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잘 먹겠습니다.”
짧은 기도를 올린 예은이 국자를 집었다.
“아, 그렇지! 언니, 앞접시 먼저 주세요.”
“응. 고마워.”
“고맙긴요. 근데 언니 모자 벗는 게 더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자연스럽게 질문을 건넸던 예은이 혼자 흠칫 놀랐다.
혹시 숨기고 싶은 흉터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죄송해요. 혹시 제가 실례되는 말이라도 한 건….”
“으응. 아니야.”
고개를 저은 수지가 모자를 벗었다.
수지의 맨얼굴에 예은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럼 잘 먹을게.”
“아… 네! 차린 건 없지만 부디.”
전에 만났을 때부터 미인이라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여자가 봐도 반할 만한 미모였다.
“상에 이렇게 셋이 앉는 거 참 오랜만이다. 그치?”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본 예은이 이야기했다.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그런 얼굴이었다.
“처음이겠지.”
“에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용주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예은이 손을 저었다.
“그러고 보니 수지 언니, 의무대에 계셨다고 그러셨었죠?”
“응. 맞아.”
“그럼 의료 헌터신 거예요?”
“응. 맞아.”
“와아, 그럼 혹시 저희 오빠랑 만나게 된 것도?”
“응. 내가 의료 헌터가 아니었다면,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야.”
“와, 역시!”
예은이 손뼉을 부딪쳤다.
“뭔가 즐거워 보이네.”
“히히, 그게요. 저희 엄마랑 아빠도 그런 식으로 만나셨다고 그러셨었거든요.”
“예은아! 너! 무슨 소리를!”
놀란 용주가 외쳤다.
낯선 외부인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냔 말이다.
“왜? 뭐, 없는 이야기 지어낸 것도 아니잖아.”
“그럼 두 분도 헌터셨다는 이야기?”
수지가 물었다.
“네! 일 갔다 오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어요. 예를 들면….”
뭔가를 말하려던 예은을 용주가 급하게 제지하고 나섰다.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 없잖아.”
“괜찮다면, 조금 더 듣고 싶은데.”
수지가 관심을 표했다.
“너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할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
고개를 돌린 수지가 식사에 집중했다.
대화가 끊어져 버린 식사.
예은은 냉랭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오빠 오늘 뭔가 저기압이네요.”
거실에 앉은 예은이 이야기했다.
예은의 손엔 과도가 들려 있었다.
용주는 부엌에서 혼자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돌아가라는 말을 했다가, 동생에게 거하게 한 소리를 들은 용주였다.
“신경 쓰지 마.”
“저… 되게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언니랑 오빠랑 무슨 사이인지 혹시 물어봐도 돼요?”
예은이 수줍게 물었다.
“아! 막 다른 엄청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오빠가 집에 누구 데려오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서! 단순한 호기심이라고나 할까….”
“궁금해?”
“네! 꼭이요!”
“가족이야. 가족.”
“음, 그렇구나. 가족이란 말이….”
고개를 끄덕이던 예은이 빳빳하게 굳어 갔다.
잔잔한 목소리 속에 엄청난 것이 들어 있었다.
“네?! 가족?! 가족이요?!”
“응.”
수지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라면… 그…! 제가 생각하는 그 가족 말씀하시는 거 맞죠?!”
“아마 그렇지 않을까.”
“대체 언제부터, 아니, 그보다 그럴 거면 먼저 소개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예은의 곁으로 발소리 하나가 다가왔다.
“오해하잖아.”
쟁반 하나를 들고 온 용주가 수지의 머리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다짜고짜 저런 이야기를 하면, 세상 누가 제대로 이해하겠느냔 말이다.
“오해?”
“이 녀석, 카오스 게이트에서 같이 활동했던 헌터들을 가족이라고 불러. 그래서 방금 그런 이야길 한 거고.”
“아, 뭐야. 그런 거야? 난 또.”
예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세요.”
예은이 다 깎은 사과를 내놓았다.
“후식까지 대접받고, 귀빈이네.”
“그래도 조금 안심했어요.”
“안심했다니, 왜? 생각하던 그 가족이 아니라?”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예은이 잠시 뜸을 들였다.
“오빠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요.”
“…….”
“엄마가 그런 이야기 자주 해주시곤 하셨었거든요. 헌터는 가족이라고. 엄마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단 걸 알아서 안심했어요.”
예은의 한마디에 정적이 흘렀다.
수지는 물론이고, 용주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지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가족사진 속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다시 한번 눈에 밟혔다.
“헌터는 가족이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었단 말이지?”
수지가 물었다.
“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렇구나.”
수지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헌터는 가족이다.
그렇게 말했을 때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용주의 모습.
하지만 역시 그때의 그 분노와 원망의 감정에 대해 100% 이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건 용주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교집합이 있다는 것 정도.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사람은.
어쩌면 용주 어머니와도 관계가 있었던 인물일지도 몰랐다.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다.”
과일 접시를 깨끗이 비운 수지가 모자를 눌러 썼다.
“벌써 가시게요?”
“응. 시간도 늦었고, 피곤하기도 하고.”
“언니, 다음 시험 때도 의료 헌터로 동행하시는 거예요?”
“응. 내가 책임자니까.”
“와아~. 그럼 다음 시험 때도 저희 오빠 잘 좀 부탁드릴게요. 언니가 있으면 든든할 거예요.”
“응, 그럴게. 근데 괜찮겠어? 나랑 만난다는 건 어딘가 다쳤다는 뜻인데.”
“아! 그것도 그렇네요. 하하하!”
예은이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잠깐만.’
