클리어 시 보상이 불투명해졌다.
아이템이나 골드도 물론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대항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퀘스트 클리어로만 올릴 수 있는 그 스탯은 올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올려놓는 게 상책이었다.
후에 어떤 불상사로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 붉은 돌격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YES / NO
잠시 고민을 하던 용주는 붉은 돌격대를 승리로 이끌기로 결정했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취미는 없었지만, 역시 그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 붉은 돌격대 내 평판도 : 0 (적대적)
세력 선택을 마치자, 용주의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적대적이라고?’
세력을 선택했음에도 평판은 적대적이었다.
‘그러니까 고를 순 있게는 해줄 테지만, 세력에 끼어드는 건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말인가? 하, 친절하기도 하지.’
불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면, 적어도 내부 말단으로라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예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다.
‘뭐 됐다. 일단은 좀 더 높은 곳에서 주변을 살펴보기로 하자고.’
불만을 접어둔 용주는 떨어져 있던 나무 사다리를 살펴보았다.
삭은 부분이 제법 있었지만, 사용할 수는 있어 보였다.
사다리를 세운 용주는 2층으로 올라갔다.
건물은 총 3층이었기에 용주는 사다리를 회수한 뒤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3층에 도착한 용주는 천장에 난 문을 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평평한 옥상엔 붉은색의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붕으로 올라온 용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생명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맞은편에 자리한 언덕 위에 무언가 있는 게 보였다.
너무 멀어 확정 짓기는 힘들었지만, 인위적인 구조물인 것처럼 보였다.
‘역시 버려진 건가?’
옥상에서 보았던 구조물로 다가온 용주가 낮췄던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보았던 구조물의 정체는 모래언덕에 세워진 바리케이드였다.
11시, 3시, 6시.
세 군데로 길이 나 있는 버려진 캠프.
캠프 내부에 움직임이 없단 건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이미 알고 있었다.
캠프로 들어선 용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불을 피운 흔적이었다.
캠프의 중앙에 위치한 흔적은 이곳이 의외로 최근까지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버려졌다면 최근이고, 그게 아니라면 장거리 이동을 위해 사용하는 임시 거처 정도 되나 보군.’
발소리를 죽인 용주는 천막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곳에 있는 천막 중 가장 사이즈가 큰 천막이었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신중히 행동하는 게 좋겠지.’
첨예검을 뽑아 든 용주는 천막을 조금 찢어냈다.
안쪽에 생명체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또 어떤 생명체가 사는 거지?’
바깥쪽 발자국들은 바람과 모래에 사라졌지만, 천막 안쪽엔 발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모양으로 추측건대, 일단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신발을 신고 있단 느낌도 없었다.
‘파충류 같은 느낌인가? 일단은.’
발자국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도마뱀의 발자국이었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크기가 상당히 달랐지만, 모양에선 상당한 유사점이 보였다.
발자국 사이에 종종 기다란 무언가가 끌린 자국 같은 게 섞여 있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한 테이블 앞에 섰다.
테이블 위엔 지리가 표시된 지도가 있었고, 장기 말 몇 개가 그 위에 배치되어 있었다.
전략 테이블.
아마 그런 용도로 사용되던 물건인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