같은 이야기를 듣던 용주는 머릿속에 무언가 스치는 걸 느꼈다.
이 녀석은 분명 시험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2차 시험 중 일부도 이 녀석이 출제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시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음 시험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갈게.”
“또 와요! 언니!”
예은의 인사를 뒤로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용주는 수지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
“자리를 옮기지.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옥상으로 자리를 옮긴 용주는 난간에 손을 올렸다.
“멋진 야경이네.”
용주 옆에 나란히 선 수지가 이야기했다.
“3차 시험에 대해 너라면 알고 있겠지?”
“어느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까?”
“…….”
용주의 물음에 침묵이 흘렀다.
“어마어마한 소리를 되게 간단하게 하네. 그거 나보고 부정행위를 하라는 소린데.”
“…….”
“왜? 자신이라도 없어진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럼?”
“…….”
수지의 물음에 용주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어딜, 어떻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죽어도 가야 하는 일과 시험 일정이 겹쳐 버렸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면, 시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죽어도 가야 하는 일이라니, 그거 큰일이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수지가 숨을 내쉬었다.
뭔가 더 묻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묻지 않는 눈치였다.
“근데 그런 거라면, 시험에 대해 안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보가 있다면 구멍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모하네. 억지스럽고.”
“나도 알아. 그렇지만 둘 다 잡으려면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어. 동생을 위해서라도 절대 시험을 포기할 순 없다고.”
용주가 손을 움켜쥐었다.
수지는 말이 없었다.
그저 먼 곳을 한동안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험 예정시간은 오후 2시. 장소는 전과 같은 그 강당이야.”
“!”
수지의 목소리에 용주가 고개를 돌렸다.
수지는 여전히 야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죽어도 가야 하는 일이란 건 몇 시부터?”
“대략 1시.”
“사이 시간은 1시간 정도네. 많이 부족한 거야?”
“일 자체를 끝내는 데에는 문제없다. 다만….”
“다만?”
“거리에 문제다. 1시간으로는 시험장에 들어갈 수 없어.”
퀘스트 게이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든지 현실 시간엔 큰 영향이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건이 설령 동시에 일어난다고 해도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무리는 없었다.
다만, 현실과 현실 사이의 문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퀘스트 게이트가 가리키는 곳은 속초.
종로와의 거리는 대략 158km였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건 기껏 해봤자 대중교통.
기다리거나 막히는 시간 없이 움직여도 대략 3시간은 필요하단 계산이 나온다.
퀘스트 게이트의 유예 시간이 있다고 해서, 시험 쪽을 먼저 처리하는 건 더욱 불가능.
그 안에 시험이 끝날 가능성도 희박한 데다, 마찬가지로 시간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목숨을 잃게 될 테지.
“그래?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너 지금 내 말 제대로 듣고 있던 거 맞아?”
용주가 따지듯 물었다.
대체 지금 이 이야기의 어디가 다행일 수가 있느냔 말이냐.
“응, 제대로 듣고 있었어. 똑같이 다시 말해줄 수 있을 만큼.”
“…….”
“그런 거라면, 진작 그렇다고 말해주지 그랬어. 도와줄 수 있는 방법. 알고 있는데.”
“그게 정말이야?!”
용주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꽉 막혔던 무언가가 한 방에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응.”
“뭔데? 알려줘. 이렇게 부탁할게.”
“맨입으로?”
수지의 한마디에 찬바람이 불었다.
용주는 수지를 노려보았다.
잔잔한 수지의 눈동자는 빤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뭘 원하지?”
용주가 마지못해 물었다.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하지만 지금은 숙여야 할 때였다.
“아까 다 못 들은 이야기. 비밀의 방에 혼자 남겨졌을 때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 거짓 없는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
“…….”
수지의 대답에 용주는 입을 앙다물었다.
한 번 더 거짓말을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의심한다 한들 증거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다만….
이 녀석에게라면 한번 말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가족이라고 말해주는… 이 녀석이라면….
“아무에게도…. 형만을 포함한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먼저 약속해라. 너 혼자만 알고 있을 거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입을 열었다.
“응. 약속할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웃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응. 약속할게.”
수지가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용주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 길드에서 비슷한 걸 물은 적이 있었다.”
“그래?”
“그때 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길드에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응. 그렇구나.”
“그날 난 빛이 사라지는 걸 마지막까지 보고 있었다. 너희에겐 석판에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다고 했었지만, 실은 그건 거짓말이었지.”
“거짓말…?”
수지가 같은 말을 되물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래. 거기 그런 건 없었어. 탈출할 수 있는 건 세 명뿐. 남은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았지.”
“그럼 그때 약속은…. 나한테 거짓말 시켰던 거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용주의 사과의 수지가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계속해줘.”
“빛이 사라지자, 사신형 언노운들은 제단을 포위했다. 그리고 곧 공격이 시작됐지. 녀석의 낫이 내 심장을 꿰뚫는 걸 난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꿰뚫렸다고?”
“그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지. 그리고 그때, 그것이 나타났다.”
“나타났다니, 대체 뭐가?”
“인간. 아니, 인간처럼 보이는 무언가.”
“…….”
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놀란 눈동자를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죽기 직전에 보는 환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녀석을 똑똑히 봤다. 녀석이 다가오자 언노운들이 물러갔지. 녀석은 뚫린 내 심장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난 정신을 잃었지.”
“…….”
“정신을 차렸을 때 게이트는 닫혀 있었다. 내 몸에 변화가 생긴 건 그 이후부터였지. 지금까지 미미했던 기량의 상승폭이 가팔라졌고, 무엇보다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자가 치유에 강점을 둔 좀비 같은 능력이었지.”
용주가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